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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문화유산여행] 차이나는 클라스 따라잡기 – 강인욱 교수님과 함께한 신라 고분의 미스터리 심화학습(#황남대총 #천마총 #삼국의_고분)

도깨비와 함께하는 문화유산여행
 


차이나는 클라스 80회에서는 우리나라의 유물과 유라시아 타국의 유물과 고분을 비교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4천 여 킬로미터가 넘게 떨어져 있는 먼 나라에서 발견된 유물과 우리나라의 유물이 아주 흡사하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웠던 건, 신라시대 고분이 알타이족의 고분과 비슷하고, 신라의 금관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발견된 금관과 비슷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이야기인 즉슨, 당시 선조들은 주변의 여러 나라와 아주 활발히 교류해왔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유라시아의 다른 나라에서도 배워 가고, 또 배워 왔던 문화들이 꼭꼭 숨어 있는 곳, 바로 고분! 그 중에서도 신라시대의 고분들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차이나는 클라스 따라잡기
#황남대총 #천마총 #삼국의 고분
길이 남을 희대의 발견 #황남대총
과연 누구의 무덤일까요? #천마총
고대 고분 심화학습, #삼국의 고분



먼저 황남대총입니다.

황남대총은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고분공원에 있는 신라시대의 고분입니다. 경주 시내 조금만 높은 곳에 올라가면 바로 보일 만큼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고분입니다. 이 황남대총의 발굴을 위해 지금의 천마총인 155호분을 먼저 시험 발굴하였을 정도입니다.


