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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세계문화유산 여행] 승정원 일기 스크랩

도깨비와 함께하는 문화유산여행
승정원 일기

288년간의 작성기간, 글자 수 총 2억4천2백50만.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방대한 기록, 승정원일기입니다. 조선왕조의 모든 국정을 빠짐없이 기록했던 승정원일기는 과연 누가, 어떻게 작성하였던 것일까요? 그 기록의 역사 속으로 초대합니다.

글 쓰는 모습

승정원일기는 국보 제 303호이자 2001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조선초기부터 장장 500여 년 동안 글을 써 내려갔지만, 임진왜란 때 경복궁에 불이 나 광해군까지의 기록은 모두 소실 됐고, 현재 인조부터 순종 4년까지 288년간의 기록만 남아있습니다.


승정원일기는 국왕이 신하들과 국정을 논의하는 과정, 그리고 상소와 같은 문건을 합쳐 그 날의 일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작성된 일기는 월별 책으로 묶어 표지에 연월일을 적고 승정원에 보관토록 했지요.

동영상 대본보기
대본보기 덕수궁의 역사는 41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덕수궁이 조선의 역사 전면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임진왜란을 통해서다. 1592년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에 밀려 한양을 내주었던 조선의 14대 임금 선조. 한양에 다시 돌아왔을 때 궁궐이 소실돼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었다. 결국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개인저택을 임시 궁궐로 사용하게 됐고,이후 ′옛 임금님이 거처했던 집′이란 뜻으로 석어당이란 당호를 붙였다.
궁궐 건축물로는 드물게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살림집 같은 모습을 지닌 석어당. 이는 임진왜란이라는 조선의 어려운 상황을 잊지 않기 위해 선조가 단청을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선조 때부터 서둘렀던 창덕궁 중건이 1609년 광해군 즉위 후 완공되었다.
이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정릉동 행궁은 정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하지만 같은 해 정릉동 행궁은 비로소 자신을 이름을 갖게 된다.
‘나라 운을 기린다’라는 뜻으로 경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임시 행궁처였던 월산대군의 집을 경운궁이라 명명한 것이다. 그리고 광해군은 창덕궁을 정궁으로,경운궁을 이궁으로 삼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는 즉위식을 경운궁 (즉조당 추정)에서 거행했는데, 왕의 즉위가 이루어졌다는 위미를 담고 있는‘즉조당’이란 명칭은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인조는 경운궁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다.
조선 중기 파란만장한 역사의 현장이었던 경운궁. 이후 270여년 동안 궁궐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경운궁은 고종 때부터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다.이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했고,을미사변이후 미뤄왔던 명성황후의 국장이 치러졌다.
경복궁에 모셨던 명성황후의 혼전도 경운궁내에 있는 경효전으로 옮겨왔다.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격동의 역사에 경운궁이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이다.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의 선포를 알린다. 환구단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단으로 고종이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단을 만들어 조성한 단지다.
환구단은 대한제국의 상징이었다. 환구단의 건설은 중국과 대등한 자주국임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것이었다.하지만 러일전쟁ㅁ에서 승리한 일본은 점점 조선을 압박하게 되고 결국 1907년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했다는 이유로 고종을 강제로 폐위시킨다.
한일강제병합 후 고종은 덕수궁 함녕전에 유폐되었다.그러면서 궁궐의 이름을 ‘경운’에서 ‘덕을 누리며 오래 살라’는 뜻의 ‘덕수’로바꾸었으니, 왕조의 운명과 함께경운궁의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이다.
1919년 1월12일 고종황제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한다.고종의 죽음이 일제의 독살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반일 감정은 극에 달했고,결국 그해 3.1운동으로 이어졌다. 고종의 죽음은 한 역사의 종말이자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 되었다.
조선과 대한제국의 운명을 묵묵히 지켜본 궁궐..덕수궁은 국난을 극복하고 나라의 기틀을 새롭게 다지는 역사적인 현장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남아있는 승정원일기는 모두 3245책, 문자 수만 해도 2억 4천 2백 50만자! 단일 기록으로는 세계 최대의 역사 기록물로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옛 승정원 건물터

동궐도(국보 제 249호)에 그려진 창덕궁을 보면 인정전 동쪽 대청과 문서고 사이에 승정원이란 관청이 있습니다. 오늘날 청와대 비서실 격이지요. 승정원일기는 바로 이 승정원의 업무일지였습니다.

사관과 주서 좌석

대부분의 관청들이 광화문 앞에 있던 것에 반해 승정원이 궁궐 안에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왕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필하며 일거수일투족을 세세히 기록해야 했기 때문이었지요. 승정원일기는 승정원 소속정7품 주서들이 작성했습니다. 오늘날 6급 공무원인 ‘주무관’에 해당하는 직책입니다.

