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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문화유산여행] 알쓸신잡 따라잡기 - 안동 (2)

도깨비와 함께하는 문화유산여행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알.쓸.신.잡이 시즌2로 돌아왔습니다.
1편에 이어 볼 것, 즐길 것 많은 경상북도 안동에 대해서
문화유산 전문채널, 문화유산채널과 함께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알쓸신잡 따라잡기



임진왜란하면 '난중일기'를 많이 떠올리지만, '난중일기'와 함께 잊어서는 안될 소중한 문화유산이 바로 류성룡이 기록한 '징비록'입니다.


 
류성룡 징비록을 기록하다



징비록은 조선 중기의 문신 유성룡이 임진왜란 동안에 경험한 사실을 기록한 책으로 임진왜란 전 한일 관계, 임진왜란이 일어난 상황,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상황, 타협점을 찾아가는 과정 등을 현장에 있던 정부 최고 책임자의 입장에서 쓴 회고록이라는 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럼 징비록의 자취를 찾아 떠나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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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우리 동네 문화재 -임진왜란 숨겨진 7년의 기록 '징비록' ━━━━━━━━━━━━━━━━━━━━━━━━━━━━━━━━━━━━━ MC김재원 이번에는 '내 고향 문화재'를 소개하는 코너인데요, 오늘 그 첫 시간으로 임혁필씨가 준비하셨다고요?~ 임혁필 네~ 그렇습니다. 두 분 '징비록'이라고 알고 계시죠~ MC김슬희 현재 화제가 되고 있는 kbs 대하사극이죠~ 김상중씨가 '징비록'을 쓴 유성룡 역할을 하고 있잖아요~ 임혁필 맞습니다. 국보 제 132호인 '징비록'이 바로, 오늘 소개할 문화재인데요, 유성룡은 왜! '징비록'을 썼는지, '징비록'은 어떻게 해서 문화재로 지정 됐는지, 그 숨겨진 뒷이야기들, 지금 만나보시죠~ VCR'코너. 내고향 문화재' ✔ 리포팅 임혁필 (원고 별도) ▶임진왜란 숨겨진 7년의 기록 MC김재원 저희가 흔히 임진왜란하면 '난중일기'를 가장 많이 떠올리게 되는데요, '징비록' 역시 잊어서는 안 될 우리의 소중한 유산 인 것 같습니다^^ 임혁필 네~ '징비록'은 역사의 과오를 꾸짖고 미래의 위기에 대비하는 지혜를 담아냈는데요, 비단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의 우리에게도 그 가치가 큰 것 같습니다^^ 앞으로 매주 금요일 '내 고향 문화재'에서는 더 많은 문화재들을 소개할 예정이니 기대해주세요~ KBS 6시-내고향 내고향 문화재 ?????????????????????????????????????????????????????????????????????????????????? 코너 타이틀 ?????????????????????????????????????????????????????????????????????????????????? #'징비록'하이라이트 na/ 최근 인기리에 방송 중인 KBS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대하드라마 '징비록'!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 동안 경험한 것을 기록한 책! 그 '징비록'을 찾아 출발합니다! #미션카드 받는 혁필 SOV. 잠깐, 이게 뭐야, 드라마 주인공을 찾아라~ 참~ 이것보세요. 프로그램 이름이 6시 내고향. 드라마 주인공은 연예가 중계에 가서 찾아야지~ tv안 보시나봐~ #걸어가는 na/ '징비록'이 아닌, 드라마 주인공을 찾아라?! 