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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천상의 컬렉션 15편 - 스페셜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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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는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과 흔적이 배여있다. 그들이 남긴 다양한 문화 유산. 그 속엔 우리의 정체성과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살아있다. 1300년 전 통일신라의 감은사 사리장엄구. 내함의 조각품들은 너무도 정교하고 작아서 그냥 봐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 이 작은 조각품들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강우방 /전 국립경주박물관장 : 감은사 사리장엄구는 아마 동양의 사리장엄구 중에 가장 위대한 작품 수염 한 올 한 올까지 또렷하게 자신의 모습을 그린 윤두서의 자화상. 조선시대 한 선비의 강직함과 당당함이 뿜어져 나온다.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 사실은 그런 수염이 존재하기 힘들죠. 좀 과장했다고 볼 수가 있는데, 아주 당당. 인간 자체가 굉장히 당당했던 인간이었던 것 같다 신라금관의 극도의 화려함과, 반가사유상의 신비스러운 미소., 오천년의 세월은 우리에게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문화유산을 남겼다. 백제 능산리 고분군이 자리하고 있는 부여 능산리 일대. 지난 1993년, 주차장 설치 공사를 앞두고 문화재 발굴조사 과정에서 백제의 절터 유적이 발견됐다. 그 한 켠에 자리 잡은 공방터, 이곳에서 뜻밖의 유물이 출토됐다. 신광섭 / 당시 발굴조사 책임자 : 대향로가 발굴될 거란 생각은 아무도 한 사람이 없었다. 발굴이 끝날 무렵, 진흙더미 속에서 발견된 것은 60센티미터가 넘는 대형 향로였다.진흙 속에 묻혀 녹슨 흔적 조차 없는 신비한 향로였다. 좀더 자세한 조사를 하기 위해 향로에 묻은 흙을 씻어내자 금빛의 대향로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신광섭 / 국립울산박물관장 : 도대체 이게 뭐냐? 궁금해하는데 우리 조사원 중에 이거 박산로네요, 박산로는 중국의 향로 박산향로는 기원전 중국 한나라 때 유행하던 향로다. 원형 받침대가 있고 그 위에 산악형태의 뚜껑이 있는 게 박산향로의 특징이다. 하지만 금동대향로는 형태에서부터 모양 무늬에이르기까지 모두 달랐다. 발견 당시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던 향로를 연결하자, 제 모습이 온전히 드러났다. 금동대향로는 높이 61.8cm로 동북아시아 전체에서도 가장 큰 향로였다. 최응천/ 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 백제금동대향로는 기원전부터 만들어졌던 박산향로의 전통을 계승했지만 그와는 완전히 다른 백제식으로 새롭게 번안하고 완전히 새롭게 창안해서 백제에 맞게 소화한 다시 말해서 백제가 만든 아주 새로운 향로다. 국립부여 박물관에 자리한 백제금동대향로. 백제금동대향로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뉘는데, 용 모습의 받침대와 몸체가 있고, 그 위엔 뚜껑과 봉황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향로의 맨 윗부분에 자리잡은 봉황이다.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생동감이 넘치는 모습이다. 신광섭/국립울산박물관장 : 봉황은 보통 천조시조 서조라고 해서 우리 고대 군주들이 가장 선호하는 동물. 봉황이 나타날 때는 그냥 혼자 스스로 나타나는 게 아니고 아름다운 음악을 대동하고 뭇 새들의 영접을 받으면서 나오는 데 임금이 치세를 잘해서 태평성대를 이룰 때만 나타나는 새. 난세에는 봉황이 안 나타난다. 봉황 아래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들의 모습이 펼쳐진다. 다섯 방향으로 솟은 봉우리에 앉아서 연주를 하는 다섯 명의 악사는 모두 다른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왼손으로 북을 잡고, 오른손에 북채를 쥔북 연주자, 피리의 일종인 장소를 연주하는 악사도 있다. 이 악사는 대나무관을 옆으로 이어붙인 배소를 연주하고 있고, 거문고 연주자는 넓은 소매단을 걷어올리고 현을 누르며 뜯고 있다. 완함이라는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도 보인다. 향로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힘차게 용트림하듯 날아오르는 한 마리의 용이다. 