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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문화재] 서울의 풍류지도 - 20세기 서울의 변화를 대표하는 공간-종로

월간문화재_문화유산채널뉴스_타이틀
20세기 서울의 변화를
대표하는 공간
종로


종로는 광화문 사거리부터 동대문에 이르는 큰길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의 중심가로로, 일제강점기에는 저항과 유행의 중심지로, 광복 이후 근대에는 대중문화의 중심지로 격동과 발전을 거듭했다. 지금도 서울의 중심지로 그 위상을 지키고 있는 종로의 변천사를 짚어 본다.


월간_90203_서울의 풍류지도_종로_사본-위백규 한양도

‘한양도’(위백규 제작, 1770).
종로는 조선시대 이곳에 시각을 알려주는 종루가 있어 생긴 명칭이다. 종루를 중심으로 동·서·남쪽으로 뻗어 있는 행랑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소장처: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양의 중심가로, 종로

조선시대에 종로는 광화문에서 광화문 사거리까지의 세 종로, 종각에서 남대문까지의 남대문로와 더불어 한양에서 가장 중요한 도로였다. 더욱이 모든 궁궐이 불에 탄 임진왜란 이후 종로와 연결된 창덕궁·창경궁만 중건하고 새로 건립한 경희궁의 정문이 종로 쪽을 향하게 되자 한양의 중심가로로서 종로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조선 왕조는 종로와 남대문로에 수천 칸에 달하는 행랑을 세웠는데, 도로 좌우에 세워진 이들 행랑은 자연스레 노폭을 규정할 뿐 아니라 도로의 주요 경관을 형성했다. 조선시대 종로 거리에는 정부와 도성민에게 물건을 공급하는 시전이 행랑에 자리하고, 행랑 뒤편에는 피맛길도 조성됐으며, 의금부·전옥서·포도청 등의 관청도 위치했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중심 가로인 만큼 치안 관련 관청이 집중적으로 자리한 점이 눈에 띈다.


종로의 근대화 작업과 좌절

개항 이후 근대화와 국권 수호의 방법을 둘러싸고 지배층과 민중이 대립하는 한편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청나라와 일본의 움직임이 이와 맞물리면서 전쟁까지 발발하자 조선의 상황은 매우 위태롭게 됐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대한제국 수립이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 올라 대외적으로 균형 외교를 지향하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서울을 황제국의 수도, 즉 황도(皇都)에 걸맞게 개조하는 사업을 전개했다. 종로의 근대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먼저 종로 행랑 앞에 있던 가가(假家 ; 초가로 된 임시 가게)를 철거해 종로 본래의 면모를 회복하고 가로등을 설치했다. 조선후기 국왕 행차 때 백성들의 민원을 수리하던 장소인 원각사 터에 탑골공원도 세웠다. 무엇보다 종로 경관을 변개시킨 것은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부설된 전차였다.

여러 차례 조선을 방문하고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란책을 쓴 영국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종로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과거 동방에서 가장 더러운 거리가 이제 가장 깨끗하고 현대적인 거리로 바뀌었다”고 찬탄했을 정도로 대한제국 시기의 종로는 근대적 도로로 변모했다. 종로의 전차는 남대문∼용산과 서대문∼애오개∼마포로 확대됐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반식민지 상태가 되면서 종로는 또 다른 운명을 맞이하게 됐다.


월간_90203_서울의 풍류지도_종로_종로거리

1920년대 후반 종로통(왼쪽은 미국 청년회관).
서울 중심가로였고 전찻길이 놓이면서 가장 먼저 근대화의 바람을 탄 종로는 식민지로 전락하는 순간부터 철저히 방치됐다. 1920년대 이후부터 개발을 본격화해 도로 포장공사를 하고, 간선도로의 경관을 위해 도로변에는 2층 이하의 건물을 짓지 못하게 강제했다. 소장처: 수원광교박물관


식민지 시기의 종로 ; 저항과 유행의 중심지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단행된 직후 대한제국의 수도 한성은 수도의 지위를 상실했을 뿐 아니라 이름도 경성으로 바뀌고 경기도에 예속된 하나의 도시로 전락했다. 식민도시 경성은 ‘북촌의 조선인 거리’ ‘남촌의 일본인 거리’ 라는 언급이 말해 주듯이 종로를 경계로 북쪽의 조선인과 남쪽의 일본인이 맞서는 이중도시의 모습을 띠었다. 당시 종로는 남산 아래 진고개를 중심으로 형성된 일본인 세력이 북상하는 것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최근 ‘조선의 건축왕’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정세권을 비롯한 조선의 건축업자들은 종로 이북의 대규모 필지를 사들인 다음 이를 소규모 필지로 분할해 서양식 주택 기능을 수용한 절충식 한옥인 도시형 한옥을 집단적으로 건설해 분양했다. 이를 통해 종로 이북 지역에 일본인 주택이 세워지는 것을 막고 서민·중산층 수준의 조선인이 살기에 적합한 주택을 제공했다. 지금도 북촌 한옥마을을 비롯해 익선동에 남아 있는 한옥이나 종묘공원과 그 주변에 가득했던 한옥들이 이런 방식으로 세워졌다. 1937년 지하 1층에 지상 6층 규모로 신축된 박흥식의 화신백화점도 일본인이 남촌에 세운 미쓰코시, 조지아, 미나카이, 히라다 백화점에 맞서며 조선인의 종로 상권을 지켜냈다.