그래서! 일단 드라마 '징비록'의 촬영현장부터 찾아가 보는데요, 문경새재가 시원하게 펼쳐진 곳! #임혁필 돌아다니는/페스트 na/ 그런데! 넓어도 너~무 넓은 촬영장. 이리저리 헤맨 끝에 드디어 출입문을 찾았습니다! #광화문 앞 도착 SOV. 오~ 광화문이에요~광화문, 자~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촬영 현장/김상중 na/ 촬영 준비로 분주한 사람들~ 그런데 저, 저~기 이 분, 드라마 주인공 아닌가요? SOV. 선배님~ 필승.. 반갑습니다... 류성룡 선생님은 어떤 분이세요? #김상중 INT+류성룡 웹툰 인서트 서애 류성룡 선생님은 임진년, 선조시대 재상이십니다. 임금을 제외한 모든 관직을 거치셨죠.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 병조판서, 이조판서 그리고 임진왜란시 총사령관까지 하셨던 분. 바다에선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육지에선 류성룡 대감이 있었다. 그리고 사실은 이순신 장군이 바다에서 혁혁한 공을 세울 수 있도록 천거하신 분이 바로 류성룡 대감이시다. #어린시절 류성룡&이순신 na/ 류성룡 선생은 어린 시절, 이순신 장군의 형과 친구였는데요, 빼어난 안목으로 그의 인품을 일찌감치 알아챈 것입니다. #김상중 인터뷰 SOV. 안동 쪽으로 가면, 류성룡 선생에 대한 느낌, 류성룡 선생의 생가도 있고 류성룡 선생에 대한 체취를 많이 느낄 수 있을 겁니다. SOV. 혁필-제가 지금 류성룡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는 느낌이 들어요. 상중-제가 그렇게 빙의가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경상북도 안동시로 이동 CG na/ 류성룡 선생과 함께 드라마의 진짜 주인공, '징비록'을 찾아 경북 안동으로 출발~ #하회마을 전경 na/ 낙동강이 흐르는 하회마을! 풍산 류씨가 600여 년간 살아온 곳으로 2010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 관광객들이 끊이질 않는 곳인데요, #임혁필 걸어가는 SOV. 혁필-혹시 류성룡 선생님 아시죠? 관광객-뭐하시는 분이세요? 역사속의 인물인가? 혁필-뭐 하시는 분이시냐고요? 혹시 징비록 아세요? 관광객-진기록? 징비록? 아 징비록... 아. 드라마? 혁필-드라마긴 드라만데... 징비록 그 책에 대해 아세요? 관광객-잘 몰라요. 임진왜란 때 그거 아니예요? 그거 류성룡이 적은 거 아니에요? 혁필- 세분 중에 제일 똑똑하신... #하회마을 지도 앞 na/ 이곳에선 혹시 '징비록'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귀를 기울여 보는데요, #충효당 외경 na/ '징비록'이 류성룡 선생의 고택, 충효당에 있다는 소식을 입수! 충효당으로 향합니다! #충효당 함께 들어서는 na/ 정말로 이곳에 '징비록'이 있을까요?~ -내부 평생을 청빈하게 산 류성룡 선생. 이 곳 충효당은 원래 초가삼간이었다는데요~ 후대에 그 뜻을 기려 현재 모습으로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충효당 안 두 사람 SOV. 혁필-제가 사실 미션이 있거든요, 여기 징비록이 있나요? 이사장님-서애 선생이 저술한 이후, 후손이 종가에서 대대로 소중히 보관해 오다가 도난, 훼손 우려로 한국 국학진흥원에 보관되어 있다. 혁필-아니,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 없는 건가요? #한국국학진흥원 현판 #철 문 앞 혁필 SOV. 아니, 이건~한국은행 금고문 아닌가요? 이 문 두께 좀 봐~ na/ 역시~ 국보급 문화재답게 보안이 철저한데요, #보관 서랍 열리고 na/ 드디어! '징비록'의 원본이 -들고 걸어가는 공개되는 순간! #케이스 놓고 끈 푸는 na/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겹겹이 싸고 또 싸 놓은 '징비록'! 