용은 입을 크게 벌려 향로 기둥을 물고 있는데, 주목할만한 것은 몸체만큼이나 기형적으로 큰 다리이다. 이 다리는 급격하게 가늘어지면서 둥글게 뻗어 올라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이런 모습의 다리는 향로 전체에 역동성과 균형미를 주고 있는데, 백제금동대향로는 백제인의 이상세계와 혼이 담긴 예술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신광섭/ 국립울산박물관장 : 다리 하나를 손잡이처럼 뻗치지 않고 그냥 일주형으로 마치 등잔대처럼 만들었다고 했을 때 이 향로가 얼마나 밋밋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역시 백제인들의 예술혼 속에 들어있는 하나의 파격의 미 변화의 미 이런 것들은 우리가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백제인들은 어떻게 이 향로를 만들었는지 전통 방식대로 만들어보기로 했다. 먼저 밀랍으로 향로의 모양을 그대로 조각한다. 손톱이 들어갈 정도의 무른 밀랍으로 정교하게 조각한 다음 그 위에 진흙을 바르고 굳힌다. 진흙이 굳으면 가마에서 구워낸다. 뜨거운 열을 가해 진흙속의 밀랍을 녹이는 것이 그 다음 순서. 진흙 속의 밀랍이 완전히 녹으면 단단한 거푸집만 남는다. 잘 배합한 청동을 액체가 될 때까지 끓인 뒤 쇳물을 거푸집 안에 붓고 굳을 때까지 식힌다. 밀랍으로 향로의 모습을 조각한 다음 향로가 만들어질 때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9개월-. 밀랍 주조 공법은 고대 금속공예 주조 기술 가운데 가장 정교한 방식으로 손꼽힌다. 최응천/동국대 미술사학과 교수 : 고대의 이제 금속 공예 주조 중에 가장 정교한 기법이 밀랍 주조 공법.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삼국시대, 금동불상이라든가 정교한 작품을 만들 때 밀랍주조를 사용했고 백제금동향로는 그 가운데 밀랍주조공법이 가장 성공적으로 구현된 대표적인 작품. 하지만 누가 언제 백제금동대향로를 만들었는지는 대향로 발견 이후의 오랜 궁금증이었다. 그 궁금증은 향로 발견 2년 뒤, 인근의 능산리 절터에서 사리감이 발견됨으로써 풀리게 된다. 사리를 담았던 이 사리감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창왕 13년에 아버지 성왕을 위해 공주가 절을 짓고 사리를 바쳤다는 내용으로, 명문에 나온 창왕은 성왕의 아들 위덕왕을 가리킨다. 전덕재/ 단국대 사학과 교수 : 위덕왕(창왕) 때 무덤을 능산리 절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결과적으로 자기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사찰을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삼국사기엔 벡제 성왕이 지혜와 식견이 뛰어난 성군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덕재 /단국대 사학과 교수 : 우리가 말하는 어떤 그 백제의 중앙 행정 조직이라든가 또는 그 지방통치체제를 완성한 것이 바로 이 사비 시대에 성왕 때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성왕 때는 아마 백제가 고구려에 한강 유역을 뺏긴 이후에 다시 한번 중흥할 수 있는 기틀을 닦았던 그런 시기라고 얘기할 수 있고 실제 그런 업적을 이루기도 했었기 때문에 아마 백제인들에게는 더욱 성스럽고 위대한 임금으로 보였기 때문에 시호를 나중에 성왕으로 붙이지 않았나. 백제 성왕은 지금의 옥천 일대에 해당하는 관산성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관산성은 신라로 가는 길목으로, 당시의 관산성 전투는 두 나라의 국운을 건 전쟁이었다. 당시 신라의 왕은 정복군주였던 진흥왕. 백제 대신들은 신중하게 전쟁할 것을 요청했지만,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은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왕이 아들 편을 들면서 554년, 성왕의 아들 위덕왕이 이끄는 백제군은 가야 연합군과 함께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한다. 전쟁 초반 전세는 선제공격을 감행한 백제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일본서기에는 백제가 관산성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전세를 송두리째 바꾸는 사건이 일어났다. 어두운 밤, 성왕은 불과 50명의 호위군을 이끌고 아들이 있는 관산성으로 향했다. 아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았던 신라군은 중간에서 성왕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성왕의 목을 베었다. 