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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세계문화유산 여행] 난중일기 스크랩

도깨비와 함께하는 문화유산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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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세계기록유산 여행! 이번엔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영웅의 일기를 들여다보려합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투의 현장 한 가운데서 쓰인 난중일기입니다. 난중일기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임진왜란 7년 동안 충무공 이순신이 집필한 일기로 국보 제76호,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돼 있습니다. 난중일기의 기록을 따라 전란의 과정과 이순신의 불굴의 의지를 찾아가 볼까요?

난중일기 펼침

7년간의 임진왜란으로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위기에 처했던 조선. 하지만 전란을 대비하며 군사력을 키운 이순신이 있어 승리로 끝날 수 있었습니다. 무인 관료로서 전쟁와중에 일기를 썼다는 것은 개인의 느낌이나 이런 부분들도 있지만 임진왜란 전반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자료입니다. 더욱이 이순신 제독의 눈으로 본 임진왜란을 이해하는데도 귀중한 가치가 담겨있습니다.

이순신 필체

하지만 이순신은 난중일기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없습니다. 난중일기는 임진일기, 계사일기, 갑오일기, 병신일기, 정유일기, 속 정유일기, 무술일기 등 친필본 일곱 책을 한 데 묶은 것입니다. 난중일기라는 책 제목으로 지어진 것은 이순신을 충애한 정조에 의한 것입니다. 더 자세한 난중일기의 탄생기 아래 동영상에서 확인해보세요.

동영상 대본보기
대본보기 난중일기의 흔적을 찾아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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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 ---------------------------------------------------
바다 전경 (흘리다가) 18 거북선 보이는 몰려오는 적군에 맞서
조선의 바다를 수호하고,
전란을 철저히 대비하여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영웅, 이순신.

7 이순신 동상 난중일기의 기록을 따라
이순신의 흔적을 찾아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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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브 타이틀 : 난중일기의 흔적을 찾아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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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외경 (흘리고) 7 천장서 T.D 2013년 여름,
현충사 충무공이순신기념관에서 특별한 전시회가 열렸다.

7 난중일기 보이고 난중일기가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된 것을 기념하는 난중일기특별전이었다.

+“전장에서 무려 7년 동안 일기를 쓴 충무공 이순신의..”

8 전시관 내부 팬 보존처리를 앞두고 난중일기가 일반에 공개되는 마지막 전시회이기도 했다.

10 난중일기 난중일기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임진왜란 7년 동안 충무공 이순신이 집필한 일기로. + 난중일기 (국보 제76호/ 세계기록유산)

9 임진일기 보이면 임진일기, 계사일기, 갑오일기, 병신일기, 정유일기, 속 정유일기, 무술일기 등 친필본 일곱 책을 한 데 묶은 것이다.

임원빈 소장 / 순천향 대학교 이순신 연구소
“무인 관료로서, 그것도 전쟁와중에 일기를 썼다는 것은 개인의 느낌이나 이런 부분들도 있지만 임진왜란 전반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자료입니다 이 난중일기가 그래서 개인의 자료지만 그 당시 이순신제독의 눈으로 본 임진왜란, 이것을 이해하는데도 ‘굉장히 귀중한 가치가 있는 자료다’ 이렇게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10 각 책들 하지만 이순신은 생전에 난중일기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없다. 어떻게 된 일일까?

20 묘 봉분 보이면 이순신의 고향인 충남 아산 어라산 언덕에 + 아산 이충무공묘 이충무공묘가 있다. (사적 제112호) 이순신은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전사한지 84일 후에야 임시장례를 치렀고, 16년 후인 1614년에 이곳에 이장되었다.

10 봉분에서 팬해서 전각 이순신의 묘 앞에 비각이 눈에 띈다. 내부에는 정조가 이순신을 영의정에 추중하며 세운 어제비가 있다.

12 비석으로 Z.I 정조는 이순신을 위해 친히 시를 짓고 비를 세워 전공을 기렸다.

