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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장금이문화유산여행] 덕수궁 스크랩

도깨비와 함께하는 문화유산여행
덕수궁 전체 모습

오늘 저 장금이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운명을 묵묵히 지켜본 궁궐 덕수궁으로 여러분을 안내할까 합니다. 국난을 극복하고 나라의 기틀을 새롭게 다지는 역사적인 현장이죠! 덕수궁이 조선의 역사 전면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임진왜란을 통해서입니다. 조선 14대 임금 선조가 임진왜란 후 한양에 돌아와 궁궐이 소실돼 거처할 곳이 없어지자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개인저택을 임시 궁궐로 사용하게 됩니다.

통명전

이후 '옛 임금님이 거처했던 집'이란 뜻으로 석어당이란 당호를 붙였습니다. 석어당은 궁궐 건축물로는 드물게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살림집 같은 모습을 지녔는데요. 임진왜란이라는 조선의 어려운 상황을 잊지 않기 위해 선조가 단청을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 국가를 생각하는 이 마음, 감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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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덕수궁의 역사는 41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덕수궁이 조선의 역사 전면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임진왜란을 통해서다. 1592년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에 밀려 한양을 내주었던 조선의 14대 임금 선조. 한양에 다시 돌아왔을 때 궁궐이 소실돼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었다. 결국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개인저택을 임시 궁궐로 사용하게 됐고,이후 ′옛 임금님이 거처했던 집′이란 뜻으로 석어당이란 당호를 붙였다.
궁궐 건축물로는 드물게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살림집 같은 모습을 지닌 석어당. 이는 임진왜란이라는 조선의 어려운 상황을 잊지 않기 위해 선조가 단청을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선조 때부터 서둘렀던 창덕궁 중건이 1609년 광해군 즉위 후 완공되었다.
이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정릉동 행궁은 정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하지만 같은 해 정릉동 행궁은 비로소 자신을 이름을 갖게 된다.
‘나라 운을 기린다’라는 뜻으로 경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임시 행궁처였던 월산대군의 집을 경운궁이라 명명한 것이다. 그리고 광해군은 창덕궁을 정궁으로,경운궁을 이궁으로 삼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는 즉위식을 경운궁 (즉조당 추정)에서 거행했는데, 왕의 즉위가 이루어졌다는 위미를 담고 있는‘즉조당’이란 명칭은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인조는 경운궁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다.
조선 중기 파란만장한 역사의 현장이었던 경운궁. 이후 270여년 동안 궁궐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경운궁은 고종 때부터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다.이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했고,을미사변이후 미뤄왔던 명성황후의 국장이 치러졌다.
경복궁에 모셨던 명성황후의 혼전도 경운궁내에 있는 경효전으로 옮겨왔다.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격동의 역사에 경운궁이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이다.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의 선포를 알린다. 환구단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단으로 고종이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단을 만들어 조성한 단지다.
환구단은 대한제국의 상징이었다. 환구단의 건설은 중국과 대등한 자주국임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것이었다.하지만 러일전쟁ㅁ에서 승리한 일본은 점점 조선을 압박하게 되고 결국 1907년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했다는 이유로 고종을 강제로 폐위시킨다.
한일강제병합 후 고종은 덕수궁 함녕전에 유폐되었다.그러면서 궁궐의 이름을 ‘경운’에서 ‘덕을 누리며 오래 살라’는 뜻의 ‘덕수’로바꾸었으니, 왕조의 운명과 함께경운궁의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이다.
1919년 1월12일 고종황제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한다.고종의 죽음이 일제의 독살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반일 감정은 극에 달했고,결국 그해 3.1운동으로 이어졌다. 고종의 죽음은 한 역사의 종말이자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 되었다.
조선과 대한제국의 운명을 묵묵히 지켜본 궁궐..덕수궁은 국난을 극복하고 나라의 기틀을 새롭게 다지는 역사적인 현장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덕수궁은 경운궁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라 운을 기린다’라는 뜻 임시 행궁처였던 월산대군의 집을 경운궁이라 명명했죠. 조선 중기 파란만장한 역사의 현장이었던 경운궁. 이후 270여 년 동안 궁궐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경운궁은 고종 때부터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덕수궁 1부_환구단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의 선포를 알립니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상징인 환구단을 만듭니다.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단으로 고종이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단을 만들어 조성한 단지지요. 이는 중국과 대등한 자주국임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함녕전

