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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을 만들어 낸 우리나무, 벚나무 스크랩


벚나무의 모습

바야흐로 벚꽃잎이 울려 퍼지는 4월이 왔다. 벚꽃이라 하면 많은 사람이 일본의 나라꽃으로 생각하며 미워하는 마음이 있기도 하지만 벚꽃의 자생지는 본래가 한국이다.

산벚나무, 왕벚나무, 섬벚나무, 털벚나무, 수양나무 등 종류가 많은데, 일본인의 국화는 왕벚나무이다. 일본에는 자생지가 없고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에서 자생지가 확인되었으며, 독일학자가 자생지를 확인 정식으로 학계에 보고한 바 있기도 하다. 이 중에서도 산벚나무가 바로 매화, 산수유, 생강나무 등 봄의 시작을 알리는 꽃에 이어 아직 새잎의 푸름이 시작하기도 전에 온통 화사한 봄의 설렘에 젖어들게 하는 벚꽃놀이를 즐기도록 하는 수종이다.

벚꽃이라 하면 ’봄’을 생각하게 할 정도로 봄을 온통 홀로 독차지하며 뭇사람들의 마음을 간지럽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 벚나무는 문인들에게 있어서는 그리 사랑받지 못했던 존재인 듯하다. 그 이유인즉슨, 그 많은 꽃과 나무를 글과 그림으로 표현함을 즐겼던 선조의 작품에서 벚나무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대신 벚나무는 서화(書畵)가 아닌 실질적인 부분에서 쓰임이 큰 수종이었다.


■ 벚나무에 관한 기록



벚나무의 자생지가 우리나라 한라산과 지리산이라고는 하나, 옛 기록에서 벚나무에 관한 기록을 찾기란 쉽지 않다.
조선 중기 문인이었던 정희득(鄭希得, 1575-1640)은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 3년을 지냈는데, 이때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예천원 천수가 우리 형제를 청해서 차를 마련하고 친절히 대접했다. 뜰에 있는 꽃나무<br/>한 그루가 산행화 같은데 겹꽃으로 매우 고왔다. 왜인들은 이를 앵화라 한다.<br/>-[해상록] 중-


조선 후기 문인 이덕무(李德懋, 1741-1793)도 그의 저술서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왜인은 앵화를 중히 여기는데, 앵은 산앵이니, 곧 화다. 나무 높이는 두<br/>세 길이고, 꽃은 보통 백색인데 자색 꽃도 있으며, 홑꽃잎의 것과 겹꽃잎의 <br/>것이 있다. 온갖 꽃 중의 어른으로 여기므로, 이름을 가리켜 부르지 않고 그저<br/>꽃이라 부른다.<br/><br/>-[청장관전서]-,[청령국지] 중-

여기서 청령국은 일본 땅이 잠자리를 닮았다고 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산벚을 벗이라 하는데 또는 멋이라고 잘못 가르키기도 한다.<br/>-[아언각비] 중-

조선시대 실학자인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지은 어원 연구서 내용 중 일부이다. 이러한 연유에서인지 옛날에는 벚나무 또는 멋나무라 했으며 열 배를 ’벗지’나 ’멋지(墨櫻)’라고 했고 제주도에서는 지금도 이를 ’사오기’ 또는 ’먹사오기’라 부른다.




여타 다른 꽃, 나무들과는 달리 전해져 오는 시나 그림은 없지만, 벚나무의 존재만큼은 확실시 해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겠다.


■ 궁재(弓材)로 쓰인 목재

벚나무의 재목은 탄력이 있으며 굳고 치밀하여서 썰매, 낫자루 등에도 이용되었으며 특히 활과 화살을 만드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재료였다.

