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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여행] 경주역사유적지구

도깨비와 함께하는 문화유산여행
첨성대 야경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 할 만큼 문화재 중심 도시, 경주! 천 년 왕국 신라의 역사가 고스란히 숨 쉬고 있지요. 현대 문명의 발전으로 모습이 많이 바뀌긴 했으나 경주는 여전히 천 년 도시의 흔적을 잘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주에 ‘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을 붙여 인류가 함께 보존해야 할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지요. 이번엔 저 첨성대가 서있는 경주역사유적지구로 떠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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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 ‘어른이 되어 다시 꼭 가보고 싶은 곳’으로 항상 손꼽히는 옛 신라의 수도 경주다. 임해전지(안압지), 첨성대, 신라의 왕릉 야경 등 경주 곳곳을 담았다. 특히 연회와 귀빈 접대장소로 사용된 신라 왕궁의 후원인 임해전지는 근래 조명 정비사업으로 낮뿐만 아니라 밤에도 아름다운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경주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등재된 문화재의 수는 총 52개이고, 이 문화재들이 분포한 구역은 유적의 성격에 따라 크게 5곳으로 구분됩니다. 불교 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 년 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고분군 분포 지역인 대능원지구, 신라 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 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나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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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신라인의 고결한 숨결
용장사곡 삼층석탑

경상북도 경주시
경주 남산 일원 (慶州 南山 一圓) 사적제311호
경주시 남쪽에 있는 산으로 수많은 석불,석탑이
산재해 있어 신라 문화의 보고라 불린다

남산 용장골에 바위 봉우리를 기단으로 삼아
그 위에 세운 3층 석탑이 있다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보물 제186호
몸돌과 지붕돌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고
처마는 직선이면서 귀퉁이가 경쾌하게 들려 있다
이 탑은 주변 자연과 잘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는
통일신라 후기 대표적인 3층석탑이다

