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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문화재] 전통건축 순례 - 임진왜란 충무공과 수군의 얼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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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충무공과 수군의 얼을 찾아서
- 여수 진남관과 통영 세병관 -

여수 진남관과 통영 세병관은 임진왜란의 국난으로부터 조선을 구해 낸 충무공과 직접적인 연관을 맺는 장소이며 여기에 설치된 수군 관련 건축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 또한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초반으로 이어지는 관아 건축의 경향을 파악할 수 있고, 시대를 대표하는 객사 건축으로 얼마 남지 않은 귀중한 사례라는 점에서 소중한 문화재들이다.

진남관

여수 진남관(국보 제304호).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 본영으로 사용하던 곳. 정면 15칸, 측면 5칸, 건물면적 748.39m2의 단층 팔작지붕으로 현존하는 지방관아 건물 중 가장 크다. 현재는 2020년까지 보수·정비공사가 진행중이다.
이미지 출처: 연합뉴스


임진왜란 중 치열했던 해상전 그리고 승리의 한산도대첩

1592년(선조 25) 4월 14일 오후 5시경, 400여 척 병선에 나누어 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일본군 1만 8,700여 명이 부산포에 들이닥쳤다. 이튿날 첨사 정발은 부산진성 전투에서 그리고 동래부사 송상현은 동래성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5월 2일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와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 일본군이 한양에 들이닥쳤다. 이렇듯 국가 안위가 풍전등화인 상태에 한 줄기 구원의 빛이 된 것은 충무공 이순신과 그가 이끄는 수군이었다.

5월 7일 옥포에서의 첫 승리를 시작으로 5월 8일 고성 적진포 해전, 5월 29일 사천 선창(泗川船艙) 해전, 6월 2일 당포(唐浦) 해전, 6월 5일 고성 당항포(唐項浦) 해전, 6월 7일 율포 해전(栗浦海戰) 등 연전연승이었다. 육지에서는 아직 고전을 면치 못하였고 6월 13일에는 평양을 적에게 내주었다.

그러나 전체 판세를 뒤집을 만한 계기가 마련되었다. 7월 8일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한산도 승리 덕분이 었다. 일본 수군은 남해에 모여 서해를 따라 북상한 다음 육군과 합세할 계획이었지만, 충무공이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수군을 한산도로 유인하여 전멸시켰고 이어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와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의 수군까지 궤멸시킨 것이다.



진남관 기둥

여수 진남관 기둥.
기둥은 모두 68개를 사용하였고, 가구는 2고주 7량을 기본으로 하여 2출목 위치에 외목도리를 설치하였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외 2출목의 익공 양식을 설치하였고 기둥 사이에는 화반을 배치하였다.
이미지 출처: 연합뉴스


충무공과 수군의 중심 기지, 여수 진남관(鎭南館)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승리로 이끈 충무공과 수군의 중심 기지가 된 곳은 전라좌수영이었다. 현재 진남관(鎭南館)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이며, 충무공 당시에는 진해루가 서 있었다. 진남관 건물은 충무공의 후임인 전라좌수사 겸 통제사 이시언이 1599년 창건한 것이다. 충무공의 진해루 터에 대규모 객사를 세우고 진남관이라 이름지었다.

‘진남’이란 “남쪽의 왜구를 섬멸한다”는 뜻이었다. 당시 세웠던 건물은 1716년(숙종 42)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1718년(숙종 44) 전라좌수사 이제면이 중창하였다. 진남관은 전라좌수영의 관아 가운데 객사 건물로서 다른 건물들이 1895년(고종 32) 이후 하나 둘씩 사라지게 되면서 홀로 남게 된 것이다. 객사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한 달에 초하루와 보름날 두 번씩 궁궐을 향해 충성과 의무를 다짐하는 건물이었으며 어명을 받든 중앙 관리가 업무 차 지방에 내려오는 경우에 숙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국보 제304호로 지정된 진남관은 건물 규모가 정면 15칸, 측면 5칸으로 면적이 240평에 이른다. 현존하는 지방 관아 건물로는 최대 규모다. 정면은 중앙 칸을 15척으로 가장 넓게 하고 좌측은 끝에서부터 8·13·12·10·12·13·13척으로 구성하였으며, 우측은 이와 대칭이 되도록 하였다. 이처럼 칸의 위치에 따라 너비를 다양하게 계획하여 변화를 준 모습은 진남관 건축의 특징 중 하나다.

기둥은 모두 68개를 사용하였고, 가구는 2고주 7량을 기본으로 하여 2출목 위치에 외목도리를 설치하였다. 기둥 설치에서도 특징이 나타나는데, 좌우 양쪽에서 3번째 기둥열의 내부 전면 고주(하중도리 아래까지 도달하는)만 생략하였고, 반대로 같은 기둥열의 후면으로 고주 앞쪽에 상중도리에 이르는 높은 고주를 추가 설치한 것이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외 2출목의 익공을 설치하였고 기둥 사이에는 화반을 배치하였다. 가운데 칸 양쪽 기둥에는 창방과 결구되는 위치에 용을 조각하여 건물 외부로 머리를 내밀도록 하였고 건물 안쪽에는 용의 꼬리를 조각하였다. 다른 위치의 공포와 비교하면 중앙 칸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조선 후기의 다포 불전 건축에서 중앙 칸 좌우 기둥에 결구되는 안초공(按草栱)을 용머리 형태로 장식하는 모습과 상통한다. 18세기 초 지방의 관아 건축에서 불교 건축의 장식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롭다.