전덕재 /단국대 사학과 교수 : 우리가 군사적으로 생각했을 때 50명을 대동하고 갔을 때 중간에 신라군의 급습을 받지 않는다는 확실한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는 그 부분에 대한 대비가 필요했던 거죠 성왕의 치욕적인 최후.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때부터 전세는 역전된다. 신라군이 승승장구 하면서 백제는 2만9천명이 넘는 병사를 잃고 말 한마리 조차 살아 돌아가지 못할만큼 대참패를 당한다. 믿을 수 없는 패배와 아버지의 죽음. 출가를 결심하기도 했지만 이 마저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전덕재/단국대 사학과 교수 : 아마 금동대향로가 백제의 가장 대표적인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아마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사찰을 나름대로 웅장하고 거대하게 꾸미려 했고 거기에서 명복을 빌기 위한 여러 가지 행사들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어떤 최고 수준을 가진 작품들 이런 것들을 아마 (능산리) 사찰에 조성하고 또 안치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허망한 아버지의 죽음과, 흔들리는 왕권과 민심, 그리고 잃어버린 백제 중흥의 꿈. 백제금동대향로에는 이 모든 것을 바꾸고자했던 당시 백제인들의 세계관이 그대로 담겨있다. 사자와 으르릉거리듯 포효하는 호랑이, 산속에서 금방이라도 뛰어나올 것 같은 멧돼지, 이 곳은 야생성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고대의 세계이자, 상상의 세계이다. 약육강식의 세계인데 상상속의 동물도 나온다. 이 형상은 청동기의 손잡이나 고리를 물고 있는 도깨비와 같은 기이한 동물의 머리다. 이 산악세계는 또한 신선이 사는 세계이기도 하다. 바위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손을 모으고 명상을 하는 사람, 긴 도포를 입고 약초를 캐는 이도 있다. 한쪽에서는 긴 머리를 풀어 폭포수에 머리를 감는데, 영원불멸한 신선의 세계를 보여준다. 달리는 말위에서 능숙하게 몸을 뒤로 돌려 활을 쏘는 기마인물엔 백제인의 기상을 담아냈고, 아래쪽 금동대향로의 몸체엔 연꽃잎을 3단으로 새겨넣었다. 연꽃잎은 탄생과 회생을 의미하는데, 불교에서는 극락으로의 왕생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현세의 죽음이라는 한계를 넘어, 영원한 생명을 상징하는 금동 대향로. 백제금동대향로는 시대의 염원을 담아 하늘에 올린 백제인의 걸작이었다. 최응천/동국대 미술사학과 교수 : 백제의 불교 사상과 그리고 백제 사비 시대에 크게 유행했던 도교적인 내용이 결합이 되어서 백제인이 당시에 품었던 사상적인 배경이 이 안에 다 응축. 이런 점에서 백제 향로는 백제인의 당시 사상을 한 번 더 되짚어 볼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유물. 삼국시대의 문화를 잘 보여주는 또 하나의 분야는 고분문화이다. 귀족이나 왕족의 무덤을 의미하는고분에는 많은 공예품과 장식품이 함께 매장되어,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신라 금관 역시 고분에서 발굴되었다. 고분문화와 함께 불교문화도 퍼져나갔다. 삼국시대 유물로 손꼽히는 반가사유상은 당시 사람들의 미적 감각을 그대로 보여준다. 6,7세기 삼국시대에 이미 작품수준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차미애/ 미술사 문학박사 : 6세기 정도 되면 이미 불교는 들어와 있고 다 수용했고 발전해가는 과정이고 그런 과정 안에서 통일신라라고 하는 시기가 되면 훨씬 확장 되서 전체적으로 불교 문화가 반영이 되는 것이죠 통일신라시대는 경주에서 그 화려한 꽃을 피웠다. 살아서는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하고 죽어서는 동해의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던 문무왕이 잠들어 있는 대왕암-. 그 인근에 감은사지가 있다. 절터만 남아있는 이곳은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지은 호국사찰이다. 감은사지에는 우리나라 3층석탑 중 가장 오래되고 큰 두개의 탑이 남아있다. 문명대 /동국대 미술사학과 명예교수 : 감은사 탑은 최초의 3층 석탑.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불교의 불법성 삼보를 뜻하기도 하고 그보다는 이 국가 방어목적으로 감은사를 지었기 때문에 감은사는 바로 삼국통일을 뜻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하나가 된다. 