조선조 인조대왕 때의 일이다. 효종임금이 왕자일 시절 병자호란을 겪고 중국에 볼모로 잡혀갔다 돌아오게 된다. 이때 효종은 당시 치욕을 갚기 위해 북벌을 계획하며 병력을 기르고자 서울 우이동에 수양벚나무를 대대적으로 심게 한다. 이는 벚나무의 목재가 치밀하고 견고하여 활을 만드는 재료로 쓰임이 유용하였고, 또 올벚나무의 껍질은 다른 벚나무보다도 더 매끄러워 활에 감으면 손이 아프지 않아 활을 생산해내는 데 중요한 수종이었기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효종은 이를 이루지 못하고 임종을 맞이했지만, 지금의 지리산 밑 구례 화엄사 경내에 있는 올벚노목이 그 뜻을 이어가고 있다. 이는 우이동의 수양벚나무의 뜻을 본받아 벽암선사(碧巖禪師)가 심은 것 중에서 살아남은 것으로 지금은 1954년 8월의 태풍에 나무중동이 꺾어져 버려 거목의 미관이 손상되었다.

구례 화엄사 올벚나무(천연기념물 제38호)


이 외에도 수피는 다려서 민간약으로 널리 쓰였는데 두드러기, 쇠고기 체한 데, 기침을 멎게 하는 진해제 등 다방면으로 유용한 재료였다.


■ 팔만대장경의 주재료 벚나무


팔만대장경판


팔만대장경은 11세기 초 고려 때 몽골의 침입을 받자 부처의 힘을 빌려 북방 적들의 공격을 막아내고자 불경을 목판으로 인쇄한 것이다. 본래는 고려 현종 2년(1011)부터 근 80여 년에 걸쳐 초조대장경이라 부르던 대장경판을 완성하였으나, 몽골군의 2차 침략으로 불타 없어지고 지금의 팔만대장경을 만든 것으로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라고도 한다.

국왕이 성의 서문 밖에 대장경판당에 행차하여 모든 관료들을 거느리고 분향하였다. 현종<br/>때 판본이 임진년 몽골 병사에 의해 불타 버렸다. 국왕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다시 발원하여 <br/>도감을 설치하고 16년 만에 공역을 마쳤다.<br/>-[고려사] 권24, 고종 38년 9월 무오-


위의 기록을 통해 1236(고종 23년) 대장경 조성사업이 다시 시작되어 16년 만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판 하나의 크기는 세로 24cm, 가로 84.6cm, 두께 3.2m에 이르며 무게는 2.2-4.8kg에 이른다. 이러한 것들이 팔만장에 이르니 그 규모만도 280톤가량이다. 여기 새겨진 글자만도 조선왕조 5백 년 간 실록의 전체 글자 수와 맞먹는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만하다. 글씨를 새기는 데만 동원된 연인원도 100만 명이 훨씬 넘고, 이 밖의 인력을 계산해 보았을 때 실로 엄청난 작업으로 팔만대장경을 만드는데 국가의 사활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이러한 팔만대장경이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나무 재료의 우수성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팔만대장경은 산벚나무가 65%, 돌배나무가 15%, 이외 박달나무, 거제수나무, 단풍, 후박나무 등이 조금씩 섞여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원래는 산벚나무가 아닌 자작나무로 오인하여 잘못 알려졌었으나 성분검사를 통해 자작이 아닌 산벚나무였음이 밝혀졌다.



산벚나무의 목재가 견고함은 이미 앞서 설명한 바 있으나, 팔만대장경 보존의 우수성은 목재 자체보다도 그 기술성에 있었다. 대장경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재료인 벚나무를 우선 3년간 바닷물에 담가둔다. 그다음 널빤지로 만들어 소금물에 찐 후 그늘에 말려 대패질을 하는데 이는 경판이 오래되어 뒤틀리거나 갈라지는 것을 미리 방지하는 과정이다. 이후, 경판이 다 새겨지면 봄이 슬지 않고 판이 뒤틀리지 않도록 옻칠을 하고 네 귀퉁이를 구리판으로 장식하였는데 이러한 기술들이 바로 대장경판이 오래도록 지속하게 한 기술의 우수성이라 하겠다.