자연과 하나된 탑을 보면서
신라인의 예술혼에 감탄하다

경주의 남쪽에 위치한 남산은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골짜기가 깊고 능선이 변화무쌍합니다. 산 전체가 ‘야외 박물관’이라고 불릴 만큼 불상과 탑, 석등, 연화대좌 등 수많은 불교 유적이 곳곳에서 발견됐지요. 산 전체를 기단부로 삼은 용장사지 삼층석탑, 바윗면을 그대로 이용한 마애불이 대표적입니다. 이 밖에도 신라 건국신화에 나타나는 ‘나정’을 비롯하여 신라의 천 년 역사를 마감하는 ‘포석정’도 있습니다. 신라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역사적 장소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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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통일신라시대, 별궁 안에 있던 것으로 신라 원지를 대표하는 유적, 안압지.
임해전을 비롯해, 여러 부속 건물과 정원이 있었던 안압지는 문무왕이 조성한 인공연못으로, 왕족들이 놀이를 즐기고, 사신을 접대하던 연회의 장소입니다.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어 그곳에 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지는 안압지...
못의 원래 이름은 안압지가 아닌 ‘월지’였습니다. 후에, 조선시대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었다 해서 ‘안압지’라 불리게 됐는데,
독특한건 안압지가 인공연못임에도 물이 흐르는 구조를 띠고 있다는 겁니다.
언제나 맑은 물이 흐르도록, 배수로를 만들어 두고, 호안의 형태를 굴곡지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높이의 차이를 두면, 실제보다 더 넓어 보이는 효과를 줍니다.
보통의 인공연못에서는 느낄 수 없는 탁 트인 전망을 가진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안압지가 군신들의 연회나 귀빈들의 접대장소로 이용되었다는 것은 출토된 유물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1975년, 준설을 겸한 발굴조사에서, 신라 때 축조되었던 안압지의 모습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안압지에서는 무려 서른 한 곳의 건물터가 발견됐고, 왕족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삼만 여점의 유물이 출토됐습니다.
이 중에, ‘주령구’라는 목제품이 있습니다.
나무로 만들어진 주령구은, 모두 열 네개의 면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주사위로, 각 면에는 각기 다른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술 석잔을 한 번에 마시기, 요즘 말로 단숨에 마신다는 원샷을 뜻하고,
팔을 구부려 다 마시기,러브샷을 뜻합니다.
또, 술잔을 비우고 크게 웃어야 하고, 여러사람 코를 때리라는 내용도 적혀있습니다.
간지러움을 태워도 가만히 있어야 하는걸 보면, 잔치 때 흥을 돋구는 놀이기구임이 분명한데,
여기엔 음악 없이 춤을 춰야 하는 내용도 적혀 있습니다.
안압지에서 주사위를 던지며 벌칙을 받았을 신라인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안압지에서는 그 규모만큼, 많은 유물이 나왔습니다. 연꽃무늬 수막새를 비롯해 출토된 유물 대부분, 신라왕족의 생활과 깊숙이 관련된 것들로, 이는 당시 왕실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금동연꽃 오리장식과 난간을 통해 당시의, 화려했던 안압지의 정원과 정자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여기에, 여인들이 사용했던 유물도 발견됐습니다. 청동거울과 비녀, 청동 빗과 반지는 이곳이 왕실의 자리였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줍니다.
통인신라시대 별궁 안에 있었던 연못, 안압지를 통해 당시 신라인이 외국과 교류를 활발히 펼쳐나갔던 사실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슴, 기러기, 낙타 등 희귀한 동물의 뼈가 발견됐는데, 이는 바다를 통해 수많은 나라와 문물을 교환했던 신라인의 교역망을 보여줍니다. 여기에는 신라인들의 뛰어난 항해술도 뒷받침되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원형 그대로 출토된 목선이 발견됐다는 겁니다. 길이 6미터에 달하는 목선은 통나무 배 중에서도 가장 발달된 형태로, 우리나라 최초의 목선입니다.
신라 귀족들이 배를 띄워, 유희를 즐겼을 안압지..
연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듯하지만, 굴곡져 아스라이 이어지는 풍경은 한정된 공간에 역동적인 효과를 더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넓은 바다를 연못에 담아내고자 했던 신라인.s. 안압지는 통일신라의 왕실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월성지구의 월성은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었습니다. 인공 연못인 안압지를 중심으로 첨성대일대가 편입되어 성의 규모가 확장됐습니다. 성의 동·서·북쪽은 흙과 돌로 쌓았으며, 남쪽은 절벽인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습니다. 계림과 첨성대 사이의 건물터와 성동동 전랑지의 대규모 건물터 등이 발굴되어 천 년 왕조 신라의 궁궐 규모와 위치가 속속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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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국립경주박물관.
고고관에 들어서자마자천마총 발굴 유물과 마주한다.
천년고도 신라의 흔적들이고스란히 전시돼 있는 공간.
화려한 신라 문화의 극치를 보여주는금관도 볼 수 있고,
희대의 발굴이라 할 만한 천마도장니는신라 최고의 회화 작품으로 손꼽힌다.
실크로드를 따라 신라 땅에 도착한 유리잔은영롱한 푸른빛이 아직도 살아있다.
5~6세기 신라 왕실의 삶을 엿볼 수 있는천마총.과연 그 비밀의 열쇠는 무엇일까.