지난 1996년, 노후한 동탑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유물이 발견됐다. 탑의 3층 옥개석을 밧줄에 묶어 기중기로 조심스레 들어올리는 순간, 현장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탑신의 한가운데서 구멍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그속에서 흙과 자갈로 뒤섞인 사각형의 물건이 보였는데, 그것은 13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사리장엄구의 일부였다. 문명대 교수/ : 탑 안에 들어가는 사리장엄구는 부처님의 사리는 이른바 유골이거든요. 부처님의 뼈거든요. 부처님의 성스러운 뼈를 봉안하는 부처님의 이른바 무덤이라고 알면 되겠습니다. 본격적인 유물 수습은 위 뚜껑을 들어내는 것으로 시작됐다. 외함에서는 비교적 양호한 사천왕상이 수습됐다. 내함수습은 더 정밀해야 했다. 연꽃모양 뚜껑과 피리모양 기둥을 수습했다. 손가락 두마디 크기의 수정병도 수습됐다. 유물에 따라온 흙을 씻어내자 더욱 작은 유물이 수습됐다. 그중엔 사리도 보였다. 수습이 일단락되면서 사리함의 각 부분들이 분리된 채 모습을 드러냈다. 수습된 유물 파편들이 본래의 모습을 찾기까지는 3년의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야 했다. 더 이상의 훼손을 막고 원형복원을 하기 위한 작업이다. 수습과정을 거쳐 복원된 사리장엄구 외함. 사천왕상이 사리장엄구를 호위하듯 감싸고 있다. 험상궂은 표정을 짓고 있는 북방의 수호신인 다문천왕. 발에는 양을 눌러 밟고 서있다. 다문왕상의 주변엔 다양한 장식들이 함께 하고있다. 아주 섬세하게 조각된 갑옷을 입고 있는 다문천왕 옆에는 정교하게 만든 손잡이가 달려있다. 서방의 수호신인 광목천왕은 불법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신이다. 양 다리 사이에 악귀를 눌러밟고 있는 지국천왕은 동방의 수호신이다. 남방의 수호신인 증장천왕까지 외함의 사천왕상은 살아있는 듯 생생하다. 사리장엄구의 외함을 둘러싼 사천왕상은 신라를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문명대/ : 아주 화려하고 장려하고 치밀하게 장치를 한 것이 바로 외함. 특히 사방에 동서남북에 사천왕을 부착해서 왜적들이 들어오는 것을 다 막아주는 방어해주는 신장의 역할을 사천왕상이 담당 내함의 수습도 시작됐다. 사리를 직접 담았던 용기는 바로 수정사리병이다. 사리병과 함께 병 뚜껑과 받침대도 발견됐다. 사리병의 높이는 3.65센티미터, 병의 입구 크기로 미뤄볼 때 작은 사리들만이 사리병에 봉안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냥개비보다 약간 키가 작은 수정 사리병-. 놀라운 것은 작은 사리병을 덮고 있는 금제 뚜껑이다. 병 뚜껑의 지름은 약 1.2센티미터다. 제작진은 다시 특수 촬영을 시작했다. 100배율로 확대하자 놀라운 사실이 발견됐다. 0.3밀리미터의 금알갱이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뚜껑의 표면을 장식한 수많은 금알갱이들은 모두 땜으로 표면에 부착되었다. 뚜껑의 뒷면을 보면 역시 금알갱이들이 붙어있는데 뚜껑과 촉 사이를 모두 금알갱이로 땜질해 이어붙이고 있다. 사리는 지극히 정성스럽게 모셔졌다. 사리수정병을 금제 뚜껑과 받침대로 장식한 뒤 다시 복발형 덮개로 사리병을 덮었다. 사리병 아래에는 기단을 설치하고, 네 모서리의 기둥이 자리 잡은 후에는 지붕인 천개를 올렸다. 사리병을 감싸고 있는 복발형 덮개엔 부분적으로 벗겨진 흔적이 보인다. 이 덮개 위에는 수정으로 만든 유리구슬이 올려지는데, 이 구슬은 부처의 사리를 상징하는 보주다. 사리병 바깥에는 모두 8명의 조각상들이 다시 사리를 지킨다. 무기를 들고있는 서방의 광목천상은 총 높이가 겨우 3.2cm에 불과해서, 눈으로 봐서는 그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확대를 해서 보면 얼굴의 모습과 입고 있는 갑옷이 아주 구체적으로 조각된 것을 알 수 있다. 문명대 교수/ : 사방에 국가가 있다. 국가를 지켜주는 최고의 왕이 사천왕이고 사천왕 밑에서 직접 전쟁을 하고 하는 사람들이 누구냐. 팔부신장들, 신들의 장수. 우리나라로 치면 장군들. 장군들은 안에서 지켜주고 밖에는 왕들이 지켜주고. 이런 역할분담을 잘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사리를 지키는 이 스님상의 크기도 지극히 작아서 높이는 2.8센티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손가락 두 마디 크기지만 얼굴의 진지한 표정과 귀, 그리고 옷의 주름까지 그대로 살아있다. 사리가 있는 가운데 단의 아래쪽 기단에는 다시 4명의 팔부신장들과 공양보살상들이 입체적으로 장식돼있다. 이 공양보살상은 더 작아서 크기가 3cm도 안되는데 전체 모습이 생생하게 조각되었고, 배경에는 작은 원들이 하나 하나 새겨져있다. 섬세하게 조각을 했다. 이것은 어자문인데, 빽빽이 들어섰음에도 그 방향은 일정하고 규칙적이다. 