승정원일기 초책

주서는 임금을 기준으로 동쪽 제일 앞에 앉아 모든 정사를 기록했습니다. 오늘날 녹음된 회의록만큼이나 자세합니다. 내용을 보면 글씨를 썼다 지웠다 한 흔적도 보입니다. 초책은 자신이 알아볼 수 있는 필체로 빠르게 적었다가 나중에 다시 정리하는 것인데요. 미처 다 받아 적기 어려울 경우에는 대강만 메모했다가 기억을 되살려 추가했습니다. 정식으로 기록할 때는 모두 편년체로 필체를 통일시켰습니다.

기록 예

이렇게 기록된 승정원일기는 실록과는 달리 임금이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꺼내볼 수 있는 국정의 참고서 역할을 했습니다. 3245책 2억4천2백50만자 승정원일기에는 288년간의 역사가 마치 오늘처럼 살아있습니

아래의 동영상에서 승정원일기에 적힌 왕들의 일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동영상 대본보기
대본보기 # 청계천 z'i 할 때 12 -서울 도심을 관통하는 녹지하천, 청계천!
2005년 복원된 후 청계천은
모두가 사랑하는
휴식처로 탈바꿈했다.

# 옛날 사진 14 -개발과 도시화의 물결에 휩쓸려
흉물스럽게 죽어가던 하천에
다시 숨을 불어 넣게 된 이유,

그것은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된 순간부터였다.

# 옛날 그림 9 -그런데 청계천 복원사업은 비단
오늘의 일만이 아니였다.
200여년 전 영조임금도
청계천 복원을 완성시켰다.

# 승정원일기 책 7 -그렇다면 영조는 왜 청계천을
예의주시했던 것일까!
승정원일기는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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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영조의 청계천 사랑, 승정원일기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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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계천 T'D 하면 8 -2년 3개월, 청계천 복원사업 기간 동안 잠자고 있던 문화유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 호안석축 12
자막> 호안석축(護岸石築) 둑을 수해 등으로부터 보호하는 시설 -특히 문화재 발굴 과정에서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호안석축의 대량 발굴이다. 현재 청계천에는 호안석축 일부를 제자리에 복원해 놓은 상태다.

# 발견당시 사진 10 -청계천에서 발굴된 호안석축은 542m에 이른다. 이것은 1773년 영조 때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 승정원일기 5 자막> 승정원일기 (국보 제303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승정원일기 중 영조 때 기록들을 살펴보면 # 본문내용 5 -‘개천’이란 단어가 눈에 띈다. 자막> 開川 개천

# 도성지도 14 -경복궁, 창덕궁을 중심으로 도성 한가운데를 흐르는 강, 승정원일기에서 표현하고 있는 개천은 지금의 청계천이다. 즉, 영조시대에도 청계천 공사가 있었음을 알수 있는데,

# 강물 T'S 10 -영조 임금에게 청계천은 언제나 근심거리였다.

# 흑백사진 8 자막> 1900년대 청계천 -1900년대 청계천의 모습이다. 장마 때면 어김없이 범람하다가도 가뭄 때면 바닥을 드러내곤 했다.

# 강물범람T'S 15 -그런데 영조 때는 이보다 더 심했을 것이다. 한양 안의 벌채가 심해지면서 범람이 잦아졌고 하천 주변에서 움막을 치고 살던 백성들이 버린 오물로 오염에 시달렸다.

# 책표지 -이러한 까닭에 영조는 청계천 복원에 강한 의지를 표명했고, 승정원일기는 영조의 그러한 마음을 마치 오늘의 일처럼 생생히 전하고 있다.

영조: 저번에 광충교를 보니 금년 들어 더욱 흙이 메워져 있다. 가히 걱정이 된다. 홍봉한: 하천 도랑의 준설이 매우 시급합니다. 만약 홍수를 만나면 하천 주변의 집들은 반드시 떠내려가는 화를 입을 것입니다. -중략- 영조: 경들이 도랑을 준천하는 일을 담당하면 좋겠다. 준천 [濬川] 물이 잘 흐르도록 개천 바닥을 깊이 파서 쳐냄 1758년(영조 34) 5월 2일 승정원일기 中

# 준천도 f's 준천시사열무도(濬川試射閱武圖) 청계천 공사 현장을 둘러 보는 영조의 행차 그림 -당시 청계천 공사 장면을 담은 준천시사열무도. 영조의 지시로 공사 현장을 그림으로 남겼던 것이다.

# 소그림 25 -소들이 쟁기질을 하는 가운데 세 사람씩 가래로 개천바닥의 모래, 흙을 퍼내고 있다.

공사에 동원된 백성은 약 21만 5천여명. 시전상인, 지방의 자원군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다.