식민지 시기의 종로 거리는 일제의 경제적 북진을 막는 역할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일제 식민권력과 맞서는 역할을 했다. 3·1운동의 발화 지점이 바로 종로에 위치한 탑골공원이라는 점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한편 종로 거리는 근대 문물을 체험하고 이에 대한 욕망을 충족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강점 10년간 일본인의 주된 거주지인 남촌 개발에 집중했던 조선총독부도 식민통치의 거점을 북쪽으로 옮길 것을 결정하면서부터 종로를 마냥 방치할 순 없었다. 경복궁 안에 총독부청사를, 현 서울도서관 자리에 경성부청사를 건립하는 것에 발맞춰 종로 도로의 포장공사도 진행하고 노폭도 15칸으로 일정하게 유지했으며, 간선도로의 경관을 위해 도로변에는 2층 이하의 건물을 짓지 못하게 강제했다. 10년간 중지됐던 청계천 준설 공사도 진행했다. 조선인들도 변화하는 종로에 한청빌딩과 영보빌딩 등을 건립하기도 했다. 최남의 동아백화점과 박흥식의 화신백화점도 들어섰고, 경성전기주식회사 사옥(구 한전본사)처럼 기업 본사도 세워졌다.


월간_90203_서울의 풍류지도_종로_종로거리-2

종로네거리 화신백화점.
1937년 11월 11일 종로네거리에 완공된 화신백화점 서관.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명치정(명동)에서 유행한 다방도 인사동의 ‘비너스’ ‘카카듀’처럼 종로에도 등장했고, ‘미인 여급’을 고용해 영업하던 카페나 ‘빠’도 일본인의 본정 거리만큼 많은 수가 종로에 자리 잡았다. 명월관·태화관·국일관 등의 조선음식점뿐 아니라 양식·중식·일식 요리를 파는 음식점도 종로와 그 주변에 자리했다. 단성사와 조선극장 같은 영화관도 영업을 하면서 한국과 일본 영화뿐 아니라 미국 영화도 상영하며 미국문화에 대한 일반인의 동경 내지 선망도 자극했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처럼 근대적 거리로 변화한 종로를 전차를 타거나 산보하며 쇼핑을 하고, 영화를 보고, 음식을 맛보고,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재즈를 들으며 양주와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정치세력의 각축장이 된 종로 그리고 파괴

1945년 8월 15일 라디오를 통해 일본의 항복 사실이 알려지자 조선인들은 종로통으로 쏟아져 나와 만세를 부르며 조국 건설의 꿈에 부풀었다. 그런데 정치세력이 좌와 우로 갈라지고 이들이 외세와 연계를 가지면서 한반도의 운명은 우리의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주요 정치세력의 집결지였던 종로는 늘 집회와 시위가 열리는 장소가 됐고, 종로 동쪽 끝 남쪽에 자리한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은 좌익과 우익의 대규모 집회 장소로 활용됐다.

월간_90203_서울의 풍류지도_종로_장군의 아들을 개봉한 1990년의 단성사

‘장군의 아들’을 개봉한 1990년의 단성사.
1990년대 종로는 단성사와 피카디리극장, 서울극장이 ‘골든 트라이앵글’을 이루며 영화 개봉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이미지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종로엘레지』 142쪽


대중문화의 중심지 종로

1950년대 말에 전쟁 이전 수준을 회복한 서울은 1960년대 본격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는 종로가 있었다. ‘불도저 시장’으로 유명한 김현옥 시장이 1966년 부임하면서 종로 경관의 변화가 시작됐다. 그는 광화문 지하도 굴착을 시작으로 1층이 도로로 사용되는 특이한 건물 낙원상가를 건립하고, 종삼(鐘三)으로 통칭되던 유곽 지역을 ‘나비작전’을 전개해 없애는 한편 그곳에 세운상가라는 ‘남북으로 긴 초대형 건물’도 세웠으며, 탑골공원 주위를 에워싼 아케이드도 건설했다(파고다아케이드는 1980년대 초에 철거됨).

그런데 그가 한 일 중에서 종로 경관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1968년 단행한 전차의 전면 철거였다. 전차를 대체할 버스 수급이 여의치 않게 되면서 서울 시민들은 지하철 1호선이 개통한 1974년 8월까지 버스의 ‘만성적인 정원 초과’ ‘조리돌리기’ 등 극심한 교통 불편을 겪어야 했다.

이후 종로, 특히 1∼3가 구역은 구획정리사업과 도심재개발 사업이 진행되면서 피맛골 같은 유기적인 도시조직이나 서린동의 낙지골목이 사라지고 대신 필지 합병을 통한 대규모 빌딩이 들어서게 됐다. 이런 변화의 와중에도 종로는 명동과 더불어 우리나라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지역이었다. 1960∼1970년대 ‘쎄시봉’ ‘르네쌍스’ 같은 음악전문 다방이 등장해 대중가요와 팝송을 부르거나 클래식을 틀어 주기도 했다. 종로3가역 주변에 있던 단성사와 피카디리극장, 서울극장은 ‘골든 트라이앵글’을 이루며 영화 개봉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지금은 사라진 종로서적은 사람들이 만나는 약속장소로 유명했다.

강남 개발이 본격화하고 종로와 명동에 자리했던 여러 시설·기관들이 사대문 밖으로 이전하면서 종로의 중심성은 많이 약해졌다. 하지만 수도 서울의 중심가로로서 지닌 역할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월간문화재_문화유산채널뉴스_라인
월간 문화재  2019. 02+03. 제392호
<서울의 풍류지도>

글. 김웅호. 서울역사편찬원 전임연구원


 

작성자 : 김태영 | 등록일 : 2019-06-20 | 조회수 : 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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