신장상들은 날카로운 칼이나 기다란 봉을 들고 있으며, 4명의 신장상 모두 모습과 생김새가 다르다. 네 귀퉁이에는 겨우 2센티미터 크기의 사자상이 다시 사리병을 지킨다. 가까이서 봐야 할 정도로 작은 크기지만 그 형체는 아주 섬세하다. 강우방/ 전 국립경주박물관장 : 이게 주물인데 아주 작고 정교해요. 확대경으로 봐야지만 보이는 부분도 있어. 그래서 굉장히 정교하게 심혈을 다 기울여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이 거기 다 응축이 되어 있다. 4개의 기둥을 따라가면 화려한 장식으로 된 천개를 만난다. 천개는 뚜껑을 의미하는데, 여기엔 다시 지극히 작은 크기의 보살상들과 둥근 문양들이 나타난다. 보살과 불상들이 보이는데 이 상들은 카메라로 확대해야 그 모습이 겨우 보일 정도로 지극히 작다. 천개 곳곳엔 상들을 새겨 넣어 지극히 깊은 불심을 보여준다. 그리고 작은 둥근 무늬들은 크기가 극히 적음에도 무늬와 모양이 모두 다르다. 감은사지 사리장엄구는 통일신라가 가졌던 공예기술의 극치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강우방/ 전 국립경주박물관장 : 통일 신라 시대에 갑자기 이렇게 된 게 아니고 이미 삼국시대에 금속공예 기술이 최고조로 발달해서 백제 금동대향로 같은 것도 백제 시대에 만들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나라의 금속공예는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그런 뛰어난 기법을 가지고 있다. 한 시대의 문화는 다음 시대에서 또다른 모습으로 꽃을 피운다. 통일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는 독보적인 기록 문화를 남겼다. 무려 8만장에 이르는 목판에 불심을 새긴 고려의 팔만대장경. 이 대장경판은 나무판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 자 한 자 새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이다.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고려대장경판은 세계에서 가장 정확하고 가장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명대 교수 : 이 목판은 그 귀중한 것은 말로 할 수도 없고, 값어치를 매길 수도 없을 만큼 독보적이다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 목판의 정교하고 치밀하고 아름다운 글씨 솜씨는 어디에도 비견할 수 없다. 고려대장경은 절박한 위기의 순간에 만들어졌다. 1231년부터 시작된 몽골군의 침입은 30년간 계속됐다. 몽골군의 약탈과 침략, 그 앞에서 저항하던 고려는 외세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이기기 위해 대장경을 새기기 시작했다. 글자를 새기는 데만 무려 12년이 걸린 팔만대장경은 나라를 지키려는 염원에서 시작된 고려 최대의 국책프로젝트였다. 문명대 교수 : 몽고를 물리치는 그 목적으로 그 일념으로 국가와 백성과 불교가 혼연일체가 돼서 팔만대장경 목판을 만들어. 그만큼 온갖 정성이 들어가 있고 온갖 정신이 함축되어 있다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불교중심 문화는 유교중심으로 변화한다. 문화에서도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는데 그중 하나가 회화부문의 발전이다. 이인문의 강산무진도. 끝없이 펼쳐지는 강산을 파노라마 사진처럼 연속적으로 그린 이 그림은 무려 8미터가 넘는 대작이다. 두루마리 그림이라고 해서 강산무진도권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소나무그림과 함께 험준한 산세가 펼쳐진다 이인문 낙관 5끝에는 이인문의 도장이 새겨져있다. 김소영 /명지대 미술사학과 박사 : 장권이라고 하면 거시적인 안목에서 처음과 끝까지 구성을 해야 하는 구성력이 필요한데 그런 면에서 보면 이인문이 남긴 강산무진도권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산수화다. 조선 회화사를 통틀어도 이런 산수화는 없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늙은 소나무와 흐르는 물을 많이 그렸던 이인문. 그는 국가에서 필요한 그림을 그리는 관청인 도화서의 화원으로 활약했는데, 왕의 직속화원으로 일할만큼 뛰어난 실력을 선보였다. 김소영/ 명지대 미술사학과 박사 : 이인문이 남긴 산수화는 당대에 굉장히 탁월한 평가를 받았습니다. 특히 김홍도와 비견되는 탁월한 화가라든가 산수화에 일가견을 이루었다든가 또는 신필이라는 당대의 문인들, 예를 들면 신위라든지 성해응이라든지 이런 문인들에 의해서 평가를 받았다. 정확한 제작연대가 밝혀지지 않은 강산무진도는 이인문의 말년작으로 추정되는데, 도입부에서는 두 노인이 강산무진 여행 준비를 한다 강의 세계는 강산무진도의 가장 큰 주제 중 하나로 앞부분에 펼쳐진다. 