우리 열조의 중흥의 공로에 기틀을 만든 것은 오직 충무공 한 사람의 힘에 힘입은 것이다

25 난중일기 이순신이 세상을 떠난 지 200여 년이 지난 1794년.
정조는 이순신이 남긴 일곱 권의 일기와 시, 장계 등을 모아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한 다. 이때 편찬과정에서 편의상 붙여진 이름이 <난중일기>인 것이다.

15 여수 바다 (잠깐 흘리다가)
난중일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임진년, 1592년의 일기에서 시작된다. 1591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된 이순신은 10 바닷가 트래킹 전라좌수영이 위치한 여수에 머물고 있었고, + 전라남도 여수시 이곳에서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12 팬해서 거북선 등장 (잠깐 보다가)
이곳에서 이순신의 활약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거북선이 탄생한다.

조미숙 / 여수문화관광 해설사
“이 거북선은 전라좌수영 거북선을 재연한 것입니다 태종 때 거북선이 있었다고 하지만 철갑판을 두르고 각종 포로 무장한 것은 이순신 장군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7 거북선 풀 샷 난중일기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2년 3월에 거북선이 완성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맑고 바람도 없다
아침밥을 먹은 뒤 배를 타고 소포에 갔다...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도 시험했다 - 1592.3.27

10 거북선 머리 4월에는 화포 사격 연습을 마쳐
실전에 배치될 준비가 끝났음을 알 수 있다.

맑음. 식후에 배를 타고 거북선에서 지자포, 현자포를 쏘았다
- 1592.4.12

+임원빈 소장 / 순천향 대학교 이순신 연구소
“거북선에 돛을 달고 천자총통, 지자총통 함포를 싣고 나가서 사격훈련을 마친 날이 임진왜란 발발 하루전날이거든요 그러니까 우연히 조선수군이 싸워서 이긴 것이 아니라 이순신의 일기만 보더라도 전쟁 준비가 굉장히 나름대로 철저하게 있었구나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거죠”

15 거북선 내부로 들어가고 일본군의 신무기 조총 앞에 조선군의 활과 화살은 한없이 무력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거북선에 각종 총통을 부착해 파괴력을 강화했다.

조미숙 / 여수문화관광 해설사
“거북선은 안에서는 밖을 볼 수가 있지만 밖에서는 안을 볼 수가 없을뿐더러 수백 척의 적진 속으로 뚫고 들어가서 좌충우돌하며 대포를 쏘게 되어 있습니다”

8 내부 팬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이 첫 출전한 사천해전에서의 활약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화살을 비 퍼붓듯이 쏘고, 각종 퐁통을 바람과 우레같이 어지러이 쏘아 대니, 적들은 무서워서 물러났다. 화살에 맞은 자가 몇 백 명인지 알 수 없고, 왜적의 머리도 많이 배었다 - 1592년 5월 29일

바다 (흘리고)
7 진남관 멀리 보이는 여수시 군장동에 위치한 진남관은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 본영이 있던 곳이다.

12 진남관 입구 들어가고 (잠깐 흘리다가)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임진년에 이곳에 머물며 전라좌수영의 수군을 통제하고 있었다.

10 하늘에서 T.D (잠깐 흘리다가)
+ 여수 진남관(국보 제304호) 진남관은 국내 최대의 단층 목조건물로 당시 전라좌수영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다.

15 진남관 내부 달리 이순신은 이곳에서
예하부대 순시점검, 군사시설 보수,
군사훈련 등으로 전란에 대비했는데,
매일 훈련을 거르지 않았음이
난중일기에 잘 드러나고 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후 활 10순을 쏘았는데
다섯 순은 잇따라 맞고, 2순은 네 번 맞고, 3순은 세 번 맞았다 - 1592. 3.28
11 진남관 정면 진남관에는 이순신의 또 다른 흔적이 남아있으니 화대 T.U 앞마당의 석주화대가 그것이다.

조미숙 / 여수문화관광 해설사
“이 석주화대는 이순신 장군께서 임진왜란 때 수군들을 밤에 훈련시킬 때 불을 밝히는 용도로 사용했는데요
이 유물을 통해서 우리는 이순신 장군께서 임진왜란을 대비해서 철저하게 준비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맑으나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정오에 활을 쏘았다.
우후가 방담에서 돌아와서 방담첨사가 방비에 진력하더라며 극찬을 했다. 동헌 뜰에 돌기둥 화대를 세웠다 - 1592.2.8
13. 화대 화대에 횃불을 밝혀 병사들이
야간에도 훈련을 계속하도록 한 것이다.
그가 얼마나 군사훈련을 중요시 했고
전란준비에 만반을 기했는지 알 수 있다.

