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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자녀들, 왕자와 왕녀


왕의 자녀들, 왕자와 왕녀

조선왕조 500년간 실제로 재위한 왕은 27명이며, 추존된 왕은 5명이었다. 이들 32명의 왕에게는 총 152명의 왕자와 116명의 왕녀가 있었다. 근본적으로 왕자와 왕녀는 왕의 자녀였고 그래서 형제자매이자 평등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남녀와 출생순서 그리고 생모의 신분에 따라 큰 차별을 받았다.

조선시대의 경우, 본처의 자녀는 적자가 되었지만 첩의 자녀는 서자가 되었다. 또한 같은 적자라 하더라도 출생 순서에 따라 적장자 그리고 둘째 아들 이하 사이에는 커다란 차별이 존재했다. 이런 차별은 근본적으로 적장자에게 가문을 계승시키는 유교적 종법(宗法) 때문이었다. 그 유교적 종법은 흔히 나무에 비유되었다. 예컨대 나무의 뿌리는 조상에 비유되었고, 나무의 본줄기는 대대로 가문을 계승하는 적장자에 비유되었다. 나무의 본줄기에는 해마다 새로운 마디나 새로운 나이테 그리고 새로운 곁가지가 생기는데, 그렇게 생기는 새 마디 또는 새 나이테를 대를 이어 가문을 계승하는 적장자로 생각했고, 본줄기에 새로 생기는 곁가지는 적장자의 형제자매로 생각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왕실과 일반 사가를 철저하게 구별했다. 왕실에는 일반 사가와 달리 천명을 받은 왕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천명을 받은 왕은 하늘, 용, 옥, 황금 등으로 비유되었다. 왕의 자녀는 신성한 천명을 받은 왕의 피를 물려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왕의 자녀들은 보통 나무가 아니라 특별한 나무로 비유되었다. 즉 금지옥엽(金枝玉葉)에 비유된 것이었다. 금지옥엽이란 말 그대로 황금 나무의 가지 또는 옥 나무의 잎사귀란 뜻이었다. 금지옥엽의 황금 나무 또는 옥 나무는 신성한 왕실을 상징하는 나무였다. 그러므로 황금 나무의 가지 또는 옥 나무의 잎사귀는 신성한 왕의 자녀가 된다.

이렇게 본다면 왕의 적장자인 왕세자는 황금 나무 또는 옥 나무의 본줄기에 해당하고 왕세자의 형제자매는 황금나무 또는 옥 나무의 곁가지나 잎사귀에 해당한다. 결국 왕세자는 금본옥간(金本玉幹)에 해당하고 왕세자의 형제자매는 금지옥엽이 되는 것이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황금 나무 또는 옥 나무가 튼튼한 생명력을 유지하려면 본줄기를 이루는 금본옥간이 굳건하고 금지옥엽은 가늘어야 한다. 또한 자손만대 튼튼한 생명력을 유지하려면 자손만대 그래야 한다. 마찬가지로 왕실이 튼튼하려면 금복옥간인 왕세자가 굳건하고 금지옥엽인 왕세자의 형제자매가 가늘어야 한다.

조선왕조 500년에 걸쳐 32명의 왕세자가 있었는데, 이들은 이념적으로 왕의 적장자 즉 왕비의 큰아들이었다. 따라서 왕세자에게는 왕비 소생의 남자 동생들과 여자 형제들이 있었으며, 후궁 소생의 남자형제들과 여자형제들이 있었다. 왕세자의 남자형제들은 형제임과 동시에 잠재적인 왕위경쟁자이기도 했다. 왕세자에게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남자형제들이 그 다음 대상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왕세자의 남자형제들은 본인의 능력과 함께 처가의 위치에 따라 정치적 영향력이 달라졌다.

하지만 정치적인 면을 제외한다면 왕세자와 형제자매들은 동기간이었다. 이에 따라 왕세자와 형제자매들은 동기간의 우애를 누릴 수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조선시대 왕세자와 형제자매의 관계가 좋을지 아니면 나쁠지는 근본적으로 왕세자의 혈통과 자질여부에 달려 있었다. 왕세자가 명실상부하게 왕의 적장자이며 동시에 형제자매보다 현명하다면 왕세자의 지위는 확고하고 형제자매와의 관계도 원만할 수 있었다. 반면 왕세자가 적장자가 아닌 경우, 예컨대 적자이기는 하지만 큰아들이 아닌 둘째아들이거나 막내아들인 경우 또는 아예 적자도 아니고 서자인 경우에는 형제자매와 불편한 관계를 맺곤 했다. 설상가상으로 왕세자의 자질마저 부족하다면 왕세자와 형제자매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을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그 어떤 경우에도 곁가지가 본줄기를 해치는 일이 없도록 만들기 위해 다양한 제도가 마련되었다. 첫째는 적장자 계승원칙에 따라 왕세자를 이념적, 제도적으로 우대하는 유교적 예법이었다. 이 같은 유교 예법에 따라 왕세자는 왕으로부터 교명을 받을 뿐만 아니라 중국 황제로부터 고명(誥命)을 받았다.

효장세자가 청나라로부터 받은 고명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효장세자 책봉 때 청나라로부터 받은 예물단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둘째는 왕세자의 형제자매를 대상으로 왕실 봉작제를 시행함으로써 왕세자의 형제자매들을 정치적, 사회적으로 금고(禁錮)시켜 왕세자의 자리를 안정시키고자 했다. 왕실 봉작에 의해 왕비의 아들은 대군, 딸은 공주가 되었고 후궁의 아들은 군, 딸은 옹주가 되었다. 대군, 공주, 군, 옹주는 왕실 봉작제를 통해 최고의 명예와 경제적 부를 확보할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정치적, 사회적 활동은 금지되었던 것이다.

영조의 옹주인 화억옹주의 추증교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글, 사진 신명호. 현 부경대학교 사확과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및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역임, 현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 [조선왕비실록], [조선공주실록],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등을 집필하였다.
/ 신명호의 '조선왕실의 생활문화' 둘러보기
조선시대 유교 통치문화의 정수는 제도나 법규보다는 왕과 왕비의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내치와 외교로 대표되는 왕의 공식적인 삶은 조선시대 통치 문화였고, 왕과 왕비의 혼인, 장례, 제사 등은 당시 국가전례의 핵심이었다.
 왕과 왕비를 위한 궁궐, 왕릉, 종묘는 최고의 건축물이며, 이곳에서 시행되던 각종 의례, 무용, 음악 및 일상생활 등에는 당대의 문화역량이 종합되었다. 이 코너에서는 왕과 왕비의 삶의 과정이라는 구조 속에서 조선왕살의 생활문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작성자 : 신명호 | 등록일 : 2013-03-20 | 조회수 : 6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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