부드럽지만 정적인 강의 흐름에 날카로운 절벽들을 배치, 전체 구도의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강의 세계를 건너면 그럼 전체의 한가운데서 무릉도원의 풍경을 만나게 된다. 이 부분은 당시 사대부들이 어떤 삶을 꿈꾸었는지를 아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태호/미술사학자 : 이 험준한 산세 너른 산 정상 부근에 2층에 누각을 짓고 여기서 이상향을 추구하는 문인들의 삶이 그려져 있죠. 나는 이 세속적인 현실 복잡한 현실 속에서 살지 않고 이 깊은 산중에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아름다운 삶을 살겠다. 좋은 시, 좋은 친구 좋은 그림과 함께 지내겠다는 의지 이인문 강산무진도의 또 하나의 주제는 험준한 산세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면서도 다양한 모습과 기운을 내뿜는 산세들. 강산무진도는 산세들의 드라마이기도 하다. 이태호/ : 이인문의 강산무진도가 갖는 뛰어난 예술성은 바로 강산무진이라고 하는 이상 세계를 중국의 산수화풍을 받아들여서 자기화하면서 이런 드라마틱한 산세를 끌어내. 아주 험준한 괴물과 같은 바위의 모습이라든지 비스듬하게 올라간 바위 산세의 이 짧은 터치들, 그리고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들의 불룩불룩 솟은 모습, 이런 것들은 이제 조선의 자연에서는 볼 수 없는 그런 새로운 풍경들. 이런 모습들을 이인문이 상상해 낸 점, 그리고 이걸 통해서 강산무진을 편집해낸 점, 이것이 이제 이인문의 뛰어난 예술성이라고 봐야죠. 인간이 있어 인간과 자연이 공존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는 데 있다. 어촌 마을 사람들의 풍경에서부터, 험준한 산세를 끊임없이 오르는 사람들, 그리고 계곡 사이사이를 부지런히 건너는 사람들, 이렇듯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부지런히 살아가면서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이 이인문이 꿈꾼 세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이태호 : 이 강산무진도가 갖는 또 하나의 의미는 그 험준한 산세 속의 이상향을 그리면서 동시에 서민들이 살아가는 혹은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들을 함께 했다. 지금 서민 마을 속에는 많은 서민들이 움직이고 있죠 부지런히. 지금 짐을 어깨에 메고 대화를 나누고 산속에 들어가는 장면, 혹은 짐을 끌고 있는 그런 장면, 혹은 양쪽 어깨에 나무 막대기를 해서 짐을 들고 움직이는 허리 굽은 노인도 보이고, 나귀 타고 가는 사람들, 이런 풍속화적인 장면 그러니까 이런 강산무진 같은 이상향에도 인간은 산다는 이야기를 이인문이 하고 있는 것 같다. 강산무진도의 끝부분은 다시 평화로운 풍경으로 돌아온다. 마치 인생을 상징하듯 강산무진도는 휘몰아치는 산세들의 세계를 지나면 고요한 평화와 평온의 세상을 보여준다. 사람들 역시 평온한 일상 속에서 저마다의 삶을 부지런히 이어가고, 무에서 시작되었던 강산무진도는 다시 조용한 무의 세계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또 한편에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이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 것과 우리 땅의 현실에 눈을 돌리려는 노력. 그 치열한 의식은 그림으로 나타났다. 해남윤씨 녹우당에는 국보급 문화유산이 보관되어 있다. 종손어른이 조심스럽게 꺼내온 이 그림은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이다. 수염 한 올 한 올을 살아 있는 듯 생생하게 묘사한 이 자화상은 정면을 강렬하게 응시하는 윤두서 자신의 당당한 기개를 보여준다. 차미애/미술사 문학박사 : 윤두서의 자화상의 의의라고 한다면 첫 번째로는 현재 남아있는 자화상 중에 가장 이른 시기에 그린 자화상이라는 것도 되지만 윤두서의 어떤 생각, 삶이라는 것이 나름대로 반영되어 있다고 봅니다. 거기에는 당당함 윤두서가 굉장히 본인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당당함이 있었어요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의 후손으로, 해남윤씨는 당대의 명문가이자 지역에선 상당한 재력을 보유한 가문이었다. 하지만 남인집안 출신이었던 윤두서는 당대의 당쟁으로 벼슬길에 나갈 수가 없었다.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명예교수 : 윤두서가 살았을 때는 숙종 때죠 그러니까 우리 역사 조선시대의 역사에서 붕당정치가 가장 심했을 때 주로 이제 서인 정권이 들어서는 시기에 정치로부터 소외된 남인 계열의 핵심이죠 집안은 아주 부유했지만, 젊은 나이에 관직의 꿈을 접어야 했던 윤두서. 