10 하늘에서 T.D (흘리다가)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부산 앞바다로 몰려든 일본군은

6 돌담길 따라가고 조총을 앞세워 북상을 거듭하고
불과 20일 만에 한양을 함락한다.

7 좌수영 다리 표지석 이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휘하 장병을 이끌고 바다로 향한다.

8 고소대 들어가고 여수 고소동의 고소대는
이순신이 처음 출격명령을 내린 곳이다.

10 입구 달리 1592년 5월 7일.
+ 고소대 이순신은 전라좌수영 성벽의
(전남 여수시) 포루인 이곳 고소대에서 전투를 준비한다.

10 전각에서 T.D하면 비석 출격명령을 내리며
다음과 같이 명한다.
명령 없이 함부로 가볍게 움직이지 말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신중히 행동하라 - 이충무공전서 9권

18 비석 T.U 이 날 옥포해전에서 일본 함대를 대파하며
+ 여수 통제이공수군대첩비 임진왜란에서의 첫 승리를 거둔다.
(보물 제571호) 이후 연전연승이 계속되자 수세에 몰린
일본군은 해상전투에 대한 의지를 상실한다.
남해의 통제권이 조선군에게 넘어온 것이다.

15 타루비 보이고 (잠깐 보다가)
+ 여수 타루비 이곳에는 부하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보물 제1288호) 세운 타루비가 남아
그날의 전공을 기리고 있다.

12 노을 지는 바닷가 풍경 난중일기의 현장에서 발견한 이순신은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전란을 철저히 대비한 명장이었다.
그렇기에 이순신은 조선의 바다를
지켜낼 수 있었다.

이순신이 세상을 떠난 지 200여 년이 지난 1794년. 정조는 이순신이 남긴 일곱 권의 일기와 시, 장계 등을 모아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합니다. 이때 편찬과정에서 편의상 붙여진 이름이<난중일기>입니다.
 

난중일기 1_7권 배열 모습

난중일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임진년, 1592년의 일기에서 시작됩니다. 1591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된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이 위치한 여수에 머물고 있었고, 전라남도 여수시 이곳에서 일기를 쓰기 시작합니다. 이곳에서 이순신의 활약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거북선이 탄생합니다.

1592년 3월 27일 일기

난중일기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2년 3월에 거북선이 완성되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잠깐 그의 일기를 들여다볼까요?
【맑고 바람도 없다./ 아침밥을 먹은 뒤 배를 타고 소포에 갔다./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도 시험했다. - 1592.3.27】
【맑음. 식후에 배를 타고 거북선에서 지자포, 현자포를 쏘았다. - 1592.4.12】

여수시 거북선

거북선에 돛을 달고 천자총통, 지자총통 함포를 싣고 나가서 사격훈련을 마친 날이 임진왜란 발발 하루전날입니다. 이 일기만 보더라도 이순신이 전쟁 준비를 얼마나 철저하게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거죠. 난중일기의 현장에서 발견한 이순신은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전란을 철저히 대비한 명장이었습니다. 조선의 바다, 조선의 국혼, 조선의 자존심까지 지켜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난중일기 속 진정한 영웅 이순신의 모습은 아래 동영상에서 더 깊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동영상 대본보기
대본보기 --------------------------------------------------- 비디오
오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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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전경 (흘리고)
12 거친 물살 남도의 바다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
이곳에서 이순신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승리를 거뒀다.

10 기념석상 팬 난중일기의 기록을 따라
그 승리의 현장을 찾아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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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브 타이틀 / 난중일기의 흔적을 찾아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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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현충사 전경 (흘리고)

16 현충사 건물 외경 충남 아산의 이충무공 유허,
우리에게 현충사로 알려진 이곳은 이순신의 업적을 기리는 사당이자 그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 아산 이충무공 유허 (현충사) (사적 제155호)

8 이순신 영정 임진왜란 중 많은 전공을 쌓았으나
선조의 오해를 산 이순신은 옥살이를 하고 모든 관직을 박탈당한다.

