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뛰기링크

문화유산채널

영상공모전

주메뉴 시작

메뉴 열기, 닫기
검색어 입력

칼럼

홈 문화유산뉴스 칼럼

인쇄 공유

[월간 문화재] 대중문화 속 문화유산 - 영화 <취화선>과 예술의 시공간

월간문화재_문화유산채널뉴스_타이틀
밤에서 풍류로,
풍류에서 예술로


영화 <취화선>과 예술의 시공간
 
조선의 마지막 화원이었던 오원 장승업의 삶을 영화화한 <취화선>. 그 속에 그려진 조선시대의 주막과 기방, 그리고 밤은 장승업에게 창작의 시·공간적 배경이 된다. 장승업에게 예술적 영감과 무한한 상상력 그리고 계급과 질서를 잊게 했던 조선시대 밤문화와 풍류를 들여다본다.

월간_181011_대중문화속문화유산_취화선 포스터

영화 <취화선> 포스터.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밤이 선생이다
 
‘밤이 선생이다.’ 이 문장은 故 황현산 선생의 책 제목이기도 했다. 그는 밤이라는 시간적 차원에 대한 애착이 있었던 것 같다. 왜 밤이 선생인가? 그는 <밤이 선생이다>에서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다. 낮이 사회적 자아의 세계라면 밤은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다”라고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상상력과 창조는 그의 선생이다. 낮이 질서의 세계라면, 밤은 그 틈을 발견하고 질서로부터 벗어나는 사유가 허용되는 세계인 것이다. 누군가는 이 사유를 사유 자체로 끝낼 것이지만, 누군가는 이 사유를 행위에 연결시킨다. 밤의 사유는 결국 친구와의 술자리, 또는 놀이, 나아가 예술작품 등 다양한 영역으로 존재를 확장하는 것이다. 질서의 세계는 관습이 지배하는 세계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그 선택지가 비교적 명확하게 주어진다. 이 선택지는 인간을 억압한다. 관습을 선택하는 일은 삶의 수많은 잠재성들을 제거해 나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잠재성은 억압되는 것이지 삭제되는 것이 아니다. 고로 우리가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 이성적으로 살아갈지라도 잠재적 에너지는 언제나 내 안에 살아 숨 쉬는 것이다.

조선 말기 화가인 장승업은 살아 숨 쉬는 에너지를 화폭에 담는다. 화폭만은 그의 폭발적 에너지를 너그럽게 수용했기 때문이다. 영화 <취화선>은 이와 같은 장승업의 상상력과 창조행위를 재생산한다. 장승업은 그림을 즐기는 자라기보다는 그려야만 하는 자다. 즉 그림과 그의 삶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그림 자체가 그의 삶인 것이다.

영화는 온갖 박해와 폭력에 시달리는 누나를 위로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 장승업의 어린 시절을 포착한다. 말로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낡은 천 조각에 그림을 그려 주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위로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는 일찍이 ‘말’의 한계를 알았던 것 같다. 가령 ‘아프다’라는 말은 내 고통의 크기를 온전히 대변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만들어 낸 독창적인 이미지나 그림은 ‘아프다’라는 말의 한계를 돌파한다. 장승업은 이처럼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전하려는 인간이었다.


월간_181011_대중문화속문화유산_취화선1

영화 <취화선> 스틸 중 주막 장면. 풍류와 예술의 매개였던 주막과 기방은 유교적 질서로부터 비교적 유연한 곳이었다. 특히 <취화선>에서 보여주는 밤의 주막은 단순 쾌락의 공간이 아니라 소통과 배움이 있는 복잡다단한 공간으로 형상화된다. 이미지 제공: 필자