현실에 절망하거나 불만을 표출하는 대신 예술적 재능이 넘쳤던 그가 선택한 것은 그림이었다. 녹우당에 전해 내려오는 휘귀본 고서에는 그의 손때가 묻어있다. 특히 중국 역대 화가의 작품을 도판으로 소개한 책을 보며 그는 자신만의 그림세계를 만들었다. 차미애/ 미술사 문학박사 : 1927년 조선사 편수회가 일제 강점기에 해남 윤씨에 책을 한번 조사를 한 적 있다. 해남 윤씨 장서 목록이라는 게 있는데요 군서목록이라고 해서 해남 윤씨 집안에 중국에 그런 책들 선진 문물에 관한 많은 책들이 2,600여 종에 해당하는 책들이 있었다. 윤두서 같은 경우는 굉장히 선진문물을 빨리 받아들이면서 그런 것들을 공부하다 보니까 서양 화법은 이런 거구나 인식을 하게 됩니다. 그의 그림에는 그의 인식이 그대로 담겨있다. 유하백마도는 말이 잠깐 발굽을 든 순간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전의 화풍과 달리 사물을 사실적으로 그리기 시작하는 윤두서.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서민들의삶이었다. 각자의 생업에 땀 흘리며 살아가는 서민들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낸 윤두서. 그의 그림들은 김홍도보다 반세기나 이른 시기에 그려진 조선 최초의 풍속화였다. 특히 나물캐는 여인을 그린 이 그림은 우리 역사상 생업 현장에 있는 여성의 모습을 그린 최초의 그림이다. 이태호/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 윤두서는 자기화 함께 타자라고 하는 자기와 같이 살고 있는 서민들의 삶 나물 캐는 여인들이라든지 목기 깎는 사람들이라든지 쟁기질하는 장면 이런 것들을 눈을 돌려서 그걸 스케치하고 자기 회화 세계로 끌어들인 거죠 그러니까 윤두서는 자기와 함께 자기애와 함께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함께 했던거죠 윤두서의 치열한 현실인식이 눈을 돌린 곳 중 하나는 지도였다. 그는 이전 지도에는 없던 부분을 확인하여 지도에 채워 넣고, 행정구역과 각 지역의 특징을 세밀히 표기 했다. 사실적이고 정확한 지리정보를 제공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이태호 : 한편 비슷한 시기에 겸재 정선하고 비교를 하면 노론 계열이었던 겸재 정선이 주로 금강산을 그리고 인왕산을 그리고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그려. 거기에 비해서 윤두서는 조선지도를 그린다. 땅에 대한 생각의 또 다른 점이죠 윤두서가 자기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땅에 대한 인식을 예술적인 아름다운 풍경으로써 그린 게 아니고 내가 살고 있는 땅은 어떻게 생겼는지 지도로 그렸다는데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죠 그는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노비에 대한 생각도 남달랐다. 사회적 신분을 떠나 주위의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윤두서. 그리고 모든 열정을 쏟아 공부하고 연구하며 그림을 그렸던 윤두서. 자화상은 마흔 일곱, 젊은 나이에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이자 자신이 스스로를 그린 그림이다.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명예교수 : 윤두서의 경우는 현대적 개념으로 보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형태를 아주 모범적으로 보여준거죠. 정말 서민을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정말 애정을 진정으로 쏟은 거라고 봐야죠 그래서 풍속화도 그렸지 그들의 삶을 그렸지 그들에 대한 인간적인 태도도 남달랐지,이런 걸 통해서 읽을 수 있죠 그런 게 고스란히 자화상에 나와있는 거죠 우리의 문화, 우리의 것에 대한 자부심이 넘쳤던 정조시대. 그 자부심은 또 하나의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남긴다. 보물 제 1437호 달항아리. 윤용이 교수/ 명지대 : 18세기 전반, 숙종 영조 연간, 이때가 특히 우리 것을 추구하던 시기, 이때 우리나라의 역사인 동국통감이 만들어지고 우리나라의 지리인 예를 들면 지도가 만들어지고, 한국적인 세계가 성숙하는 시기가 18세기 전반이었고, 백자에 있어서 아마 항아리 중에 이렇게 길쭉한 장신호 보다는 아마 둥근 달항아리처럼 후덕한 달 모습과 같은 이런 데서 아마 미감을 찾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다. 백자이면서 커다랗고 둥근 달항아리. 큰 항아리를 이렇게 백자로 만든 것은 동북아시아에서도 조선이 유일했다. 