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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세계문화유산 여행] 조선왕조실록 스크랩

도깨비와 함께하는 문화유산여행
조선왕조실록 1부_

조선왕조의 시조인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에 걸친 472년간의 역사가 담긴 조선왕조실록은 국정사항뿐 아니라 민중의 생활상까지 기록돼 있어 가히 조선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실록은 여럿 있지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된 실록은 조선왕조실록이 유일합니다. 조선의 역사의식으로 완성된 지적 재산의 보고, 실록을 펼쳐봅니다.

조선왕조실록 책

일찍이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를 천명하며, 500년 동안 화려한 왕조의 뜻을 펼쳐온 조선왕조,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만큼 단일왕조로 최장기간 국가를 유지해왔습니다. 조선의 정신적 배경과 확고한 국가 저력의 비밀을 품고 있는 규장각으로 들어가 볼까요.

규장각 책 보관모습

규장각은 조선시대 기록물들의 보물창고이지요. 조선왕조실록은 지하서고에 소장돼 있는데요. 조선 초기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왕들의 역사를 기록한 472년간의 기록물입니다. 이외에도 공정성과 객관성에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습니다. 왕의 곁에 사관을 두고 국사를 빠짐없이 기록했으며, 사관은 철저하게 공정성과 소신에 따라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실록 1권 두께

또한, 그 기록은 당대 왕이라 할지라도 열람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실록의 진실성과 객관성을 확보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모두 1,893권인데요. 전체 실록의 높이는 32미터, 이는 현대식 고층 아파트 13층에 달한다고 합니다. 472년간 매일매일 작성한 실록이다 보니 전체 실록에 쓰인 글자 수만 해도 천자문 6만 4천권 분량입니다. 한 사람이 (매일) 100쪽씩 읽어도 4년 3개월이 걸리는 방대한 양이지요.

기록 모습

이 엄청난 기록물은, 단순히 역사를 나열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실록의 첫 장부터 왕의 즉위 경로와 치적을 적는 총서가 기록됐는데 짧지만 국왕에 대한 엄정한 평가인 것입니다. 여기엔 조선왕조실록이 가장 높이 평가받는 실록의 기록정신이 있습니다. 실록제작의 기초 자료가 되는 사초를 쓰는 사관은 진실만을 기록하며, 그 기록은 왕이라 할지라도 열람할 수 없다는 원칙을 철저하게 지켜나갔습니다.

실록 펼친 모습

이런 배경 속에서 사관들은 자유롭게 역사를 기록할 수 있었고, 역사적 시비득실을 피해갈 수 있었습니다. 실록의 내용 또한 사료로서의 가치를 극대화시킵니다. 국정의 중요 사안은 물론, 코끼리 유배, 비행물체 출현 사건 등 백성들의 생활까지가 모두 담겨있습니다. 그 이야기 사례를 동영상에서 자세히 확인해보세요.