9 T.D해서 본가 1597년 봄, 백의종군을 위해
한양을 떠나 전라도로 향하던 이순신은 이곳 아산의 본가에 도착한다.

김대현 주무관 / 문화재청 현충사 관리소
“이 집은 충무공이 살던 옛집입니다 충무공이 21살에 장가 들어서 이 집과 재산을 물려받습니다 난중일기에는 정유년, 그러니까 1597년 4월 5일자에 이 집이 나옵니다”

본가에 이르러 장인 장모님 신위에 절했다 - 1597.4.5

16 처마에서 T.D 당시 이 집에는 이순신의 아내와 자식들이 살고 있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여수에 머물고 있었다. 아들의 석방 소식을 듣고 아산으로 오던 어머니는 도중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김대현 주무관 / 문화재청 현충사 관리소
“백의종군 중에 고문으로 아픈 몸을 이끌고 오게 된 곳이고 이곳에서 며칠 쉬는 중에 어머니의 부고를 받게 되고 그리고 어머니의 장례를 체 치르지도 못하고 다시 백의종군을 위해 내려가야 했던 난중일기 속에서는 아주 슬픈 공간입니다“

7 집 내부 S.K 어머니의 죽음을 예감했을까?
부고를 받기 이틀 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새벽꿈이 몹시 산란하여 이루다 말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매우 언짢아서 취한 듯 미친 듯 마음을 가눌 수 없으니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종을 보내서 어머님의 소식을 듣고 오게 했다 - 1597.4.11

9 집 외경 평소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컸던 이순신은 큰 슬픔에 빠지지만, 백의종군을 위해 길을 떠나야 했다.

12 진도 바다 팬 (흘리다가)
+ 전라남도 진도군 그해 정유년 초, 일본은 14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다시 침략했다. 정유재란이다.

25 깃발 날리는 성벽 8월 말,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이 칠천량 전투에서 전멸된다. 이순신 동상 보이는 이에 당황한 선조는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한다.

9 해설사 걸어가는 이후 이순신은 진도의 벽파진에 머물며 또 한 번의 출전을 준비한다.

허상무 / 진도군 문화관광해설사
“바로 이곳은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위치하고 있는 벽파진지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1597년 8월 29일, 이른 아침에 맏아들 회와 (군선) 열두 척을 거느리고 저 멀리 보이는 어란진에서 진을 옮겼던 곳이 바로 (여기) 벽파진입니다”

9 벽파진 S.K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긴장감이 가득한
+ 벽파진 상황에서, 이순신은 패기 넘치는 (전라남도 진도군) 장계를 올리며 반격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지금 신에게 아직 열 두 척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힘을 내어 막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이충무공전서 9권

허상무 / 진도군 문화관광해설사
“이순신 장군은 벽파진에서 16일 동안 있으면서 ‘울돌목 거센 물결을 등지고 싸울 수는 없다’해서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기게 됩니다”

9 지도 CG (잠깐 보다가 CG에 맞춰서) 9월 중순, 이순신은 진도의 벽파진에서 바다 건너 해남의 우수영으로 진을 옮긴다.

9 다리 트래킹 벽파진 앞의 울돌목은
지형이 좁고 조류가 거칠어 전장으로는 최악의 환경이었다.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정 뒤에 명량(울돌목)이 있는데 수가 적은 수군으로서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1597.9.15

9 걸어오는 해설사 해남 전라우수영으로 진을 옮긴 것은 바다의 움직임을 읽은 후 상황을 반전시키려는 전략이었다.