팔만대장경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일제강점기 벚꽃 문화의 이식


그렇다면 이렇듯 세계문화유산의 주재료가 될 정도로 주변에 친숙하게 심어졌던 벚나무가 우리에게 왜 미움을 받는 ’일본의 나무’로 자리매김한 것일까.


여기는 옛날에 창경궁이었던 곳으로 이왕가의 정원의 하나이다. 여름에 수목이 울창하며 특히 벚나무가<br/>많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 삼복의 더위를 잊게 하는 곳이다. 목요일을 제외하고 원내의 일부를 개방한다.<br/>봄에 꽃이 필 때에는 하루에도 입장객이 2만여 명이 넘을 정도로 성황을 이룬다. 특히 창경원의 밤 <br/>벚꽃놀이는 경성시민 연중행락에서 수위를 차지하며, 또 여름의 납량, 가을의 달맞이, 겨울의 설경 등도 <br/>가히 아름답다. 홍화문, 명정문, 명정전, 오른쪽에 식물원, 왼쪽에 동물원, 정면에 박물관, 이 셋까지<br/>총칭하여 창경원이라 부른다. 식물원의 온실도 규모와 내용 모두 동양 제일로 여겨지며, 거기서 깊이 <br/>들어가면 산자수명한 비원이 있으며, 또 비원의 왼쪽에는 이왕 전하가 살고 계시는 창덕궁이 있다.<br/>-[대경성] 중 발췌-


위는 1929년 조선매일신문사 출판부에서 발행한 안내 책자에 실린 소갯글이다. 1911년 4월 26일에는 그 박물관과 동물원 식물원을 통칭하여 창경원(昌慶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궁(宮)’이란 왕과 왕실이 사는 곳을 가리키지만 ’원(苑)’이란 사냥이나 야유 등 놀이를 하는 곳이란 뜻으로 그 격을 낮추고자 한 일본의 의도가 숨겨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소개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은 이곳에 벚나무 수천 그루를 심고 1924년부터는 밤에도 개장해 벚꽃놀이를 즐기도록 했다. 이때의 벚나무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어 통치를 쉽게 하는 도구로 사용된 셈이다. 본래 역사적으로 벚꽃 문화가 없었던 우리나라는 이렇듯 일제강점기에 의해 이식된 문화로, 지금의 벚꽃에 대한 반감은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해 볼 수 있겠다.


벚꽃 사진


다행히, 1980년대 초까지 이어지던 창경원 밤 꽃놀이는 청산되었고 이곳의 벚나무들은 국회의사당이 있는 여의도 윤중로로 옮겨져 새로운 벚꽃 놀이의 명소가 되었다. 이제 곧 흩날리는 벚꽃 비를 맞고자 많은 이들이 여의도로 모여들 터이다. 벚나무 자체를 감상하는 것을 질타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벚나무는 당당히 한국을 자생지로 하며 뿌리를 이곳에 두고 있으며 우리의 자랑스러운 세계문화유산을 만들어낸 나무이다. 그러나 지금의 벚꽃놀이가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의 정신을 자신들의 것으로 젖게 하려던 도구로 사용된 그 근간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진해 군항제는 매년 이맘때쯤 벚꽃이 꽃망울을 터뜨림과 동시에 시작되는 잔치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항일정신을 이어받고자 벚꽃이 흩날리는 길에서 충무공의 승전 행진을 재현하며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계승하자는 것은 붙지 않는 같은 극끼리의 자석을 붙여놓은 꼴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전통 속에서 벚나무는 ’감상’이 아닌 ’실용’에 바탕을 둔 고마운 나무였다. 이를 알고 찾는 벚꽃놀이라면 이번에는 떨어지는 벚꽃 한 잎 한 잎이 다른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까.


오소미 기자 wassup1984@k-heritage.tv
2012. 4. 6

작성자
한국문화재재단
작성일
2012-04-06
조회
23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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