 
<취화선>의 밤
 
<취화선>이 그리는 조선시대의 밤은 생동한다. 단순한 어둠의 세계가 아니라 사람 냄새가 나는 시간인 것이다. 밤이라는 시간에 생동감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술이다. 술이 빠진 밤은 그려 낼 재간이 없을 정도로 장승업과 술은 공생의 관계를 맺고 있다. <취화선>은 주막과 기방 등에서 술을 마시거나 장승업이 타인들과 교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주막이나 기방은 놀이의 공간인 동시에 매개의 공간이다. SNS나 스마트폰이 매개가 되는 현대와 달리 주막이나 기방이 거대한 소통의 장으로 작동한 것이다. 술에 잔뜩 취한 장승업이 주막에 들어가자마자 점원은 “야, 승업아!”라며 곧장 반긴다. 내 얼굴을 이미 알고 있고, 또 내 이름을 부르며 반겨주는 주막이라는 공간은 단지 익명의 손님과 익명의 업주로 관계 맺는 현대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또한 장승업이라는 이름이 주막이라는 공간을 통해 퍼지고, 그에게 여러 가지 일거리나 제안이 들어오기도 한다. 춘화도를 모사해 줄 수 있느냐는 그림 판매상의 제안을 장승업이 매몰차게 거절하는 장면도 이 주막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발생한다.

장승업이 동료 화가인 송헌을 따라 주막에 가는 장면에서도 조선시대의 술자리 그리고 밤의 정경이 잘 드러난다. 송헌은 이 주막이 무역상을 하다 망해서 하는 술집이라고 설명한다. 2층 규모의 주막으로, 앞서 언급한 주막보다는 훨씬 큰 규모임에도 손님들로 북적인다. 아울러 손님들의 모습을 보면 옷차림새가 다양한 것을 볼 수 있다. 맛있는 음식과 술, 흥취는 계급을 가로질러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화가들은 시화의 성인 소동파(蘇東坡)에 대한 담소를 나누며 막걸리를 마시기도 한다. 그들은 천지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화가의 뜻을 그려내야 한다는 소동파의 말을 곱씹으며 술을 나눈다. 이처럼 주막은 흥을 흥으로, 술을 술로 넘기는 단순쾌락의 공간이 아니라 소통과 배움이 있는 복잡다단한 공간으로 형상화된다. 기방(妓房)은 <취화선>이 주막에 이어 제시하는 밤의 공간이다. 환쟁이라 불리던 화가와 양반이 교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묘사되는데 여기서 기녀는 예술매개자로서 존재한다. 물론 가부장적 사회에서 기녀는 천인의 신분이지만, 그들은 다양한 예술과 문화가 계급을 넘어서 교류하는 공간의 주인이기도 했다.

월간_181011_대중문화속문화유산_취화선2

영화 <취화선> 스틸 중 자신이 그린 수묵화를 보고 있는 장승업. 장승업의 수묵화는 어두운 먹의 색을 통해 흰 종이라는 밝음을 지워 나가는 과정이다. 회화란 무엇을 그려내는 것이라기보다는 흰 여백에 존재하는 수많은 잠재성들을 하나씩 지워 나가는 일일 수도 있다. 이미지 제공: 필자
 

여기서 장승업은 단소(短簫)를, 매향은 생황(笙篁)을 연주하며 흥취를 북돋는다. 생황은 국악기 중에서 유일하게 화음을 낼 수 있는 악기로서 조선시대 문인들의 풍류를 상징하기도 한다. 승업과 매향의 연주는 화려한 잔칫상의 음식들이 무색해질 만큼 공간을 장악하고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어두운 밤이 도래했지만, 그들의 공간만은 은은한 빛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어둠으로 빛을 그리기

장승업은 수묵화를 그렸다. 수묵화는 먹으로 그린 회화로서 농담(濃淡)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짙음과 옅음을 활용함에 따라 먹은 ‘검정’이라는 단일한 색이 아닌 여러 가지 색을 띠게 된다. 그럼에도 먹의 색은 마치 어두운 밤하늘을 닮았다. <취화선>이 보여주는 장승업의 붓놀림을 보면 그의 작업이 깜깜한 먹을 통해 흰 종이라는 밝음을 지워 나가는 과정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즉 회화란 흰 종이 위에 내 것을 새기는 일이라기보다 흰 여백에 존재하는 수많은 잠재성들을 하나씩 지워 나가는 일일 수 있는 것이다.