그것은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미를 찾았던 선조들의 취향이 남긴 유산이기도 하다. 윤용이 교수/ 명지대 : 기록에 보면 게장을 담았다, 혹은 젓갈을 담았다. 생활의 음식물들을 담아서 사용하던 용기. 어떤 때는 거기에 필요한 간장을 담을 수도 있고 김치를 담을 수도 있는 용기 중 하나. 생활 용기였던 달항아리는 크면서도 둥근 모습을 그러나 당시 한 번에 큰 달항아리를 만들 수 없었던 장인들은 독특한 생각을 해냈다. 그것은 달항아리의 아랫부분과 윗부분을 따로 만드는 것이었다. 거기엔 섬세함이 필요했다. 김정옥 사기장/국가 무형문화재 제105호 : 아랫부분인데 아랫부분은 항아리를 받쳐주는 역할함으로 이 선이 맞아야 해요. 선이 너무 처지거나 들어가면 옳은 달항아리의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 선에 신경을 제일 많이 쓴다. 항아리의 위쪽 부분 역시 따로 만들어졌다. 그런 다음 항아리의 아래위 부분을 합쳤다. 달항아리 위쪽에 있던 받침대를 덜어내고, 항아리를 이어붙이는 작업이 시작된다. 항아리의 아랫부분과 윗부분의 원의 크기와 굵기는 거의 일치해야 한다. 크기나 무게가 틀어지면 가마에 굽는 과정에서 달항아리가 고열을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기 때문이다. 형태가 완성되면 백자 유약을 바른다. 당시 조선시대의 유약색은 우윳빛의 하얀색으로, 조선사대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색이었다. 이 유약이 항아리에 골고루 잘 스며들면 백자로 태어난다. 김정옥 사기장의 망뎅이 가마에서는 적송을 이용해 불을 지핀다. 적송은 수분이 적어 재를 적게 남긴다. 달항아리는 가마 속에서 1300도가 넘는 고열을 견뎌내야 하는데, 이 과정을 거치면 마침내 한없이 둥근 모습의 달항아리가 그 미감을 드러낸다. 윤용이 교수/ 명지대 : 달항아리가 갖는 그런 두 가지 큰 중요한 모습이 있다. 하나는 둥근 맛, 물론 정을 이루는 것은 아니지만 약간 어리숙한 그런 달항아리의 둥근 맛에 아마 미감이 있었을 것이고, 또 하나는 아까 말씀드린 우윳빛 색깔의 담백한 백자 색깔, 이 두 가지 맛이 결국 백자 달항아리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 미감으로 만들어진 게 이제 항아리라고 할 수 있다. 달항아리는 조선시대 100년 가까이 꾸준히 만들어진 백자로 추정되고 있다. 달처럼 한없이 둥글고 풍만한 곡선. 이 자연스러우면서도 둥근 선은 달항아리를 어디에 두어도 주위의 환경과 어울리게 했다. 그리고 우유빛깔의 소박한 흰색. 인공을 가하지 않은 느낌의 흰색은 자연의 소박한 색이자 조선이 찾아낸, 조선의 색이었다. 방병선 교수/ 고려대 고고미술사학 전공 : 어떻게 보면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자 하는, 소박하고 어떤 가식을 가하지 않으려 하는 나름의 장식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달항아리가 표출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그 달항아리를 볼 때도 이건 전 세계적으로도 굉장히 독특하다.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어떤 아름다움의 총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5천년 우리 역사의 숨결을 고스란히 담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들. 거기에는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과 그들 시대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숨 쉬고 있다. 한 시대의 꿈과, 열정과, 미감, 그리고 자부심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우리의 문화유산들. 문화 유산은 지금의 우리에게 삶의 지혜와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최고의 보물이다.
내용
한국 예술 천년사, 문화재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다. 수많은 세월을 지나 기적처럼 전해진 문화재의 아름다움과 가치, 그에 얽힌 살아있는 역사 이야기를 호스트의 생생한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살펴보고, 현장 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대한민국을 매혹시킬 단 하나의 보물을 선정한다. 배우 김수로가 소개하는 '촉잔도권' 배우 최여진이 소개하는 '경천사 10층 석탑' 개그맨 서경석이 소개하는 '김시민선무공신교서'
I801:1612002-001-V0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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