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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대성동29호분의 청동솥(銅?)과 기마민족설


김해 대성동29호분<br/>청동솥과 기마민족설


경남 김해는 금관가야의 오백년 도읍지이다. 곳곳에 가야 사람들이 남긴 유적이 즐비하며 특히 시조의 탄생설화가 깃든 구지봉에 오르면 금방이라도 수로왕을 추대하던 그 옛날 가야 사람들의 노랫가락이 들리는 듯하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내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일제시대 이래 많은 고고학자들은 금관가야의 왕릉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김해 그 어느 곳에서도 왕릉의 자취는 발견되지 않았다. 1990년 경성대학교 박물관은 수로왕릉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성동의 야트막한 구릉 정상부를 발굴하였다. 조사를 시작한지 1주일쯤 지났을까. 표토를 벗겨내자 그 속에서 길이 10여m에 가까운 무덤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조심스레 내부를 조사해본 바 ‘철의 왕국’ 무덤답게 쇠판을 두드려 만든 갑옷과 말갖춤(馬具), 덩이쇠(鐵鋌) 등 수 백점의 철기와 함께 각종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마침내 금관가야의 왕릉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김해 대성동 29호분 청동솥(왼)<br/>김해 대성동47호분 청동솥(오)


김해의 왕릉은 경주나 부여의 그것처럼 외부에 큰 봉분이 남아 있지 않았으며 땅을 깊이 파고 그 속에 널(棺)과 덧널(木槨)을 시설한 덧널무덤(木槨墓)이라는 구조였기에 가야가 신라에 멸망된 후 그 흔적마저 사라졌던 것이다.


조사된 왕릉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29호분이다. 이 무덤은 조사 전에 이미 도굴의 피해를 입었지만 수 십 점의 토기가 열을 이룬 채 부장되었고 관의 받침으로는 100여점에 가까운 쇠도끼(板狀鐵斧)를 깔았다. 당시 이러한 쇠도끼는 철기를 만드는데 사용되는 소재인 동시에 시장에서 화폐로도 사용되는 중요물품이었다.


그런데 무덤 한쪽 편에서 매우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유물 1점이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자세히 노출해본 결과 청동제 솥이었다. 입술 위쪽에 2개의 고리모양 손잡이가 솟았고 속에서는 3톨의 알밤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모양의 솥은 주로 중국 황하의 상류인 오르도스지역에 분포한다고 하여 ‘오르도스(ordos)형 동복’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흉노족 등 유목민족이 우유를 끓이던 그릇이다.


조사자는 이 청동솥의 형태가 부여의 중심지였던 길림성 북부 지역 출토품과 유사하다는 점, 29호분이 만들어지던 3세기말을 기점으로 하여 사람과 말을 순장하기 시작하고 무기를 구부려 부장하기도 하며 기마용 무기가 다량으로 출토되는 점을 주목하면서 이러한 북방 유물이 가야지역으로 이입된 것은 단순한 문화전파라기 보다는 주민이 이동한 결과라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부여가 선비족에 밀려 동쪽으로 이동하였을 때 그중 일부가 배를 타고 낙동강 하구에 들어와서 금관가야를 열었다는 파격적인 가설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1940년대 제기되어 최근까지 논쟁중인 에가미나미오(江上波夫)의 기마민족설과 상통하는 견해여서 학계에 큰 파장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기마민족이 어느 순간 말이 아닌 배를 타고 김해지역에 이주하였다는 가설은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기마민족은 항해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 몽고군은 강화도를 함락시키지 못하였고 2차에 걸친 일본정벌 역시 실패로 돌아간 사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또한 이 정도의 중요한 사건이라면 어떤 형태로든『삼국사기(三國史記)』등의 사서에 기록되었을 것이나 그렇지 못하며, 유사한 형태의 오르도스형 동복이 이미 서기 2세기대의 무덤인 김해 양동리 235호분에서도 출토되고 있어 이 견해는 앞으로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한상


글 사진 = 이한상 /현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났다. 부산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한국고대사 연구로 문학석사와 문학박사학위를, 일본 후쿠오카대학 인문과학연구과에서 고고학으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92년부터 2003년까지 국립공주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학예연구사 및 학예연구관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동양대학교 문화재발굴보존학과 교수를 거쳐 2007년부터는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주요저서로는『황금의 나라 신라』(2004, 김영사),『공예1-고분미술』(2006, 예경),『국가형성의 고고학』(2008,사회평론, 공저),『고고자료에서 찾은 고구려인의 삶과 문화』(2006, 고구려연구재단, 공저) 등이 있다.





 

작성자 : 한국문화재재단 | 등록일 : 2010-09-01 | 조회수 : 8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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