동영상 대본보기
대본보기 일찍이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를 천명하며, 500년 동안 화려한 왕조의 뜻을 펼쳐온 조선왕조,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만큼 단일왕조로 최장기간 국가를 유지해온 온 조선의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
여기 조선의 정신적 배경과 확고한 국가 저력의 비밀을 품고 있는 실록이 있다.
조선시대 기록물들의 보물창고인 규장각
지하서고에 소장돼 있는 조선왕조실록, 조선 초기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왕들의 역사를 기록한 472년간의 기록물이다. 세계적으로 실록은 여럿 있지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된 실록은 조선왕조실록이 유일하다. 세계가 그 가치를 인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동아시아 3국의 실록을 살펴보자.
중국 최초의 실록인 명실록,명나라 294년의 역사를 기록했지만(이어서)
황제가 마음대로 삭제하거나 파기하는 등, 공정한 실록으로서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일본의 경우, 실록이라는 명칭으로삼대실록이 있지만
고작 3대 왕의 재위 기간인 29년의 역사 기록물이다.
그것도 당대에 실록을 편찬하는 시스템이 없어서 후대에 정리를 했고, 그 때문에 중요한 기록들이 빠져있다.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은 어떨까?
조선왕조실록은 단일왕조 47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점 외에도 공정성과 객관성에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기록물이다. 왕의 곁에 사관을 두고 국사를 빠짐없이 기록했으며, 사관은 철저하게 공정성과 소신에 따라 역사를 기록했다.
또한, 그 기록은 당대 왕이라 할지라도 열람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실록의 진실성과 객관성을 확보했다.
조선왕조실록은 모두 1,893권,
(책 한권의 높이가 1.75센티미터,4권을 합해도 7센티미터),
그렇다면 전체 실록의 높이는 얼마나 될까? 실록 1,893책의 높이가 32미터, 이는 현대식 고층 아파트 13층에 달한다.
472년간 매일매일 작성한 실록이다보니전체 실록에 쓰여진 글자수만 해도
천자문 6만 4천권 분량,한 사람이 (매일) 100쪽씩 읽어도 4년 3개월이 걸리는 방대한 양이다.
그러나 이 엄청난 기록물은, 단순히 역사를 나열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실록의 첫 장부터 왕의 즉위 경로와 치적을 적는 총서가 기록된다. 짧지만 국왕에 대한 엄정한 평가인 것이다.
여기엔 조선왕조실록이 가장 높이 평가받는 실록의 기록정신이있다. 실록제작의 기초 자료가 되는 사초를 쓰는 사관은 진실만을 기록하며, 그 기록은 왕이라 할지라도 열람할 수 없다는 원칙을 철저하게 지켜나갔다.
이런 배경 속에서 사관들은 자유롭게 역사를 기록할 수 있었고, 역사적 시비득실을 피해갈 수 있었다.
실록의 내용 또한 사료로서의 가치를 극대화시킨다. 국정의 중요 사안은 물론, 백성들의 생활까지가 모두 담겨있다.
태종실록을 들여다보자. 흥미로운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코끼리에 대한 얘기다.
일본 국왕 원의지가 사자를 보내어 코끼리를 바쳤으니, 코끼리는 우리 나라에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코끼리가 조선시대에 존재했다는 것인데,
공조 전서인 이우가 코끼리를 비웃고 침을 뱉었는데, 코끼리가 노하여 밟아 죽였다.
(자막 읽을 시간 주고)귀한 선물로 받은 코끼리가 사람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일년에 코끼리에게 먹이는 콩이 수백석에 이른다. 그런가 하면, 엄청난 양의 곡식을 소비하는 코끼리에 대한 걱정도 나온다.
코끼리를 전라도 해도에 유배를 보낸다. -태종 13년 11월 결국 코끼리는 해도로 유배를 가게된다.
이 코끼리 유배사건은 실록이 당대 생활상을 얼마나 충실하게 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 백두산 화산폭발에 대한 기록,
마치 화로 가운데 있는 듯하여 사람들이 훈열을 견딜 수가 없었다. 재가 마치 눈처럼 흩어져 내려 한치 남짓이나 쌓였는데, 주워보니 모두 나무껍질이 타고 남은 것이었다.
-숙종 28년 5월 20일
천재지변에 대한 기록 외에도 불가사의한 일도 기록돼 있다. 조선시대 유 에프오,
비행물체 사건으로 기록된 내용이다.
갑자기 세숫대야처럼 생긴 둥글고 빛나는 것이 나타나, 처음에는 땅에 내릴 듯하더니 곧 1장정도 굽어 올라갔는데, 마치 어떤 기운이 공중에 뜨는 것 같았습니다.
500년의 시간이 흐르고 역사는 바뀌었어도 진실하고 공정한 기록은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
역사를 바로 보고, 준엄한 역사의식으로 나라를 다스리고자 했던 조선의 정신이 이 책에 담겼으니, 곧 인류의 소중한 유산 조선왕조실록이다.

500년의 시간이 흐르고 역사는 바뀌었어도 진실하고 공정한 기록은 생명력을 잃지 않습니다. 역사를 바로 보고, 준엄한 역사의식으로 나라를 다스리고자 했던 조선의 정신이 이 책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아래의 동영상에서 조선왕조실록의 위대한 기록정신을 더 느껴보세요.