천마총의 발굴은 6개월 동안 진행됐다.
장신구류 8,766점.무기류 1,234점, 마구류 504점.그릇류 226점 등모두 1만 1,5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된천마총.그야말로 세기의 발굴이었다.
화수분처럼 쏟아지는 유물들 중눈길을 끈 것은단연 금빛 찬란한 장신구였다.1,500년 전 사용했던 모습 그대로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나비모양의 관장식은 물론,
무덤의 부장품으로 엄청난 양의황금 제품을 사용했던 신라.
과연 그 숨은 이유는 무엇일까.
대릉원에 위치한 천마총.1973년 발굴 조사 이후무덤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돔 형태의 무덤을 빙 둘러당시 발굴된 유물 중 일부를전시하고 있는 천마총.
그중 금관이 있다.
신라 장인의 뛰어난 미적 감각이녹아있는 신라 금관.전 세계 고대 금관 중절반 이상이 신라의 것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오직신라 땅에서만 출토됐다.
특히 천마총 금관은신라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한 것.이는 당시 신라의 국력과 왕의 절대 권력을상징한다.
이외에도 천마총에서는새 날개 모양과 나비 모양의금관 장식품을 비롯해
모자, 귀걸이, 팔찌 등수많은 황금 장신구들이 발굴됐다.
이러한 황금 제품들은발굴된 신라 무덤마다적지 않은 수량이 출토됐다.
죽은 자의 무덤 위에서새롭게 이어가는 산 자의 권력을 나타내는국가의 상징물, 왕릉.(pause)이러한 권력의 상징은또 다른 유물에서도 엿볼 수 있다. 어떤 물건들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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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타이틀 2 : 실크로드 종착지는 신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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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총 발굴 6개월째.지금까지 신라에서 발견되지 않았던유리잔이 출토됐다.
(현장음 살리고)
높이 7.4cm의 작은 유리잔.
실크로드를 거쳐 신라로 들어온아름다운 유리 제품.1500년 전 신라가국제사회와 활발한 교류를 했다는 증거다.
5~6세기 신라의 다른 무덤에서도국제교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색적인 문양이 장식된 보검은페르시아와의 교류를 짐작케 한다.
이런 서역의 물건들은왕족 및 귀족에게귀한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먼 곳에서 온 희귀한 물건인 만큼위세품으로서의 가치가 상당했다.이는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반도 끝에 위치한 작은 나라, 신라.하지만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데주저하지 않았던 열린 국가였다.

경주 시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신라시대의 고분들을 모아 대능원지구라 합니다. 대능원이라 불리는 황남리고분군은 신라시대의 왕·왕비·귀족들의 능이 모여 있는 곳이죠. 여기엔 천마총, 황남대총, 전 미추왕릉을 비롯한 능 20여 기가 있지만, 무덤의 주인이 밝혀진 곳은 단 한 곳도 없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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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신라의 고도 경주에 들어서면 방문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현대식 건물이 하나 있다. 80미터 높이에 신라의 황룡사 9층 목탑을 형상화한 경주타워다.

신라의 사상과 예술, 과학이 결집돼 융성했던 신라문화의 정수를 보여줬던 황룡사 9층 목탑!

그러나 절터가 있던 자리는 지금은 텅빈 채, 커다란 돌 하나만 덩그마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돌은 무엇일까,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황룡사 9층 목탑이 감춰둔 이야기는 이 돌로부터 시작된다.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통일을 이루고자 염원했던 신라인들은 이곳에 황룡사를 짓고 9층 높이의 탑을 세웠다. 그러나 7만제곱미터의 드넓은 터에 남아 있는 것은 이 돌뿐, 그래서일까,

신라 제1의 사찰이라는 역사성때문에‘사적’으로 지정됐지만 어느샌가 마을이 들어서고 공터는 논과 밭이 돼버렸다.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했던 황룡사도, 황룡사의 보물이었던 9층 목탑도 그렇게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 조유전 INT (황룡사터 발굴 부단장/ 현 경기문화재연구원 원장)
조유전>> 남아있는 흔적이라는 것이 초석이라든지 담장 일부라든지 이런 것뿐이니까 관심의 대상이 안 되는 거죠.
더더군다나 방치되어 있는 넓은 땅이 있으니까 황룡사의 기둥이 있던 초석도 그것을 세워서 아주 한 뼘이라도 농사를 더 짓겠다고 그렇게 해서 날로 피해가 더해 갔죠.

삼국사기에 따르면 황룡사 9층목탑의 높이는 80미터, 이것은 아파트 25층 높이로 동양 최고의 목탑이다. 그런 곳이 나날이 훼손되고 있으니 목탑터만이라도 보존해야 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드디어 1964년, 정부는 목탑터를 재정비하기로 하고 민가의 담장을 헐어낸다. 그러자 나타난 커다란 돌덩이 하나, 사실 이 돌은 목탑을 지탱해주는 기둥받침돌인 심초석을 덮고 있던 뚜껑이었다

그리고 그 해 12월 어느 새벽,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다. 이 뚜껑돌이 도굴꾼의 표적이 된 것이다. 도굴꾼은 그 큰 돌을 공업용 ‘잭’ 하나로 손쉽게 들여 올렸다.

그러자 나타난 것이 부처님 사리함과 공양구 일체, 그날 1300년동안 잠들어 있던 9층목탑의 보물은 그렇게 도굴꾼과 함께 사라졌다.