온도와 습도를 조절해 주는 오동나무 상자에 보관돼 있었는데요, #징비록 원본 na/ 긴 기다림 끝에, 마주한 '징비록'! 조선시대 유능한 재상이었던 류성룡 선생이 남긴 임진왜란 7년의 기록! 과연, 국보로 지정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SOV. 혁필-이게 어마어마한 거잖아요. 이렇게 중요한 게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설명 좀 해 주세요~ #한국국학진흥원 문학박사 인터뷰 SOV. 징비록에는 임진왜란 전 한일 관계, 임진왜란이 일어난 상황,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상황, 타협점을 찾아가는 과정 등을 현장에 있던 정부 최고 책임자의 입장에서 쓴 회고록. 실상에 대해 낮은 위치에서 보다 넓은 위치에서 넓은 안목으로 저술... 오히려 전쟁에 대한 인식이 객관적이고 정확하다는 것 때문에 국보로 지정 된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혁필-이 책에 유비무환의 정신이 깃들어 있네요. 정확한 남자예요. 오늘의 미션 징비록을 드디어 찾았습니다. 된 거죠? #미션완료 제스쳐 (현장음) ??징비록의 집필 장소를 찾아라! 서애 류성룡 선생께서 글 썼던 그 장소를 찾으라는 거 아니에요? #하회마을 전경 na/ 결국 다시 하회마을로 돌아가는데요, #골목길 걸어가며 SOV. 징비록은 찾았고, 이제 집필 장소를 찾아야 하는데 여기 집필 하는 곳 있네 #서예 체험장 SOV. 안녕하세요~ 제가 뭔가 알고 싶어서 왔거든요~징비록 집필 장소를 알고 계세요? 모르고 오셨어요? 강을 건너면 경치가 좋은 옥연정사가 있어요~ #강 위의 나룻배 na/ 하루 몇 번만 강을 오간다는 나룻배를 타기 위해 해가 지기 전에, 부랴부랴 달려가 봅니다. SOV. 옥연정사 가는 배 맞나요? 네 이거 타면 갈 수 있습니다. #나룻배 타고 건너는 na/ 유유히 흐르는 강물 뒤로 깎아지른 기암절벽~!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습니다. 저 절벽이 바로 ‘부용대’! 그~끝에 작은 정사가 있습니다. #옥연정사로 올라가는 na/ 이곳이 바로, 류성룡 선생이 '징비록'을 집필한 곳인데요, #내부S.K na/ 한적하고 고즈넉한 역사의 여운이 느껴지는 옥연정사! #문 보이고 na/ 임진왜란 후, 류성룡 선생은 파직 당한 신분으로, 이곳에 머물며 '징비록'을 집필했는데요, 왜! 썼는지는 책 서문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징비록 서문 –자막- na/ 후대에 다시는 임진왜란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애틋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웹툰 그리는 혁필 na/ 파직 후에도, 끝까지 책임감을 가졌던 서애 류성룡. 같은 자리에 앉아 글 대신 웹툰을 그려 보는데요~ #영모각 유물 na/ 자신의 임무를 다했던 류성룡 선생. 이곳에는 아직도 그의 정신과 체취가 담긴 유물들이 곳곳에 남아있었습니다. #임혁필 SOV.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니까 너무나 대단하신 분이고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이제 됐구나 끝낸 게 아니라 또 반성문을 쓰신 게... #그림 na/ '징비록'! 과거를 되돌아보고 다시는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용기’있는 기록이 아닐까요?... SOV. 내고향 문화재, 경북 안동의 국보 제132호 '징비록' 대단해요~! #징비록 클로징 이펙트 자막 가장 낮은 위치에서 남겨진 가장 값진 책임의 기록 '징비록' 경상북도 안동시 문화재, '징비록'을 찾아~ 오늘의 미션을 완료했습니다~!