동영상 대본보기
대본보기 그들은 붓 한자루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었다.권력에 흔들리지 않는 직필로 조선왕조 실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지켜낸 사람들이었다.그들은 누구인가?
조선 태종 4년, 사냥을 좋아하는 태종이 말을 타고 활시위를 당기다 그만
말에서 떨어지고 만다.
경황이 없는 가운데서도 태종이 내뱉은첫마디는 이것이었다.
그러나, 태종실록을 보자.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하였다.
-태종실록 4년
사관이 모르게 하라는 임금의 말까지기록돼 있다.
그날의 사관은 임금이 숨기고 싶었던 일마저도 주저하지 않고 기록한 것이다.
철저한 기록정신을 가지고 있던 사관의 모습은 조선의 역사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국가의례였던 대사례의 기록을 보면, 의식이 진행되는 중에도 임금의 옆에서 종이를 들고 기록하는 사관의 모습이 보인다.
사관은 그 직급이 정 7품 이하의 미관말직이었지만 그들이 맡은 직무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대부분 벼슬에 처음 나선 젊고 패기만만한 신진 엘리트들이었다.
이들의 주요임무는 임금의 공적이거나 사적인 말과 행동을 모두 기록하는 사초를 작성하는 일,
사관이 기록한 그 초안을 사초라고 한다. 사관은 이 사초를 비밀리에 관리했다가 임금이 죽고 난 후, 실록을 편찬할 때 자료로 제출했다.
조선의 역사를 직필해야 했기에, 사관은 내외간 4대조까지 흠이 없고, 인품이 공정하다고 인정받은 사람으로, 사관의 추천을 받는 자만이 가능했다.
이런 엄격한 기준으로 선발된 사관은 시간과 장소에 굴하지 않고, 왕의 곁에서 매일 조정의 일을 빠짐없이 기록하며 조선의 역사를 남겼다.
그리고, 그 기록은 왕이라 할지라도 볼 수 없도록 함으로써, 사관의 올바른 역사기록을 보장했다.
조선시대, 당대 역사란 어떤 의미가 있었기에 이토록 기록에 힘을 들였을까? 인조 때 사관을 지냈던 정태제..
그의 후손에게서 흥미로운 유물 하나를 볼 수 있었다.
당시, 사관 정태제가 기록했던 사초다. 실록의 기초 자료가 되는 사초..
사관 정태제가 왕의 곁에서 기록했을 이 사초는 인조 15년부터 이듬해에 걸친 5개월간의 것이다. 무슨 내용이 담겨있을까?
임금이 곁에서 했던 말을 받아 적었고,
왕세자에 대한 내용도 기록돼 있다.
여기에 백성의 민생고, 해결하지 못한 국정사안까지 언급하고 있다.
재미있는 건, ‘사신왈’로 시작되는 부분이다. 이것을 사론이라고 하는데, 당시 상황에 대해 사관 스스로 논평한 것이다.
그렇다면, 당대 왕이었던 인조에 대한 사관의 평가는 어땠을까?
인조 16년 5월 사관의 말
큰 혼란이 진정되지 않았고 막중한 책임이 앞에 있는데, (임금은) 어찌 경거 망동을 하시어 백성들에게 근심을 던져 주십니까. 왕에 대한 거침없는 발언..
인조 15년 10월 사관의 말 예전에는 말세의 임금 일지라도 재앙이 되는 일들을 만나면 반드시 뭇 신하에게 일러 각각 과실을 죄다 말하게 하였습니다. 임금의 덕이 부족하다며 그의 자질까지도 비난했던 사관의 사론이 실록에 고스란히 실렸다.
(여유있게)조선시대엔 이렇게 실록에 사론을 실어 사관의 기록을 중시하며 보장했다. 한 나라의 군주라 할지라도, 사관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관의 올바른 역사기록이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연산군이 즉위한 뒤<성종실록>을 편찬하며 벌어진 사건,
조선의 4대 사화 중 하나로, 엄청난 비극으로 확산된 무오사화, 그 발단은 사초에 있었다.
당시, 실록 편찬의 책임자는 훈구파에 속했던 이극돈, 그는 실록편찬을 위해 사초를 검토 하던 중,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보게된다.
(바로)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하는 김종직의 글을 사관 김일손이 사초에 실었고, 결국, 연산군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난다.
선왕을 헐뜯었으니.. 대역으로써 논단하여 부관 참시하였고, 그 도당 김일손·권오복·권경유가.. 그 글을 칭찬하되, 사초에 써서 불후의 문자로 남기려고 하였으니, 아울러 능지처사하게 하였노라.
사초로 인해 사관과 그의 스승이 당한 조선 최대의 필화사건..,
기록을 보는 순간, 정국은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남겼다.
숱한 견제와 위협, 심지어는 목숨까지 바쳐가며 사관은 역사를 기록했다.
당대의 사건을 나열한 단순한 기록을 넘어,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을 아끼지 않았던 사관.