# 조유전 INT
조유전>> 담장을 헐어버리니까 뭔지 모르지만 10톤 되는 초석위에
올려놓은 돌이 완전히 노출된거죠. 그러니까 도굴하는 사람이
그 안에 있던 사리를 몽땅 가지고 간 거죠.
그러니까 이게 통탄할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게 손을
안 댔어야 완벽하게 사리자체를 알 수가 있는데 도둑을 맞으니까
없어져 버렸잖아요.

결국 2년 뒤- 도굴범이 잡히면서 도굴범이 가져간 유물도 일부 회수됐다. 이때 되찾은 것이 4센티미터 가량의 청동합과 은제합 등, 사리 장식용품들-, 정작 중요한 사리와 사리병은 끝내 존재유무조차 알 수 없었다

# 조유전 INT
조유전>> 황룡사 사리는 가장 중요한 거죠. 사리를 장엄하기 위한
여러 가지 장엄구가 들어가는 거죠. 그게 어땠을까.. 하는 것이
누구가 관심이 가진거죠. 그런데 그게 사리가 도둑이 맞아버리니까
소위 말해서 팥소가 빠져 버린거죠.

1971년, 경주일대를 역사적 관광지로 만드는 계획이 발표되면서 황룡사터는 이제 공원부지로 결정된다. 공사전 실시된 조사는 사실 형식적인 것이었다. 이미 중요한 것은 도굴당했고, 무엇이 더 남아있으리라는 기대도 없었다.

# 조유전 INT
조유전>> 처음에는 한 3년 정도 계획을 세워서, 한 3년정도면 충분히 조사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발굴을 하게 되었는데, 웬 걸 첫 해에 보니까 그게 틀렸다는 걸 알았죠.

그런데 기초적인 시굴조사에서 황룡사가 알려진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건물 배치도 놀라울 정도로 웅장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발굴조사도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연이어 유물들이 쏟아졌다.

10센티미터의 반가사유상 얼굴과 금동여래입상, 청동거울과 바리, 금동제 풍탁과 청동풍경 등 무려 4만여점의 유물이 발견된 것이다.

발굴단을 놀라게 한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연꽃무늬가 새겨진 기와조각이 곳곳에서 발견된 것이다. 대체 이 기와조각은 어디에 쓰인 것이었을까,

이 기와조각들을 맞추는 데 걸린시간만 무려 5년,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은 2미터 높이의 치미였다. 치미란 지붕의 용마루 양 끝에 올리는 장식용 기와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큰 규모의 치미가 황룡사에서 발견된 것이다.

장식용 기와가 2미터라면 그 본체인 황룡사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규모였던 것일까,

발굴계획이 3년에서 8년으로 연장되면서 발굴단이 주목한 것이 심초석이었다. 심초석은 9층목탑의 기둥을 받쳐주던 돌이다. 문제는 30톤이나 되는 거대 심초석을 어떻게 들어 올릴 것인가였다

# 조유전 INT
조유전>> 만약에 들다가 금이 간다던지 소위 잘못해 가지고 깼다고 하면 누가 책임질 거예요. 역사 죄인이 되는 거지.. 그래서 그 당시에 70년대 소위 대한민국에 있는 최대로 들어올릴 수 있는 크레인이 몇 톤 크레인이냐. 백톤 크레인이었어요.

당시, 우리나라에 있던 백 톤급 크레인은 인천에 한 대, 부산에 두 대로, 총 세 대뿐! 거리상의 문제로 인천의 것은 애초부터 제외됐다. 그런데! 부산에 있는 크레인 두 대는 작업량이 많아 빌려줄 수 없다는 것. 속을 태우던 발굴단은 마침 인천에 있던 크레인이 포항에 와 있고 사용이 가능하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드디어 심초석을 들어올리는 날! 심초석의 무게에 안전까지 고려한다면 족히 50톤의 무게는 감당해야 할 터! 처음 있는 일이라 크레인기사도 발굴단도 애가 타는 심정이었다

마침내 심초석이 옮겨졌다. 그런데,
조유전>> 돌 몇 개 가지고 30톤 심초석의 수평을 맞춰 놓은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심초석에서 나온 유물보다도 그게.. 한 마디로 엉성 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그 때까지 손을 안 댄거죠. 우리가 최초로 64년 1300년만에 들은 거죠.

