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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장금이문화유산여행] 창덕궁 스크랩

도깨비와 함께하는 문화유산여행
창덕궁 인정전

장금이가 이번에 안내할 궁궐은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졌지만,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아름다움과 편안함으로 조선의 왕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창덕궁!입니다. 서울 종로3가에서 돈화문로를 따라 쭈욱~ 올라가다 보면 정면으로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만납니다.

창덕궁 정문 돈화문

이 돈화문에 숨겨진 지리상의 비밀 하나!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창덕궁의 정문이 멀리 북한산 보현봉과 일직선상으로 만난다는 것입니다. 창덕궁이 북한산의 산줄기에 위치하고 있는 까닭이라 합니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이 남북을 축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반면, 창덕궁의 건물들은 산세에 따라 자연스럽게 안겨 있지요.

창덕궁 처마모습

경복궁의 정전은 근정전, 창덕궁의 정전은 인정전입니다. '정전(正殿)'이라 함은 왕의 조회(朝會)라는 뜻으로, 모든 신하들과 아침 회의를 열고 현안을 논의하여 결정하는 궁궐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입니다. 가장 높은 위엄을 갖춘 곳이기도 하지요.

인정전 처마 모습

창덕궁 인정전에서는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적 의식과 왕실의 주요 행사가 치러졌습니다. 그러나 그 중 가장 중요하고 성대한 의식인 왕위 즉위식은 대부분 인정전이 아닌 인정전을 들어가는 문, 인정문(仁政門)에서 행해졌다고 합니다.

인정문 모습

기록에 의하면, 연산군을 비롯해 효종과 현종, 숙종과 영조, 순조, 철종, 고종이 이곳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갖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궁궐의 가장 중심 건물인 인정전이 아닌 인정문에서 즉위식이 거행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래의 동영상에서 그 이유를 역사적 관점에서 풀이하고 있는데요. 자세히 알고 싶다면 클릭~해보세요.

프로그램 동영상 소스코드 정보
대본보기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창덕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자
가장 높은 위엄을 갖춘 건물,
인정전.
인정전 지붕
왕실의 주요 행사나,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적 의식들은
모두 이곳에서 치러졌다.
인정문이 바라뵈는
인정전 마당
그런데, 가장 중요한 의식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왕의 즉위식은 인정전이 아닌,
인정문에서 열렸다.
까닭은 무엇일까?

1부 왕의 즉위식은 인정문에서 열렸다
돈화문로
서울 종로3가에서 돈화문로를 따라 쭈욱 올라가다 보면,
정면으로,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만난다.
돈화문 자막 나오면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졌으나,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아름다움과 편안함으로
조선의 왕들이 가장 오래 머물고,
가장 많이 사랑했던, 창덕궁
돈화문 T.U
(간판 보이면)
돈화문은 멀리 북한산 보현봉과 일직선상으로 만난다.
창덕궁이 북한산으로부터 가지쳐 나온 산줄기에 위치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이 남북을 축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반면, 창덕궁의 건물들은 산세에 따라 자연스럽게 안겨 있다.

인정전
창덕궁의 가장 중심 건물인 인정전.
돈화문에서 인정전으로
인정전으로 가기 위해서는 돈화문을 들어서서 잠시 걷다가
오른쪽으로 길을 꺾어야 한다.
금천교 넘어가는
궁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흐르는 물에 씻어 깨끗이 한다는 의미의 금천교를 지나
처음 만나는 문이 진선문.
지미집/
카메라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 멘트
진선문을 들어서면 작은 마당이 나타난다.
마당 보일 때
가운데 길게 뻗은 어도를 따라가다가
중간 지점쯤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문이 인정문.
바로 이 곳에서 왕의 즉위식이 열렸다.

상위복 두 번째
외치는 부분에서 멘트
조선의 스물 일곱 왕 중, 건강악화나 반정 등으로 살아서 왕위를 물려준 이는 모두 일곱명. 나머지 왕들의 즉위식은 모두 선왕의 장례 기간 중에 이루어졌다.