# 임금자리 10 -그림을 자세히 보면 수문 위에서 공사를 내려다보는 영조의 자리가 보인다. 청계천 공사에 대한 영조의 열정은 대단했다.

나의 마음은 오로지 준천(濬川)에 있다. 영조 36년 2월 23일 승정원일기 中

# 오간수문 -임금은 또 가장 힘든 공사인 오간수문 공사를 6일 만에 끝내자 백성들의 힘이라 치하했다.

영조: 오간수문의 공사를 6일 내 한 일이 대단하다. 홍봉한: 이것은 진실로 많은 백성의 힘이 하늘을 이긴 것입니다. 영조: 정말 그러하다.

# 오간수문 PAN 할 때 18 -청계천 공사는 백성들의 자발적인 협조로 이루어졌다. 국왕이 직접 현장에 나와 앞장서 독려함으로서 백성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 그림 F'S 12 -실업 상태의 백성 6만3천여명과 일부 백성에게는 품삯도 지급됐다. 공사 기간 동안 소요된 비용은 3만 5천 냥, 쌀 2천 3백여 석! 지금으로 치면 약 8억원가량이다.

# 청계천 22 -실제로 영조의 청계천 공사에는 빈민 구제를 위한 구휼의 목적도 있었다. 두 차례의 전란 후, 생계를 위해 도성으로 몰려든 유민들에 대한 구휼이었다. 즉 청계천 공사는 오늘날 공공근로사업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 영조 8 -1760년 2월 18일에 시작한 공사는 57일 만에 종료됐다. 백성들에 의해! 백성들을 위한! 청계천이 다시 태어난 순간!
# 준천사실 표지 12
자막>준천사실 [ 濬川事實 ]
청계천 준천 사업내용을 기록한 책.

준천시사열무도(濬川試射閱武圖) / 준천사실에 수록 -영조는 공사의 전말을 기록한 책을 편찬토록 했다. 후대에까지 물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그 지혜를 전하고자 함이었다.

# 승정원일기 책 5 -그리고 승정원일기가
오늘날까지 영조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영조: 나는 모래흙의 처리가 힘들 것으로 생각했는데
금번의 일은 매우 잘 된 것 같다.
홍계희: 글로 써서 공사의 사실을 기록해야 하는데 제목 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영조: 『준천사실』로 이름을 정하라.
영조: 금번 준천 후에 다시 막히는 일이 없겠는가?
홍봉한: 백년 내에는 반드시 막히지 않을 것입니다.
영조 36년 3월 16일 승정원 일기 中