심초석은 돌 몇 개로 한 치의 기울어짐도 없이 정확한 수평을 유지한 채 놓여 있었다. 크레인으로도 힘든 작업을 그 옛날 신라인들은 어떻게 해결한 것일까.

심초석 바로 옆에서 나온 작은 백자 항아리는 또 어떤 용도였을까,

대체 황룡사 9층목탑은 신라인들에게 무엇이었던 것일까,

황룡사는 그 규모나 품격에서 명실공히 신라 제1의 사찰로, 신라의 세가지 보물중 두가지 보물이 황룡사에 있을 정도였다. 그 보물중의 하나가 황룡사 9층 목탑이다.선덕여왕은 왕권강화와 삼국통일을 염원하며 80미터 높이의 목탑을 세웠다. 아홉 개 탑의 각 층은 신라주변의 아홉 나라들이 신라를 섬긴다는 염원을 담고 있다

그렇게 신라인들의 구심점이 됐던 황룡사와 9층 목탑은 1238년,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면서 700년간 이어온 영화를 잃어버린다. 그리고 그 드넓은 터에 9층석탑의 심초석만이 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최근들어 황룡사 9층목탑을 복원하려는 노력들이 계속되면서 9층목탑의 위용이 드러나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3D 등, 첨단 컴퓨터 그래픽으로 탑을 형상화시키는 작업이다. 이 연구소는 몇 년째,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해 9층목탑의 설계도를 만드는 중이다

# 김영곤 INT
담당자>> 현존하는 자료는 황룡사터에 남아있는 심초석이나 주춧돌, 그리고 각종 문헌 기록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료들을 바탕으로 선행 연구자들이 진행한 자료들이 굉장히 많이 남아있고, 이 분들이 만든 도면을 기초로 해서 처음 작업을 시작한 게 된 겁니다.

고증의 자료는 다양하다. 경주 남산 부처바위에 새겨진 9층 목탑으로추정되는 탑그림이나 북한에 있는 목탑 형식의 9층탑도 참고가 됐다. 이 탑은 황룡사 9층목탑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양식으로 지어진 것이다 .

이처럼 다양한 자료들을 참고해 황룡사 9층목탑을 추측해보지만, 정확한 사료가 없는 마당에 아직은 그저 다 추정일뿐. 그 어느 것도 정답은 아니다.

# 김영곤 INT
담당자>> 복원은 실제로 타임머신을 타고 실제 그 시대로 가지 않는 이상 실제 그대로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김인호 선생님이라든지 김동현 선생님, 장기인 선생님이라든지.. 이런 여러 가지 안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렇기 이런 3차원 그래픽 작업을 통해서 가상으로 복원을 해 볼 수가 있고, 그리고 우리

황룡사지구는 신라의 유적의 정점을 찍는 곳이지요. 황룡사는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1238년)으로 불에 타 없어지고, 건물과 불상의 주춧돌들만이 남아있는 폐사입니다, 하지만 경주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면적은 대단하죠. 현재까지 조사된 황룡사지는 380,087제곱미터,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됐습니다. 규모로 보아 황룡사의 창건은 삼국 통일의 국가로써 신라의 저력과 위상이 집약된 국가 사업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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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프롤로그 + MC 오프닝 첫 부분]

#. 프롤로그 18초 신라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경주.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 곁에 남아있는 빛나는 문화유산이다.

#. 오프닝에서 소나무 길 걸어오는 MC 17초

경주의 남산. 신라인들이 광활한 영토를 굽어보며 영원한 불국토를 그리던 명산이다. ----------------------------------------------------------------------------------------------
VCR ① 산 전체가 보물, 경주 남산

#. 구름+산 전경 (보고)

#. 소나무 숲~ 발길 닫는 곳마다 보물이 있다. 그래서 남산을 지붕 없는 야외박물관이라고 한다. 남산이 품은 대표적인 보물은 불상이다.