인정전 실내
따라서 즉위식은 화려함과 웅장함이 아닌, 슬픔과 통곡 속에서 인정전이 아닌. 인정문에서 치러졌다.

구름흐르는 모습 조금 본 후 조선 제21대 왕인 영조의 즉위식 역시 인정문에서 거행됐다.
경종이 승하한 뒤, 대소신료들은 하루 세 번씩, 왕세제였던 영조에게 왕위를 물려받을 것을 간청하지만 영조는 눈물로 이를 거듭 사양한다. 그러기를 나흘째, 마침내 영조는 상중의 거처에서 나와 인정문 앞에 놓인 어좌에 오른다.

인정문으로 들어가는 모습 조금 보다가
즉위식을 마친 후 왕은 인정문으로 들어가 인정전에 오른다.
품계석
인정전 앞 넓은 마당에는 문무 대신들이 품계에 따라 자리하도록 한 품계석이 늘어서 있다.
백관들이 자리한 가운데 조회가 열렸던 이곳을 조정이라 부른다.
품계석 트래킹.
조금 보다가
그 가장 윗자리에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이 있다.
인정전 내부
격으로 보아 창덕궁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인정전은
내부 공간 역시 넓고 높다.
용상
용상 뒤에는 해와 달, 그리고 다섯봉우리를 그린 일월오봉병이 둘러 있고, 그 위 천정에는 목각으로 만든 두 마리 봉황이 날고 있다. 모두 왕을 상징하는 것이요, 왕의 위엄과 권위를 드러내는 것들이다.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마친 왕은 이 자리에 앉음으로서 비로소 왕이 되었다.

왕은 이곳에서 외국 사신을 맞고, 과거시험을 치렀으며 왕실의 큰 잔치를 치르기도 했다.
‘왕세자탄강진하도’
고종은 원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이곳에서 대대적인 축하연을 열었다. 이가 바로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황제다.
조정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의 가례, 즉 혼인식을 치른 곳도 이곳이다. 그러한 세자를 훗날 뒤주에 가둬 죽이리라 이날의 영조는 상상이나 했을까?

카메라, 인정전 향하고
(에필로그)
창덕궁 인정전은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가장 상징적 건물이다.
그러나 상중에 치러지는 즉위식만큼은
슬프고 경건한 가운데
인정전이 아닌, 인정문에서 치렀던 조선의 왕들.
새로운 왕의 품위와 권위는 그로써 더욱 높아질 수 있었다.

 
창덕궁 2부_푸른색 기와 선정전

조선시대의 궁궐이 단지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만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지존의 위치인 왕과 신하, 때론 정적과의 치열한 정치의 현장이었습니다.

창덕궁 2부_선정전 내부

창덕궁의 편전(便殿)으로 왕의 공식 집무실인 '선정전(宣政殿)', 왕의 사적 정치 공간인 '희정당(熙政堂)'이 바로 오늘날로 치면 청와대의 대통령 집무실과 국무회의장이었던 것입니다.

창덕궁 2부_희정전 내부 모습

왕은 선정전과 희정당에서 수시로 신하들과 만나 정치를 논하고 정책을 수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왕과 가장 가까운 곳에 해당 관청들 즉 '궐내각사'를 두었습니다. 조선 왕조 500년의 무대가 되었던 요동치는 정치의 현장, 조선시대판 청와대를 아래 동영상에서 만나보세요.

프로그램 동영상 소스코드 정보
대본보기 하늘에 구름 흘러가고
(조금 빠르게)
1479년 6월 2일.
날이 밝자마자, 성종은 정승급 고위 관료들을
선정전으로 긴급 소집한다.
왕비를 폐출시키자는 것이었다.
신하들의 거듭되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날 왕비가 폐출돼 사제로 돌아가니,
이가 바로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다.
이 날의 일은 조선왕조실록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문 열리고
궁궐은 단지 왕과 왕비가 사는 집이 아니다.
창덕궁에는 중요한 정책들이 결정되고 기록되던,
조선판 청와대가 있었다.