세병관

통영 세병관(국보 제305호).
세병관은 17세기 건축으로, 조선 선조 당시 이경준(李慶濬) 제6대 통제사가 두릉포에서 통제영을 이곳으로 옮겨 완공한 통제영의 중심건물이다. 정면 9칸·측면 5칸 규모의 웅장한 건물로, 지붕은 측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이미지 출처: 연합뉴스


300년 남해바다를 지키다, 통영 세병관(洗兵館)

진남관보다 앞선 시대의 수군 건축으로는 통영 세병관(洗兵館)이 있다. 1603년(선조 36) 거제도에 건축되었고 이듬해인 1604년(선조 37) 현재 위치로 이전되었으며 1646년(인조 24) 확장, 중건되었다. 18세기 초의 진남관에 앞서는 17세기 건축으로서 국보 제305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통제영은 1593년(선조 26) 8월에 처음 만들어지는데 충무공이 삼도(三道)의 수군을 총괄하여 효율적으로 지휘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주장하여 창설된 것이다.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는 전라좌수사인 충무공이 겸임하였고 진이 설치되었던 거제의 한산 역시 통제영의 기능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누명을 쓰고 충무공이 부재했던 정유재란 초반의 전투에서 한산 진영이 폐허가 되면서 이전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통제영이 전시에만 임시로 설치한 관아로서, 권설아문(權設衙門)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삼도 수사들을 총괄하는 상급 지휘관으로 정립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통제영 역시 전황에 따라 옮겨 다니는 실정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1602년(선조 35) 전라좌수사가 겸임하던 통제사를 경상우수사가 겸임하도록 변경하였고, 당시 고금도에 있던 통제영이 거제 오아포(烏兒浦)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오아포가 가지고 있는 입지상의 여러 불리한 점 때문에 1604년(선조 37) 제6대 통제사 이경준에 이르러 현재 위치인 고성 두룡포(頭龍浦)로 이전하였다.

이후에는 1895년(고종 32)까지 유지되었다. 현재 통영(統營)이라는 도시 이름은 바로 통제사영(統制使營)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침내 1607년(선조 40)에는 수사가 통제사를 겸임하는 형식(경상우수사겸통제사)에서 통제사가 수사를 겸임하는 형식(통제사겸경상우수사)으로 정착되면서 명실상부한 삼도수군을 총괄하는 최고 지휘관 역할이 분명하게 되었다. 관직의 품계 역시 정3품에서 종2품으로 상승 조정되었다.


여수 진남관 충량

통영 세병관 충량

여수 진남관 충량(上)과 통영 세병관 충량(下) 비교 모습.
두 건물 모두 측면이 5칸이고 팔작지붕이기 때문에 좌우 측면에 대들보와 직각 방향의 충량이 각각 2개씩 설치되는 공통점이 있다. 진남관의 충량은 용머리를 조각하여 장식한 것과 달리 통영 세병관의 충량은 장식이 없는 단순한 모습이며, 굽은 나무를 설치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문화재청


세병관’이란 말은 당나라 두보의 시 「세병마(洗兵馬)」 가운데 “安得壯士挽天河 淨洗甲兵永不用”에서 유래한 것으로 “하늘의 은하수로 병기를 씻어 사용하지 않도록 한다”는 뜻이다. 평화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이를 지키기 위한 단호한 의지의 표현을 현판에서 볼 수 있다. 국보 제305호인 세병관의 건물 규모는 정면 9칸, 측면 5칸이다. 정면은 중앙 칸부터 모든 칸을 12척으로 동일하게 구성하였다. 측면 5칸 중 중앙 3칸 역시 12칸이고 좌우 끝 칸만 9칸으로 구성하였다. 진남관과 비교하여 단순한 모습이다.

기둥은 모두 50개를 사용하였는데, 가구는 2고주 9량을 기본으로 하여 1출목 위치에 외목도리를 설치하였다. 기둥 설치에서 특징이 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후면 내고주 안쪽으로 내부 기둥을 설치하고 있는데, 좌우 끝에서 두 번째 기둥열에서만 내부 기둥을 생략하였다. 따라서 중앙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2칸×3칸 규모의 넓은 공간이 대칭적으로 배치되는 모습이 되었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외 1출목의 익공 양식을 설치하였고 기둥 사이에는 화반을 배치하였다. 초익공은 앙서와 연화를 조각하고 이익공은 연봉 위에 수서, 삼익공 역시 연봉 위에 수서를 조각하고 있다. 따라서 진남관과 비교하면 장식이 덜한 모습이 보이는데, 이를 통해 시대가 앞서는 건축임을 확인할 수 있다.

건물에 사용된 장식의 측면에서 여수 진남관과 비교하면, 시대가 앞서는 모습을 충량(衝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두 건물 모두 측면이 5칸이고 팔작지붕이기 때문에 좌우 측면에 대들보와 직각 방향의 충량이 각각 2개씩 설치되는 공통점이 있다. 진남관의 충량은 용머리를 조각하여 장식한 것과 달리 통영 세병관의 충량은 장식이 없는 단순한 모습이며, 굽은 나무를 설치하고 있다.

통영 세병관은 여수 진남관과 비교하였을 때, 정면 칸수가 적고 평면 규모 역시 작지만 가구는 2고주 9량으로 구성하여 진남관의 2고주 7량보다 도리 수가 많도록 하였다. 규모가 작지만 치밀하고 견실한 구성을 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세병관 건물의 안쪽 중앙에는 주위보다 높은 마루를 머름 위에 설치하여 앉는 자리에 따라 높고 낮은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들어열개 분합문, 홍살, 그리고 서까래 아래 우물천장 등을 설치하여 그 효과를 배가시키고 있다.


월간문화재_문화유산채널뉴스_라인(수정)
월간 문화재  2018. 06+07. 제388호
<전통건축 순례>

글. 류성룡.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작성자 : 김태영 | 등록일 : 2019-08-13 | 조회수 :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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