#. 바위에 새긴 불상 (삼릉계곡 선각 육존불)
삼릉에서 냉골 골짜기를 따라 가다보면 널찍한 자연 암반에 새겨진 불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암반에 새겼지만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작품. 신라인들은 단단한 화강암에 부드러운 부처의 미소를 담았다. 자유로운 선이 돋보이는 ‘삼릉계곡 선각육존불’은 남산을 오르면 만날 수 있는 부처의 미소다.

#. 산 절벽에 있는 마애불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부처의 미소를 찾아 산을 오르다 보면 거대한 자연암벽에 놀라고, 암벽에 새겨진 불상에 또 한 번 놀라는 작품. 높이 6미터! 남산에 있는 불상 중 가장 큰 마애불상이다.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얼굴에서 중생을 보살피는 부처의 마음이 전해진다. 바위 절벽을 부처가 머무는 나라로 보고, 그곳에 불상을 새긴 간절한 불심.

#. 산 전경+핍 파고 신라인은 남산의 질 좋은 화강암으로 많은 불상과 탑을 만들었다.

#. (칠불암 마애불상군)
이 중, 국보로 지정된 불상도 있다.
절제된 얼굴표정과 유려한 선이 걸작인 칠불암 마애 석불상군이 대표적이다.
사면석의 각 면엔 비슷한 크기의 불좌상을 부조해 모두 일곱 구로 이루어져 있다.
중생을 껴안는 편안한 미소.

신라인이 꿈꿔왔던 부처의 모습이 여기에 있다.

#. 황지웅 인터뷰 (경주국립공원 자연환경해설사)
“(남산의 역사적, 문화적 의미) 유네스코 등재 세계문화유산. 지금까지 발견된 불상 119개, 절터 150여 군데. 지붕 없는 노천박물관이다.”

#. (산 풀샷) 경주 남산은, 산 속의 바위들이 부처와 보살로 바뀌어 불교의 성산이 되었다. 그리고 신라 천년, 그 융성했던 역사와 함께 했다.

#. (늠비봉 오층석탑) 늠비봉 봉우리에 세워진 오층석탑.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이 오층석탑은 남산 8경으로 꼽힌다. 바위산을 하층기단으로 삼고 자연석 위에 일층의 기단을 세운 후 5층의 탑을 조성했다.

백제식 석탑으로 멸망한 백제의 석공들이
통일신라 때 세웠다고 한다.

#. 산 풀샷~바위로 pan
불상을 통해 불국토를 이루고자 했던 신라인의 열정은 깎아 지르는 벼랑도 문제 삼지 않았다.

#.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신선암 마애보살 반가상은 삼면보관,
즉 보석으로 꾸민 관을 쓰고 있다. 풍만한 얼굴에, 지그시 감은 두 눈은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오른손으로 꽃을 잡고, 왼손을 가슴까지 들어 올려 설법하는 부처를 표현했는데, 마치 구름을 타고 앉은 듯 절벽에서 중생을 굽어보고 있다.

#. (열암곡 마애불) 2007년, 놀라운 작품이 하나 더 발견됐다.
열암곡에서 발견된 마애불은 놀랍게도 암반의 바닥과 부처의 얼굴이 불과 5센티미터 간격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5 센티미터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 불상들 몽타쥬 한 구비를 돌면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부처가 맞이하고 또 한 구비를 돌면 수많은 절터와 유적이 나타나는 곳.
자연과 예술이 조화를 이룬 경주 남산은 신라인의 불국토이자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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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② 신라인들의 풍류보고서 - 안압지

#. 건물 pan~ 연못 (30초)
안압지는 신라 문무왕 때 만들어졌다. 기록에 의하면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한다. 안압지엔 여러 건물들이 있었고, 호화로운 연못이 있었다. 그래서 왕족들이 놀이를 즐기고, 사신을 접대하던 연회장소기로 추정된다.
#. 연못 pan~연못 구조 타이트
본래 이름은 ‘월지’였다. 조선시대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었다해서 ‘안압지’라 불렸다.

안압지는 인공연못이지만 물이 흐르는 독특한 구조로 만들어졌다.

#. 류지명 (자연환경해설사) 인터뷰 “(안압지 구조의 특징)”

#. 건물 안압지가 연회장소로 이용된 건 출토 유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 출토 당시 사진 1975년, 발굴 조사에서,
신라 때 축조된 안압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서른 한 곳의 건물터가 발견됐고, 삼만 여점의 유물들이 출토됐다. 왕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들이었다.