 
서원 건축의 백미 병산서원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의 위패를 모시고 인재를 키워냈던 안동의 대표적인 사설 교육 기관입니다.
특히 병산서원은 서원 건축의 백미라 불리는데, 건물의 배치를 통해 병풍 속 그림처럼 주변의 풍광을 끌어들인 건축술은 놀라울 정도죠.

잡학박사님들이 감탄했던 만대루에서 보이는 풍경, 영상으로 감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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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산이 품고 강이 감싸다 병산서원 병산서원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풍산읍에 있던 ‘풍악서당’을 1572년 류성룡이 현재 위치로 옮긴 후 1863년 철종에게 병산서원으로 사액 받음 만대루 / 당나라 시인 두보의 백제성루 중 취병의만대(푸른 절벽은 늦게 대할 만하니)" 입교당 / 병산서원의 강학 공간 동재와 서재 / 병산서원 유생들의 기숙사 명성재, 경의재(敬義齋) / 원장이 기거하던 숙소와 교무실 존덕사 / 서애 류성룡과 그의 셋째 아들 류진을 배향



진분홍 백일홍이 매혹적인 여름날의 병산서원도 감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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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2010년 8월 1일, 안동 하회마을과 병산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되었다. 병산 서원은 조선의 유학자인 류성룡의 위패를 모시고 인재를 키워냈던 안동의 대표적인 사설 교육 기관이다. 특히 병산 서원은 서원 건축의 백미라 불리는데, 건물의 배치를 통해 병풍 속 그림처럼 주변의 풍광을 끌어들인 건축술은 놀랍기 그지없다. 진분홍 백일홍이 매혹적인 여름날의 병산 서원을 소개한다.


 
도산서원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년)에 지어진 서원으로, 퇴계선생이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도산서당과 퇴계선생 사후 그를 추존하기 위해 건립한 사당 및 서원으로 구성됩니다.
건물들은 검소하게 꾸며서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하고 있는데요

도산서원의 구석구석 함께 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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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선비 정신의 원형, 도산서원 도산서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1561년 퇴계 이황이 ‘도산서당’을 지어 제자들을 가르침 1574년 문인과 유림들에 의해 ‘도산서원’ 설립되고1575년 선조에게 도산서원 사액 받음 도산서당 / 퇴계 이황이 생전에 제자들을 가르쳤던 공간 농운정사 / 1561년 퇴계 이황이 제자들을 위해 지은 기숙사 ‘공부(工夫)한다’는 뜻의 工자형 배치 박약재, 홍의재 / 유생들의 기숙사 선조의 사액 현판으로 한석봉이 씀 상덕사(보물 제211호) /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퇴계 이황(1501~1570)과 수제자 월천 조목을 배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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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년)에 지어진 서원으로, 퇴계선생이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도산서당과 퇴계선생 사후 그를 추존하기 위해 건립한 사당 및 서원으로 구성된다. 민가(民家)처럼 간결하고 검소하게 지어진 서원 건물들은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반영하고 있다.



시대의 스승으로 손꼽히던 퇴계 이황. 하지만 이황에게는 유학자의 면모만 있는 것은 아니라 건축가의 면모가 숨어 있었는데요. 
건축가 이황이 자신의 건축학을 뽐낸 건물이 바로 도산서당입니다.
그런데 이황이 직접 설계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지시를 내리며 만든 도산서당의 규모가 왜 고작 3칸 건물이었을까요?
조선시대 가장 조촐하고 가장 기본이 되는 ‘3칸 건물’에 건축가 이황이 새겨놓은 정신은 무엇이었을까요?