장승업이 살던 시대는 어둠이 가득했다.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조선이 아니라 언제나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지배받고 제국적 논리에 휩싸여야만 했던 것이다. 이는 아득한 밤과 같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지만 정작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제한돼 있는 것이다. 장승업 역시 그 시대의 화가이자 환쟁이로서 정치적 회색지대에 놓여 있었다. 그가 어떤 쪽에서도 죽임을 당하지 않는 것은 단지 그의 재능 때문이다.


월간_181011_대중문화속문화유산_취화선-기명절지도
 
장승업 作 ‘기명절지도’. 세로 38.8cm, 가로 233cm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그러나 ‘장승업의 회색지대’는 다소 다른 의미를 지닌다. 어떤 것으로부터 구속받지 않으며, 주체적 결정을 통해 끝없이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정치적 소속감이라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장승업은 자신의 소신과 어긋난 일이라면 어명(御命)까지도 어기는 화가였다. 각박한 시대에서 발생하는 그의 탈주 행위나 기행은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장승업은 어둠의 시대에 살았지만, 그의 삶과 작품은 그 어둠이 어떤 어둠인지 묻게 했다. 이 물음은 어둠을 통해 빛을 찾는 행위다. 장승업의 수묵화가 검은 먹을 통해 겹겹의 세상을 그려내듯이 그의 삶 역시 밤의 발걸음으로 독창적 세계를 그려나간 것이다. 그가 생성하는 어둠은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복잡다단하다. 극중 장승업이 “환쟁이에게 반복은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도 매번 차이라는 빛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호모루덴스, 잠재성의 발현

네덜란드의 철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호모루덴스’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으로 놀이가 비생산적이고 소모적 행위라는 기존의 관념을 비판하기 위한 개념이다. 이에 따르면 놀이는 문화의 잔존물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를 발생시키는 본질적 요소다. 나아가 하위징아는 놀이와 예술이 서로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취화선>이 보여주는 장승업의 창작행위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월간_181011_대중문화속문화유산_취화선3
 
『조선 최후의 거장-장승업 취화선 특별전』.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6월 28일부터 11월 30일까지 열리는 『조선 최후의 거장-장승업 취화선 특별전』에서는 장승업의 거작들을 디지털로 재현했다. 이미지 출처: 연합뉴스


놀이는 돈을 목적으로 삼는 경제적 활동과 달리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물론 장승업은 자신의 창작물을 통해 경제적 활동을 하지만, 억만금을 줘도 자발성 없는 그림을 그리지는 않는다. 하위징아는 “명령에 의한 놀이는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고로 장승업은 언제까지나 자발적으로 그리고자 했으며, 또한 기존의 다양한 방법론을 차용하기보다는 자기만의 것을 찾고자 했다. 즉 스스로 놀이를 창조하는 행위를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이 행위는 단독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수많은 동료나 선생과 함께 주막에서, 기방에서 교감하고 반응해야만 새로운 것을 그려낼 수 있다. 무지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앎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 이는 비단 장승업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동료와의 교감과 반응. 이것이 바로 조선시대 예술가가 향유한 풍류의 근원이다. 주막과 기방 그리고 밤은 그들의 풍류를 생성하고 창작의 계기를 제공하는 시·공간적 배경이다. 이곳은 유교 질서로부터 비교적 유연한 시·공간으로서 양인과 천민이 예술의 언어로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예술은 계급과 질서가 아니라 차이와 무질서를 말한다. 차이와 무질서는 유교 사회의 천편일률적인 구조를 이탈하고 해체하는 잠재성을 지닌다. <취화선>은, 그리고 장승업은 이러한 잠재성의 지점에 있다. 어떤 사상이나 질서도 인간과 그 문화를 완전히 구속할 수는 없다는 증명인 것이다.


월간문화재_문화유산채널뉴스_라인
월간 문화재  2018. 10+11. 제390호
<대중문화 속 문화유산>

글. 김태환. 영화평론가


 

작성자 : 김태영 | 등록일 : 2019-06-26 | 조회수 : 622

SNS 로그인 페이스북 로그인하기 트위터 로그인하기 네이버 로그인하기 카카오 로그인하기 로그아웃

(0 / 300)

댓글등록
전체댓글수 0

quick menu

quick menu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