(이어 여유있게)당대의 올바른 역사 기록을 목숨처럼 여겼던 사관의 기록정신이 있었기에 조선왕조실록은 존재할 수 있었다.
동영상 대본보기
대본보기 조선왕실의 도서관, 규장각..
이곳 지하 수장고에는 세계기록 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이 보존돼 있다.
종이에 금속활자로 인쇄된 472년간의 기록물,
숱한 화재와 전란을 겪었던 조선이 보존이 어려운 종이책을 이렇게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여유있게)여기, 역사의 격랑 속에서 실록 사수에 몸을 바쳤던 사람들이 있다.
태백산맥의 한 자락인 오대산, 이 첩첩산중에 비밀스럽게 들어앉은 건축물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 중 하나인 오대산 사고다.(이어서)조선은 조선왕조실록이 화재나 전란에 소실되지 않도록 국가적 관심을 기울였다. 실록은 모두 네부를 만들어 각각의 사고에 분산 보존하고
종이책을 보존하는만큼 사고의 건축기술에도 각별한 노력이 들어갔다.
습기를 막기 위해 지면과의 공간을 뒀고,
햇볕에 손상되지 않도록 창은나무로 된 판창을 덧대었다.
그러나 통풍을 고려해서 창은 크고 널찍하게 만들었다.
햇볕과 습기에 예민한 종이책 보존을 위한 과학적인 건축물이 사고였다.
(바로)조선왕조실록은 모두 네 부가 만들어져 서울의 춘추관과 전주, 충주, 성주사고에 보관했다.
(이어서)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실록은 위기에 처한다.
(이어서)왜군이 한양으로 진격해오면서 춘추관과 충주, 성주에 있던 실록들이 모두 불타버리고 만 것이다.
(이어서)유일하게 남은 전주 사고마저 왜군의 진격로에 위치해 있었는데,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전주사고의 실록만은 온전했다..
당시, 전주사고에는 태조부터 명종까지 13대에 걸친 804권의 실록이 보관돼 있었다.
사고 앞마당에 세워진 비석 하나,
이 비는 전주사고가 기적적으로 보존될 수 있었던 임진왜란 당시의 숨가빴던 사정을 말해준다.
이 고장의 유생이었던 손홍록과 안의-전쟁과 함께 소실될 뻔 했던 조선의 역사를 악전고투 끝에 지켜낸 아름다운 이름들이다.
(여유있게)전라북도 정읍에 있는 남천사, 손홍록, 안의 두 사람을 기리는 사당이다.
당시, 두 유생은 왜군이 근처 금산까지 침략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풍전등화의 위험에 처한 실록..
이대로 두면, 전주사고의 실록마저 불타 없어지고 말 거라는 생각에두 유생은 실록 이전을 결심한다.
아수라장 같은 전쟁 속에서 800권이 넘는 실록을 옮기는 일이 가능한 일이었을까.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잃는 것은 조선의 역사를 잃는 일이다,
두 사람은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정읍의 유생들과 더불어 전주사고 실록 전량을 옮기기 시작한다.
낮과 밤을 다퉈 그들이 도착한 곳은 내장산에서도 산세가 험한 금선계곡의 용굴,
이 용굴은 그들이 실록을 습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고심 끝에 선택한 장소였다. 밤에는 서로 번갈아가면서 보초를 서고,
왜군의 진격 소식이 속속 전해지면서다시 실록을 옮기는 고단한 일정이 계속됐다. 좀 더 깊고 험준한 비래암으로, 그렇게... 두 사람은 1년이 넘는 기간동안 실록을 옆에 두고 불침번을 섰고내장사의 스님과 승군들도 이 일에 가세해서 힘을 보탰다.
안의가 남긴 <임계기사>를 보면 두 사람이 370일간 숙직을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산속에서 1년 넘게 불침번을 서며 실록을 지켜낸 손홍록, 안의의 눈물겨운 헌신,
그리고 마침내 손홍록, 안의 두 사람이 살려낸 전주사고 실록은 춘추관에 봉안된다.
선조 36년, 실록은 다시 네 벌로 등사돼서
(이어서)정족산과 오대산 등 네 곳에 봉안되기에 이른다. 두 유생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실록의 화려한 부활이었다.
조선역사의 집대성인 실록의 가치를 알아보고 귀히 여겼던 두 유생의 역사적 혜안과 목숨을 건 보호작전,
조선 역대 왕들의 초상화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도 이들 덕분이었다.
역사는 그 가치를 알고 보존하는 이들의 자산이다. 손홍록, 안의로 대표되는 조선왕조실록의 수호자,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는 조선왕조실록이라는 빛나는 이름을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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