퇴계 이황이 만든 도산서당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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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조선의 국학이자 국시였던 성리학을 완성했고 높은 벼슬자리보다는 평생 학문에 전념해 왔다.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업적을 남긴 대학자 퇴계 이황. 존경받는 스승으로, 시대의 현자로 알려졌던 퇴계 이황에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면모가 숨어 있었다. 140여 번이 넘는 관직 임명. 그중 일흔 아홉 번을 고사했던 선비. 스스로 지은 이름 ‘퇴계’처럼 평생 ‘물러남’을 희망하면서 살았던 이황은 쉰일곱이 되던 해,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고 후학을 양성하기로 결심했다. 고향 안동에 서당 자리를 마련한 이황은 틈만 나면 주변사람들에게 ‘만년의 기쁜 일’이라고 말하며 서당에 대한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임금의 간곡한 청을 거절하지 못한 이황은 이듬해 다시 벼슬길에 나가게 된다. 이황의 몸은 고향에서 한참 떨어진 서울에 있었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서당과 함께였다. 진행 상황을 계속 파악하고, 편지를 써서 적극적으로 공사를 이끌었다. 도산서당은 말 그대로 이황이 지은 건축물 이었다. 이황이 쓴 편지에는 건물의 방향은 물론 세세한 수치까지 남아 이황이 얼마나 꼼꼼하게 서당을 계획했는지 알 수 있다. 문 하나, 천장 한 켠, 마루 한 구석에서도 이황의 숨결을 읽어 낼 수 있는 곳이 바로 ‘도산서당’이었다. 그런데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만든 서당의 크기는 고작 세 칸이 전부였다.‘초가삼간’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사람이 살 수 있는 가장 작은 공간‘을 뜻하는 세 칸 건물. 퇴계 이황이란 명성에 걸맞지 않게 이토록 조촐한 건물이 완성된 까닭은 무엇일까? 도산서당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대문. 싸릿가지를 얼기설기 엮어 낮게 선 문에는‘그윽하고 곧다’는 뜻의‘유정문’이란 이름이 붙었다. 유정문은 세상과 바깥을 단절하는 다른 문들과는 다르다. 있는 듯 없는 듯, 아담한 크기 덕분에 좁은 세 칸짜리 서당 안에서도 탁 트인 세상을 볼 수 있다. 낮은 지붕, 짧은 처마도 마찬가지다. 서당의 다른 시설들도 세상을 향해 열려 있었다. 비록 세 칸 집이지만 작은 공간을 활짝 열어 세상 전체를 품을 수 있는 곳이 바로 도산서당이었다. 서당이 완성되자 이황은 곳곳에 이름을 붙였다. 앞마당 동쪽에 만든 연못의 이름은 정우당. 진흙 속에서 자라지만, 결코 더렵혀지지 않는 군자의 고고한 삶을 의미하는 이름이었다. 서당 근처의 작은 샘은 몽천이라 불렀다. 몽천은 개울물이 언젠가 바다에 이르듯 제자들을 수양시켜 큰 길로 이끌어야 하는 스승의 책임을 뜻한다. 정원에 대나무, 매화, 난초, 국화를 심어 절조 있는 친구들이라 부르곤 했다. 풀 한포기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이름을 지어주고 의미를 부여했던 이황. 유교가 윤리로써 세상을 교화시키듯 이황은 서당 주변을 유교적 이상이 살아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가장 단순한 3칸 건물이지만 각 칸의 크기가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도산서당은 쓰임과 용도에 따라 변형과 자유로움을 주었다. 난방을 위한 부엌은 가장 좁고 공부하는 공간 마루는 가장 넓다. 변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마루는 살평상을 달아 한 칸을 늘렸고 부엌은 뒤쪽으로 반 칸을 증축했다. 즉 3칸 같은 4.5칸이 완성 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같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도산서당은 ‘엄연한 3칸 집’이라는 점이다. 한 칸 늘어난 마루를 위한 지붕은 본체에 달려 있는 ‘임시지붕’일 뿐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3칸이 임시로 변형된 것이지 4칸은 아니란 뜻이다. 마루도 그렇다. 임시로 늘인 부분은 줄마루로 만들어져 뚜렷하게 구분된다. 가장 기본이 되는 세 칸 집. 하지만 이황에게 크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세 칸을 열어 우주를 담을 줄 알았으며, 기본은 지키면서 필요에 따라 변하고 변화 속에서 원칙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자 이황이 남긴 책 속에 그가 깨우친 철학적 사유가 담겨 있다면, 도산서당에는 원칙을 지키면서 실생활까지 고려한 이황의 ‘건축학개론’이 담겨있다.



큰 스승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난 뒤 제자들은 스승의 뜻을 잇고, 그 족적을 보호코자 서원 건립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도산서원을 세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죠. 도산계곡에는 스승이 손수 조성한 도산서당 건물이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황의 제자들은 ‘스승이 직접 만든 도산서당’과 ‘도산서원’을 어떤 방법으로 공존시킬 수 있었을까요?