타이틀창덕궁의 청와대

인전전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팬하면서
그 동쪽을 보면,
창덕궁 건물 중 유일하게 푸른색 기와를 얹은 건물이 한 채,
눈에 들어온다.
선정전이다.
선정전 자막 나오면
선정전은 창덕궁의 편전으로, 왕의 공식집무실이다.
선정전 회랑
인정전이 주로 의식을 치르는 ‘상징적 공간’이라면,
선정전은 왕이 신하들과 함께 실질적 정치를 펼치던 곳이다.

선정전 내부/

왕과 신하들이 앉아서 정사를 논할 수 있도록,
선정전 바닥은 마루로 되어 있다.
카메라, 어좌로 다가가고
왕이 중앙에 자리하고 양쪽으로 문무 대신들이 줄지어 앉았다.
바로 이 자리에서 성종은 폐비 윤씨를 사사하라는 명을 내린다.
연산군조의 비극이 이곳에서 시작된 것이다.
작은 책상
이러한 내용 하나하나는
예문관에서 파견된 사관과
승정원에서 파견된 주서에 의해 빠짐없이 기록됐다.
전세계 유례가 없는 왕실의 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 일기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뜨락 전경 잠깐 보고
선정전이 ‘공적 정치공간’이라면
선정전 동쪽에 자리한 희정당은
왕의 ‘사적 정치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복도 문 열리면서
왕이 먹고 자고 쉬던 곳.
공적인 장소에서 나눌 수 없는 이야기나 은밀히 만나야 할 인물이 있을 때,
왕은 희정당을 사용했다.
응접실 정면 샷
가장 많은 정책 결정이 내려진 곳이요,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 중 하나다.
황금색 의자
T.U해서 멈추면
현재 이곳에는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황제가 머물렀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창덕궁 전경
조선의 왕과 신하들이 이렇듯 공적 사적으로 만나며
활발한 정치를 펼 칠 수 있었던 것은
왕 가장 가까운 곳에
해당 관청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궐도>의 빈청
Z.I 시작하면서
인정전 동남쪽에 자리한 빈청은
왕을 만나기 전후,
고위 관료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던 곳이다.
<동궐도>의
대청으로 이동
이른바 언관들이 모여
왕에게 옳고 그름을 아뢰고자 대기하던 대청,
<동궐도>의 승정원
그리고 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 역시
인정전과 선정전 가까이 자리했다.

빈터
언관들의 회의실인 대청이 있던 자리다.
왕이 바른 정치를 펴도록,
때로는 목숨을 걸고 ‘전하, 아니되옵니다’를 외쳤던,
조선의 언로가 살아있던 현장이다.
빈청
옛 자리에 흔적만 남은 빈청은
궁궐을 드나드는 관원들 가운데 가장 고위관리들의 공간이었다.
이 외에도 이 일대에는 인사업무를 담당하던 정청,
그리고 내시들의 관서인 내반원 등이 들어서 있었다.

빽빽한 궐내 각사
인정전 서쪽 역시 많은 관청들로 빼곡하다.
의정부와 육조 등 주요 행정관청들이 궐밖에 있다하여 궐외각사라 불린데 반해, 이렇듯 왕을 가까이서 보좌하기 위해 궁궐내 자리한 관청을 궐내 각사라 한다.
예문관
서쪽 궐내각사의 대표적인 곳으로는,
왕의 말이나 명령을 기록하는 관청으로
사관이 소속돼 있던 예문관과
옥당으로 팬하면
왕의 자문기관으로
사헌부, 사간원의 관리들과 함께 언관으로 활동하며
활발한 언로를 열었던 홍문관 등이 있다.

궐내각사
선정전과 희정당, 그리고 궐내각사를 잇는
요동치는 정치의 현장.
그 하나하나는 낱낱이 기록되어 <조선왕조 실록>이라는,
세계적인 기록유산으로 남았다.
조선왕조실록 패
거의 끝날때쯤
조선의 건국시조인 태조에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왕, 472년에 걸친 기록.

에필로그
창덕궁에는, 역사의 한복판에서 숨가쁘게 돌아가던,
조선판 청와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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