#. 주령구 이 중에, ‘주령구’라는 목제품이 있다.
나무로 만들어진 주령구은, 모두 열 네 개의 면으로 이뤄져 있다.

-주령구 던지는 주사위 각 면엔 각기 다른 내용이 적혀 있다.
-자막) 삼잔일거 술 석 잔을 한 번에 마시기.
요즘 말로 단숨에 마신다는 원샷을 뜻하고,
-자막) 곡비즉진 팔을 구부려 다 마시기. 러브샷을 의미한다.
-자막) 음진대소 술잔을 비우고 크게 웃어야 하고,
-자막) 중인타비 여러 사람 코를 때리라는 내용도 적혀있다.
-자막) 농면공과 간지러움을 태워도 가만히 있어야 하고,
-자막) 금성작무 음악 없이 춤을 춰야 한다는 내용도 있다.
잔치 때 흥을 돋우는 놀이기구로 추정된다.

#. 연못 줌인 (보고) #. 기와 등 유물 출토된 유물들은 신라인들의 생활상을 전달하고 있다.
연꽃무늬 수막새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유물들은
신라 왕족의 생활과 깊이 관련있는 것들이다.
이는 당시 왕실의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오리장식~난간 금동연꽃 오리장식과 난간은 당시 화려했던 안압지의 정원과 정자의 일부다.

-거울, 비녀 등 여인들이 사용했던 유물도 발견됐다.
청동거울과 비녀, 청동 빗과 반지는 이곳이 왕실의 자리였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 꽃 외국과 활발히 교류했던 사실을 증언해주는 유물들도 발견됐다.

-동물 뼈들 사슴, 기러기, 낙타 등 희귀한 동물의 뼈가 발견됐는데, 바다를 통해 수많은 나라와 문물을 교환했던 흔적이다.

-목재, 목선 여기엔 신라인들의 뛰어난 항해술도 뒷받침했다. 가장 특별한 유물로 꼽히는 목선. 원형 그대로 출토됐다. 6미터 길이의 목선은 우리나라 최초의 목선이기도 하다.

#. 배 가는 신라의 왕족들이 배를 띄워, 유희를 즐겼을 연못. 굽이굽이 이어지는 물길은 연못 전체의 모습을 한눈에 보여주지 않고, 서서히 드러낸다.

한정된 공간에 역동적인 효과를 더해
연못에 넓은 바다를 담아내고자 했던 의도다.
안압지는 신라의 숨겨진 왕실과
호방한 풍류를 비추는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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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③ 분황사와 모전석탑

#. 일출+묘+분황사 탑 몽타쥬
서기 632년,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여성군주 시대가 열렸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여왕은 크고 강한 나라의 건설을 천명하며 자신과 꼭 닮은 절을 짓는다.

#. 석탑으로 pan 분황사는 선덕여왕의 원대한 꿈이 담긴 사찰이다.
그래서 이름도 ‘향기 나는 황제의 절’ 분황사다.
(나머지 보고)
#. 사찰 경내 F.S 서기 634년인 신라 선덕여왕 3년.
#. 모전석탑 S.K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려는 듯
여왕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절을 짓는다. 그리고 전에 없었던 독특한 탑을 쌓는다.

-탑 꼭대기 탑의 꼭대기까지 돌을 다듬어
연꽃장식을 만들 정도로, 사찰과 석탑을 향한 여왕의 애정은 대단했다.

-탑 Z.O 높이 9.3미터, 3층 탑인 분황사 모전석탑은 현재 남아 있는 신라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매우 독특한 양식이다.

-벽돌 타이트 우선, 재료부터 독자적이다.
언뜻 벽돌로 보이지만 자연석을 일일이 깎아 벽돌모양으로 다듬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하나 쌓아서 탑신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신라인들은 왜 신라최초의 석탑으로 이런 양식을 구상한 걸까.

#. 김명순 (지역환경해설사) 인터뷰
“신라 시대 이차돈 순교 후 불교공인되면서 목탑 많았다. 목탑은 화재발생 등으로 소실되기 쉬워. 목탑에서 석탑으로 건너가는 중간과정에 전탑을 세웠다.”