이황 이후 명실상부 조선을 이끌어갔던 영남학파가 탄생한 공간 도산서원. 
그리운 스승 퇴계 이황을 기리며 도산서원을 설립해나간 제자들의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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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비석은 조선 역사상 단 하루뿐이었던 특별한 그날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1792년. 전국 팔도 칠천여명의 선비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한양이 아닌 곳에서 치러진 전무후무했던 과거시험,시험의 이름은 서원의 이름을 딴 ‘도산별과’였다. 무수히 많은 전국의 서원 중 왜 하필 도산서원이었을까? 어떤 서원도 범접할 수 없었던 도산서원의 역사와 명성을 만나본다. ------------ 타이틀 <스승을 향한 영원한 노래, 도산서원> ------------------- 이곳은 한 때 이 땅을 지배하던 모든 정치와 사상이 태어난 산실이었다. 도산과 낙동강변이 어우러지는 경건한 땅. 이곳에서는 영남학파라 불리며 명실상부 조선을 이끌어 온 수많은 선비들이 탄생했다. 위대한 스승, 이황은 세상을 떠났지만 제자들은 그 뜻을 계속 이어나가기로 했다. 1572년 이황의 위패를 모실 사당을 건립하기로 하고 서원 창건에 들어갔다. 하지만 스승을 기리기 위한 제자들의 계획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도산계곡에는 이미 스승이 손수 조성한 도산서당이 서 있었다. 스승이 정한 터를 떠나 새 터를 잡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스승이 만든 서당을 허물 수도 없는 상황. 과연 이황의 제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좀 보다가) 평범한 서원 배치처럼 보이지만,도산서원에는 서당의 옛 구성을 그대로 살리면서 서원으로 확대 개편하는 획기적인 해결책이 숨어 있었다. 도산서원 정문에는 조선건축에선 볼 수 없는 특별함이 있다. 서원 정문임에도 불구하고 문루가 서지 않았다. 만일 문루가 만들어졌다면, 제자들이 만든 서원 정문이 스승이 만든 도산서당을 내려다보게 된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아선 안 된다는 제자의 도리’를 건축으로 표현한 것. 그것이 바로 도산서당에 문루가 없는 까닭이다. ‘스승이 만든 옛 터전’을 지키고자 '새롭게 조성한 공간’에 소홀한 것도 아니었다. 두개의 공간을 하나의 서원 안에 공존시키기 위해 도산서원에는 두 개의 길이 나있다. 강당의 역할을 하는 전교당과 도서관으로 쓰던 장판각, 광명실은 모두 ‘수직길’에 서있다. 반면 수평 길이 시작되는 곳에 있는 것은 이황이 세운 도산서당이다. 도산서당에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황이 만든 또 다른 공간 농운정사 향하게 된다. 서원은 규모로 보나, 격으로 보나 서당보다 앞설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제자들은 도산서원을 만들 때 두 개의 길을 같은 비중으로 배치하면서 서당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이다. 수직길을 따라가다 보면 서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전교당이 등장한다. 조선에서 보기 드문 다섯 칸이 아닌 네 칸 건물. 전교당의 이상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서원의 강당이라면 으레 있어야 할 ‘원장실’이 없다 원장실로 쓰였을 자리에 대신 놓인 것은 어디론가 이어진 길이다. 길이 향하는 곳은 상덕사. 이황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공간이다. 원장실 대신‘이황의 위패로 가는 길’이 존재하는 서원. 이것이야 말로 도산서원의 영원한 원장은 퇴계 이황이라는 제자들의 마음일 것이다. 모든 부와 명성을 마다하고 고향 땅으로 돌아온 대학자 퇴계 이황. 혼탁한 세상을 바꾸고자 그가 선택한 방법은 성리학을 완성하고 후학을 키우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스승의 큰 뜻을 져버리지 않았다. 스승이 잡은 터에 선비들이 강학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그 뜻을 이어나갔다. 도산서원의 건립으로 스승의 꿈은 현실이 되었다.수많은 유생들이 배움의 길을 걷고자 도산서원을 찾았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학문에 매진했다. 서애 류성룡, 한강 정구, 고봉 기대승, 학봉 김성일...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이황의 선비들이 도산서원을 거쳐갔고, 이곳에서 나온 사상은 이후 조선을 지키는 근간이 됐다. 스승의 작은 손길 하나를 간직하면서 그 뜻을 받들고자 했던 제자들. 긴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도산서원에는 큰 스승 이황을 향한 제자들의 노래가 흐르고 있다.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고도 불리우는 안동은 한국의 유교문화와 함께 유무형의 민속적 전통이 공존한다는 독특한 특징을 가진 만큼 볼 것, 즐길 것이 많~은 곳입니다.

문화유산채널의 다양한 영상으로 안동의 독특함 먼저 눈으로 즐겨보세요.

작성자 : 정자경 | 등록일 : 2017-11-06 | 조회수 : 3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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