허상무 / 진도군 문화관광해설사
“바로 이 명량의 좁은 물은 이순신 장군이 13척으로 왜적선 130 여척을 무찔렀던 진도 울돌목입니다”

12 팬하면 거친 물살 보이고 (보다가)
하지만 조선 수군에게 남은 배는 단 13척 뿐. 승리가 보이지 않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했으며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그대를 뭇 장수들은 살려는 마음을 가지지 말라 - 1597.9.15

임원빈 소장 / 순천향 대학교 이순신 연구소
“누가 봐도 불가능한 상황인데 어쨌든 리더 이순신 머릿속에, 이 분이 그렇게 엉성한 분이 아니잖아요 굉장히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기 때문에 우리 판옥선 한척이 가지는 막강한 전투력과 명량의 물목이라고 하는 지형적 이점을 잘 활용하고 또 한편 우리 조선 수군병사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한 번 해 볼만 하다’ (라고 생각한 것이 죠)“

17 물결치는 바다 팬 진을 옮긴 다음 날인 9월 16일, 드디어 명량해전의 막이 오른다. 울돌목의 좁은 공간에서 일본군선과 조선군선이 대등하게 맞설 수 있었고, 이후 빠른 물살에 휩쓸린 일본군선은 서로 부딪히며 자멸하고 만다.

돌격하며 지자포, 현자포와 각종 총통을 어지러이 쏘아대니 마치 바람과 번개 같았고, 군관들이 화살을 비처럼 어지러이 쏘아대니 적도들이 감히 대적하지 못하여 다가왔다가 물러나고는 했다
1597.9.16

18 팬하면 승전비 전각 보이고 (잠깐 흘리다가)
+ 명량대첩비 조선 해안의 지형과 조류의 흐름을 활용한 (보물 제503호) 그의 비책은 성공이었다. 명량해전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이후 다시는 바다에서 조선을 공격하지 못하고 전란의 분위기는 반전된다.

임원빈 소장 / 순천향 대학교 이순신 연구소 “명량해전 승리 요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명량의 좁은 물목을 해전 장소로 택함으로써 전체적으로는 133대 13으로, 10대 1의 열세였지만 전투가 벌어지는 맨 앞은 우세한 상황을 만든거죠 명량의 좁은 물목, 또는 조류, 이런 지형적 특성을 활용해서 절대열세의 수적 열세를 극복한 거죠 이게 가장 뛰어난 이순신의 전략전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2 바다에서 T.U하고 (잠깐 흘리다가) 동상 보이면 모두가 불가능하다 여겼던 전투에서 승리한 이순신은 이날의 소회를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적선 31척을 깨부수자 적선들이 물러나 도망치니 다시는 아군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이번 일은 실로 천행이었다 - 1597. 9.16

4 트래킹 (흘리고)

10 바닷가 마을 부감 팬 (잠깐 흘리다가) + 경상남도 남해시 경남 남해의 바다는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22 충렬사 계단에서 T.U (흘리다가) + 남해 충렬사 남해 충렬사는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사적 제233호) 이순신의 유해를 안치했던 곳으로
입구 달리 그의 사후 이 지역 선비들이 노량해전과 이순신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강광수 / 남해군 문화관광 해설사 “이곳 사당이 이순신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일 년에 두 번 제를 모시는 곳입니다 이곳에서는 충무공 탄신일인 4월 28일에 다례제를 모시고 있고요 돌아가신 날, 음력으로 동짓달 열 아흐렛날에 기행제라는 제사를 모시고 있는 곳입니다“

10 사당 내부 팬 1598년, 일본군은 퇴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순신은 도망치는 일본군을 쫓아 노량에 이른다.

맑음. 이른 아침에 적을 공격하러 배를 내보내 종일 싸웠는데, 적들은 허둥지둥 달아났다 - 1598.10.4

12 산길 올라가고 퇴각하는 일본군과 쫓는 조선군의 최후의 일전, 노량해전이 벌어진다. 마지막까지 적을 쫓던 이순신은 결국 이 바다에서 적의 총탄에 쓰러지고 만다.

+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사적 제232호)
6 전각에서 보는 바다 팬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전사하기 이틀 전인 1598년 11월 17일의 일기로 끝이 난다.
왜의 중간 배 1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추격하였다. 왜적은 한산도 기슭을 타고 육지로 달아났다 - 1598.11.17
10 바다 담담한 기록 속에서,
치열한 전쟁을 치루며 7년을 하루 같이 살았던 진정한 영웅 이순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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