#. CG / 이동경로 이 석탑의 모태는 인도에서 시작돼 실크로드를 타고 인도, 중국을 거쳐 신라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선덕여왕은 분황사를 건립하면서
#. 경내 pan 중국에서 유학하고 온 승려들을 기용했는데,
이 유학파 승려들이 쌓은 탑이 모전석탑이다.

#. 탑으로 pan 당시 중국에선
흙으로 벽돌을 구워 탑을 쌓는 전탑이 유행했다. 모전석탑은 바로 그 전탑을 모방했는데, 벽돌을 구울 기술이 없던 신라는 흙으로 만든 벽돌 대신 돌을 다듬어 쓴 것이다.

덕분에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유일한 양식이 태어났다. 이 분황사 모전석탑은 신라최초의 석탑이자, 우리나라 모전석탑의 시초가 된다.

#. 기단 기단의 네 모퉁이엔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장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사자들이다.

-pan 물개모양 사자장
그런데 동해 쪽으로 고개를 든 두 마리 사자상은 사자라기보다 물개에 더 가까워보인다. 그래서 바다로부터 오는 왜적을 막기 위해 물개상을 세웠다는 해석도 있다. 이 모전석탑엔 금수의 왕 사자보다 더 무섭고 강력한 수호신들이 있다.

-탑에서 T.D 인왕상 탑 일층의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문의 양쪽에서 굳건하게 입구를 지키고 있는 인왕상이다.

-인왕상 얼굴 pan~주먹
보는 것만으로도 위협적인 표정에 금방이라도 내려칠 듯 불끈 쥔 주먹. 흔히 금강역사상이라고도 불리는 인왕상은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존재다. 대개는 사찰이나 불상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한다. 모전석탑에는 한 면에 두 구씩, 모두 8개의 인왕상이 세워져 있는데 그 표정과 모양이 각기 다르다.

#. 탑 T.D + CG (출토 유물들)
1915년, 모전석탑을 수리하던 중 돌로 된 사리장엄구가 발견됐다. 그 함 속에는 금바늘과 은바늘, 침통과 가위, 그리고 사리 다섯 알이 든 은상자가 들어있었다. 문 앞에 서있는 인왕상의 주 임무는

#. 산에서 감은사지로 pan
부처님의 사리와 장엄구를 지키는 일이었던 것이다. 모전석탑의 인왕상은 한반도 최초로 등장한 인왕상이고, 이후 통일신라시대를 거치며 독자적인 개성을 확립해 간다. 몸짓도 더 역동적이 되었으며, 얼굴 표정은 더욱 세밀해 졌다.

#. 불국사 + 석굴암 그리고 석굴암에 와서 그 절정을 이룬다. 분황사가 세워진 후 100여 년이 지난 751년, 석굴암이 탄생한다.

-본존불+인왕상 자연스러우면서도 숭고한 본존불상을 지키는 것이 두 구의 인왕상이다.
공격과 동시에 방어를 하는 역동적인 모습, 그러나 표정엔 악의가 없다. 바로 우리나라 인왕상 만의 고유한 특징이 나타난 것이다.

#. 분황사 모전석탑 경주 곳곳에
탑과 불상과 사찰을 남긴 신라인들. 그들은 더 크고 강력한 부처의 나라를 원했다. 부처의 땅이 현세에 구현되길 꿈꾸었다.

경주는 지리학적으로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입니다. 이 때문에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산성이 많이 지어졌답니다. 이들 산성이 오늘날 경주역사유적지구의 산성지구가 됐는데요. 산성 가운데서도 경주역사유적지구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경주의 동쪽에 자리 잡은 명활산(266m)에 쌓은 명활산성입니다. 경주 서쪽의 선도산성, 남쪽의 남산성과 더불어 당시 수도 경주를 방어하는 데 큰 구실을 했습니다.


천년 신라 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2,000년 역사를 지닌 경주의 역사성, 문화성은 도저히 복제될 수 없는 고유한 가치가 되었습니다. 경주역사유적지구에서 고대와 현대의 조화를 느껴보세요~!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16-12-23 | 조회수 : 4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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