# 에필로그 15 -죽어가던 하천에
생명을 불어 넣은 영조!
그 지극한 마음은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일까..
오늘도 청계천은 시민들 곁에서
맑고 고요히 흐르고 있다.
동영상 대본보기
대본보기 왕세자탄강진하도10첩병(王世子誕降陳賀圖十疊屛)-고종의 둘째아들, 왕세자가 될 원자의 탄생을 기념해 산실청 관원들이 만든 병풍이다.장대한 궁중잔치 분위기가 읽혀지듯, 왕세자의 탄생은만백성의 축복이었다.
-그리고 왕이 될 아이가 태어나면종 1품 벼슬을 받을 이가 선정됐으니,,그 주인공이 바로 왕의 유모,봉보부인이다.
-조선시대 양반가에서는유모를 통해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특히 왕실에서는 유모의 젖을 먹고 자라면서 아이의 품성이 저절로 유모를 닮아가게 된다.. 믿었다.
-왕실의 유모는 아기를 낳은지 얼마 되지 않는 산모 중에 후덕하고 건실한 성품을 가진 여인으로 선발했다.특히 왕세자의 유모는왕세자가 왕 위에 오르면‘봉보부인’이라 하여 종 1품 벼슬을 받았는데,오늘날 부총리급의 높은 벼슬이다. -양반가 여성들이 남편의 품계에 따라 외명부 품계를 받긴 했지만남편이 아닌 자신의 공로로 품계를 받는 여성은 왕세자의 유모, 즉 봉보부인이거의 유일했다고 할 수 있다.
-승정원일기에도 봉보부인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고종의 유모가 사망하자 그 장례를 논하는 고종과 신화들의 대화다.
“봉보부인의 장례에 행해야 할 여러 일들은 한결같이 전례(典禮)에 의거하되,
후하게 거행하도록 호조와 예조에 분부하라.”고종 28년 12월 28일 승정원일기 中
-봉보부인의 장례를국가에서 예를 갖추어 치루도록명하고 있다.
영조조 기미년(영조 15) 봉보부인의 장례에는 2등의 예장(禮葬)을 사용하였고,
정묘조 을사년(정조 9)에는 기미년의 예에 따라 거행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이대로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고종 28년 12월 29일 -승정원일기
-봉보부인에 대한 왕의 예우는 극진했다.역대 어느 왕도 자신의 유모를 홀대한 적이 없을 정도로 유모는 귀한 존재였다. -왕세자의 보양과 인성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유모, 봉보부인!하지만 유모의 역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병에 걸린 왕세자를치료하는 것도 유모의 몫이었다.-그런데 의원도 아닌 유모가어떻게 왕세자의 병을 치료할 수 있었던 것일까?
승정원일기에 그 답이 있다.
영조 세자에게 약을 먹이는 것이 매우 어렵다권성징 사탕을 많이 섞으면 약의 맛이 매우 쓰지는 않을 것이며 작설의 맛 또한 매우 담백합니다.현기붕 작설을 심하게 달이면 맛이 더욱 좋지 않으며 젖을 통해 드시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영조 13년 7월 30일 승정원일기 中
-유모를 통해 약을 먹이느냐, 왕세자에게 직접 먹이느냐를 두고 나누는 대화다.
-대게 아이는 비장과 위가 약해 독한 약을 직접 투약할 경우 장기가 손상될 우려가 있다.하여 아이에게 먹일 약을 유모가 대신 먹고젖을 물려 간접적으로 약이 아이에게 전달되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왕세자의 병이 악화되면제일 먼저 유모를 살폈다.-영조 28년,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는하루에도 11번이나 대변을 볼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았다.영조와 약방 관원들은 적절한 처방을 내리기 위해 논의를 했는데,당시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유모의 음주습관이 세손의 병의 원인일 것이라고추측하고 있다.
영조 : 유모가 술을 자주 마신다.
심하게는 밤에도 술을 마셔 아이의 옷에서 술 냄새가 난다
김약노 : 유모가 술을 마시는 것은 매우 금기해야 할 일입니다.
영조 : 이번 세손의 병은 아마도 술에 상한 듯 하다.
김한철 : 지극히 공경한 지위에 있으면서 유모가 어찌 감히 술을 마실 수 있습니까?
신이 만약 언관이라면 죄를 청할 것입니다.
영조 : 유모가 자신의 공을 지나치게 과신했다.영조 28년 2월 2일 승정원일기 中
-그런데 이상한 점은 영조는 유모의 음주습관을 참고하여 약을 처방하도록 지시했다.유모가 술을 즐긴다면 유모를 바꾸면 그만일 터! 왜 영조는 유모의 죄를 감싸고 있었던 것일까? -당시 양반가에서는 한번 선택된 유모를 바꾸는 것이 아이의 건강과 인성발달에 좋지 않다..라는 믿음이 강했다. 특히 왕실에서는 유모를 바꾸는 것이 왕세자의 운명을 인위적으로 바꾸는 것처럼 느꼈던 것이다. -정조의 첫아들로 3살 되던 해에 세자로 책봉된 문효세자. 하지만 5살, 너무도 짧은 생을 살다갔다.당시 세자의 병명은 홍역이었다.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조선시대,
홍역으로 목숨을 잃는 것은 너무나 흔한 일이었다.문효세자가 사망하자 언관들과 유생들은 해당 의생과 유모의 처벌을 주장하고 나섰다.
젖은 소아의 목숨입니다. 어찌 5,6세를 채우지 않고 유모가 크고 작은 병을 겪지도 않았는데
경솔하게 먼저 젖을 끊는 것이 어찌 보양하는 도리겠습니까정조 10년 6월 1일 승정원일기 中
-세자가 아직 5살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젖을 끊어 세자에 대한 보양의 도리를 잃어버리게 했다는 것,그것으로 세자의 죽음의 책임을 유모에게 묻고 있었던 것이다.-하지만 당시 문효세자의 유모는 병이 들이 잠시 젖을 끊었던 것이어서 그 죄를 물을 수 없었고,
-조선왕조 대대로 유모를 극진히 대접하던 왕들은 유모의 허물 앞에서는그 어느 누구보다 관대했다.
-이처럼 승정원일기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조선시대 새로운 여인상을 기록하고 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모든 것을288년 동안의 기록, 승정원일기!그 철저한 기록정신이 있었기에우리는 오늘 흥미진진한 역사의 한 가운데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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