하지만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점점 조선을 압박하게 되고 결국 1907년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했다는 이유로 고종을 강제로 폐위시킵니다. 한일강제병합 후 고종은 덕수궁 함녕전에 유폐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궁궐의 이름을 ‘경운’에서 ‘덕을 누리며 오래 살라’는 뜻의 ‘덕수’로 바꾸었으니, 왕조의 운명과 함께 경운궁의 이름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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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도심 빌딩숲 한가운데 둘러싸인 덕수궁은 한국 근대의 출발점이자 우리나라 역사에서 최초로 황제국의 궁궐로 사용된 곳이다.덕수궁의 정문, 대한문. 원래 이름은 대안문으로 나라와 백성이 모두 태평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붙여졌다.“대한”은 큰 하늘이라는 뜻을 담아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뜻인데 대한제국이 지향하는 바를 호기있게 담고 있다.
덕수궁도 여느 궁처럼 정문을 지나면 금천교가 보인다.‘임금을 만나기 전 다리를 건너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한다’는 의미가 담긴 다리다. 그런데 다른 궁에 비해 정문에서 금천교까지의 길이가 굉장히 짧다. 그 이유는 1968년 태평로의 확장으로 원래의 대한문 자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도로 한가운데 있던 대한문은 2년 뒤 서측으로 밀려 오늘날의 위치로 옮겨지게 된다.
270여 년간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조선의 마지막 궁궐,덕수궁의 새로운 역사적 변화는1896년 아관파천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비밀리에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고종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덕수궁의 수리를 명한다.
그리고 이듬해 러시아공사관을 나온 고종은 덕수궁을 새로운 거처로 삼는다. 덕수궁을 본궁으로 삼은 것은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성정이란 뜻의 중화.조선을 두고 세계열강이 각축전을 벌이던 당시 세계 질서 속에 당당하게 자리 잡겠다는 대한제국의 의지가 담겨 있다. 중화전에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임금이 지나는 길 '답도'에 새겨진 '두 마리의 용'이다. 용은 황제를 상징하는데,봉황 대신 용이 새겨진 답도는 덕수궁이 유일하다.
중화전의 황금색 문살 또한 황제국을 상징하는 것으로대한제국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이다. 월대에 놓여있는 드므.자세히 보면 만세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만세는 중국에서 황제를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던 말이다. 조선은 천세라는 말을 사용했는데,고종 즉위 이후 만세란 표현으로 바꾸면서 대한제국이 황제국임을 널리 공표했다.
중화전 뒤쪽으로 전통 궁과는 어울리지 않는 서양식 건축물이 눈에 띈다.중화전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음에도 서양식의 건축물이라 이방인처럼 보이지만 사실 석조전은 바로 고종이 지향했던 강력한 근대국가 모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 신전을 떠올리게 하는 석조전은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서양의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으로 지었지만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무늬, 오얏꽃을 새겨넣었다. 석조전은 근대국가의 상징적인 건축으로 지어졌으나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됨으로써 황궁의 전각 역할은 수행하지 못했다.
대신 완공 후에 태황제인 고종이 귀빈들을 접대하고 만찬을 행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돌로 지은 집이란 뜻의 석조전.돌집을 짓는다는 것은 곧 서구문물을 수용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고종은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위상을 확립하기 위해 도시정비사업을 추진하는 등 각종 프로젝트를 진행시켰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고종의 자주적인 근대화의 노력이 힘 있게 진행됐던 시기가 대한제국 전반기였다. 정관헌은 대한제국 황궁의 위상을 갖게 되면서 지어진 양관의 하나다. 러시아 풍의 건물이지만 금속난간을 장식한 건 소나무, 사슴과 같은 우리나라의 전통 문양들이다. 뿐만 아니라 고종의 장수를 기원하는 천도복숭아를 물고있는 박쥐도 찾아볼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정관헌은 고종이 역대왕의 어진을 모시고 제례를 지낸 신성한 곳이다.
하지만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한 이후 1912년 황제가 직접 역대왕의 어진을 중화전으로 옮기게 되었다.
대한제국의 영광과 아픈 역사를 간직한 마지막 황궁! 덕수궁이 지켜본 13년간의 역사는
근대한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대한제국의 굳건했던 의지이다.

그리고 1919년 1월12일 고종황제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합니다. 고종의 죽음이 일제의 독살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반일 감정은 극에 달했고, 결국 그해 3.1운동으로 이어졌지요. 고종의 죽음은 한 역사의 종말이자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석조전

중화전 뒤쪽으로 전통 궁과는 어울리지 않는 서양식 건축물이 눈에 띕니다. 중화전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음에도 서양식의 건축물이라 이방인처럼 보이지만 사실 석조전은 바로 고종이 지향했던 강력한 근대국가 모델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석조전 내부

석조전은 근대국가의 상징적인 건축으로 지어졌으나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됨으로써 황궁의 전각 역할은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완공 후에 태황제인 고종이 귀빈들을 접대하고 만찬을 행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정관헌

고종의 자주적인 근대화의 노력이 힘 있게 진행됐던 시기가 대한제국 전반기였죠. 정관헌은 대한제국 황궁의 위상을 갖게 되면서 지어진 양관의 하나입니다. 러시아 풍의 건물이지만 금속난간을 장식한 건 소나무, 사슴과 같은 우리나라의 전통 문양들을 그대로 새겼습니다.

대한제국의 영광과 아픈 역사를 간직한 마지막 황궁! 덕수궁이 지켜본 13년간의 역사는 근대한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대한제국의 굳건했던 의지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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