황남대총


황남대총은 남분과 북분이 연결된 쌍릉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봉토와 봉토의 기저부 주위에 쌓은 둘레들의 연접상태로 볼 때, 남분이 먼저 축조되었고 뒤에 북분이 남분에 잇닿아 축조되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여기에서는 금동관, 금은제 허리띠, 목걸이 등 역사 연구에 아주 중요한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고, 신라의 특유 무덤형식인 돌무지덧널무덤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북분에서 '부인대'가 출토된 것을 근거로 황남대총이 신라의 왕과 왕비의 무덤이라는 가설이 정설로 인정되어 왔지만, 최근에 이 고분이 초기 신라의 지배자였던 눌지마립간과 자비마립간의 무덤이라는 가설이 제기되며 큰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과연 어떤 사람의 무덤일지, 정말 궁금합니다. 이런 황남대총의 발굴 현장은 과연 어땠을까요? 그 생생한 현장을 영상으로 만나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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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그 무덤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더 먼 옛날어느때부턴가 그 무덤은 늘 경주사람들과 함께 그 자리에 있었다. 누구의 무덤일까, 왜 저렇게 크고 높은 것일까. 그저 단순하게 98호분이라고만 불렸던 무덤, 늘 경외와 신비감의 대상이었던 그 무덤이 1500년만에 열렸다. 그곳은 금밭이었다. 한국 고고학의 전기가 된 98호분 황남대총의 발굴, 그 현장이 펼쳐진다. 신라의 왕도, 경주 시내에서 조금만 높은 곳에 서면 어디서나 그 무덤이 보인다. 지금은 황남대총으로 불리는 98호분, 이 무덤의 발굴은 1970년대, 국가적 사업으로 출발했다. 이 무덤을 발굴하기 위해서 천마총을 시험 발굴 해 볼 정도였다.
최병현>> 발굴할 목적으로 1973년도에 가 보니까 그야말로 조그만 산이죠.
앞에서 보면 너무 어마어마하니까 질릴 정도로, 98호분은 특이하게 남분과 북분, 두 개의 무덤이 붙은 쌍분이다. 아파트 7층 높이의 규모앞에서 발굴단이 압도당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발굴은 먼저 북분부터 시작됐다. 그런데 23미터 높이의 봉분을 헐어내는 일이 문제였다. 마치 산 하나를 헐어내는 것처럼 엄청난 흙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간신히 봉토를 제거하자 이번에 나타난 것은 돌무지층, 98호분 역시 천마총처럼 봉토 아래 돌이 쌓여 있는, 적석목곽분이었다. 이제는 돌과의 싸움이었다. 돌을 걷어내기 위해서는 사람 손을 빌리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흙과 돌을 치우기 위해 한해동안 동원된 인원만 3천 5백명, 더 큰 문제는 안전사고였다. 작업자들이 돌에 부딪쳐서 다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하나하나가 처음 겪는 일이었고 뭔가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당시 발굴단 수장이었던 김정기 박사가 묘안을 떠올렸다.
최병현>> 당시 발굴단원 중에 한 분이 설계.. 원래 건축과 출신이면서 역사 공부를 하신 분인데, 아주 여러 가지 기계설계를 잘 하신 분이 계셨어요. 박지민 선생이라고.. 그 분한테 지시를 한 거 같아요. 사무실에 갔는데 이 분이 뭔가 길쭉한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발굴단원이 시험삼아 그려본 몇장의 스케치, 그리고 며칠뒤, 현장에 뭔가가 설치됐다. 당시로선 이름조차 생소한 컨베이어 벨트였다. 사람 손으로 일일이 나르지 말고 기계가 대신하게 할 수 없을까, 발굴단의 고심과 열정이 만들어낸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최병현>> 대기업에선 사용했을 지 모르지만 일반 중소기업정도에서는 분명히 없었을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컨베이어 벨트가 도입된 것은 시초일지도 모르겠어요. 발굴단에서 도입된 건 물론 시초입니다.
발굴단을 괴롭힌 또 하나는 무더위였다. 1973년 그해, 경주는 유난히 가물고 폭염이 계속됐다. 작업이 진척돼서 유물층 코앞까지 도달하면서 초조감이 커진 이유도 날씨와 관련이 있었다.
최병현>> 발굴 유물들은 바로 햇빛에 노출 시키면 아주 위험해요. 은으로 만든 제품 같은 것은 다 삭고 부식되어가지고 가루 상태가 되어 있어요. 가루 상태로.. 습기가 남아 있으면 자색이라고 형태가 남아있지만, 실제로는 그게 녹입니다. 녹... 가루 상태 녹으로만 남아있는데, 이게 노출 되어서 햇빛 비치고 건조되어 공기에 노출되면 안 보입니다. 날아가 버립니다. 이런 이유로 천마총 발굴 당시에는 햇빛 가림막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가림막 때문에 큰사고가 발생했었다.
윤근일>> 제대로 된 천막이 아니고 대들보로 가린 천막을 쳐 놨는데 바람이 부니까 이게 들리니까 인부가 하나 맞아서 병원에 실려나가고.. 그리고 대통령이 현장 방문한다고 그 직전에도 그랬단 말이죠.
최병현>> 그런 장면을 대통령한테 보여드릴 순 없는 일이고.. 몇 사람은 천막을 다시 세우고 몇 사람은 다시 엎고서 트랜지라고 해서 도랑에 파 놓은 게 있는데 대통령 반대편으로 이송하고 막.. 난리를 핀 적이 있죠.
만일 대통령 방문시에 이런 사고가 발생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아찔한 순간이었다. 또다시 긴급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봉분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것이 안정적인 건축구조를 갖춘 커다란 나무덧집, 덧집 덕분에 햇빛으로부터 유물을 보호하고 비가 와도 작업이 가능하게 됐다. 야간 작업도 가능해졌다. 발굴현장은 또 한번 진일보했다. 이제 드디어 유물을 만날 차례!
천년넘게 진흙층으로 다져진 판을 거둬내자, 흙속에서 계속해서 드러나는 황금빛, 기대는 했지만, 어마어마한 양의 금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1974년 10월, 고대하던 신라 금관이 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발굴을 시작한 지 1년 4개월만이었다. 금관은 천마총과 마찬가지로 시신의 머리부터 어깨부위에 걸쳐 살포시 덮혀 있었고 그 아래 가슴걸이와 금제 허리띠 역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부.인.대.’라는 글자가 또렷이 적힌 허리띠 장식, 무덤의 주인이 여자임을 알려주는 단서였다.
최병현>> 그 당시만 해도 자연스럽게 경주고분에서 나오는 금관은 왕관, 왕이 쓰는 관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어요. 황남대총 북분을 발굴해서 보니까 그 동안에 조사된 신라고분들이 재해석 되기 시작한 거죠.
신라 고분의 가치를 확인하게 해준 북분의 발굴, 이번엔 남분이다. 세상에 선을 보인 건, 은으로 만든 무기류, 화려한 장식이 많이 나온 북분과는 확연히 다른 상황이었다. 진득진득한 진흙 조사에 발굴도 더디게 진행될 무렵, 발굴단이 일순 숨을 멈췄다.사람의 치아가 붙어있는 아래턱뼈가 나타난 것이다. 1500년의 시공을 넘어 고대 신라인과 발굴단이 만나는 순간이었다. 조사결과 턱뼈의 주인공은 60세 전후의 남성, 그렇다면 신분이 왕일 가능성이 높고 당연히 금관도 나올 터였다.
최병현>> 이상하다.. 이상하다.. 이상합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여자분에서, 위에 있는 북분이 왕비인지 모르겠지만 여자가 금관을 썼으니까, 안 썼을 리가 없잖아요. 이상하다, 뭐 잘 못 봤다보다..
남분 발굴의 최대 관심사는 바로 금관의 유무였다. 남자 무덤인데 당연히 금관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그러나 나온 것은 산산히 부서진 금동관과 녹이 슨 은관뿐이었다.
최병현>> 엄청 놀랐고, 참 이상하게 마치 금관을 숨긴 것 모양으로.. 당연히 나와야 될 금관이 안 나오니까 마치 숨긴 것 처럼 됐는데, 그 다음날 아침 신문에 경주 금관 또 출토, 일면 톱으로 기사가 났더라고요.
결국 그 날의 기사는 오보로 밝혀졌지만, 그만큼 발굴은 마지막까지 온 국민의 관심사였다. 과열된 기자들의 취재열기에 발굴단은 브리핑 시간외엔 현장출입을 철저히 통제했다.
최병현>> 학계에서 사실 비판을 많이 했어요. 보고 싶은 다 보게 하고 일반 국민에게도 정보를 다 제공해야 되는데, 왜 비밀스럽게 하느냐. 마치 공개되지 않은 발굴은 도굴이나 똑같다고, 칼럼을 쓰기도 하고..
학계의 비판과 계속된 추측보도속에 발굴단은 브리핑 일정을 탄력적으로 조정하는 등 브리핑 제도를 하나하나 보완해 갔다. 출토 유물 7만여점, 언론과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속에 단일고분으로 최대 발굴이었던 98호분 발굴은 2년 4개월에 걸친 야심찬 작업을 마무리지었다. 98호분 대신 황남대총이라는 의젓한 이름도 얻었다.
학예사>> 황남대총 발굴 이후부터는 각 분야의 전공자에 대한 중요성이 인식되고, 이렇게 엄청난 유물과 엄청난 양의 유물이 나왔기 때문에 이를 국가적으로 보존처리를 해야 할 존재성도 부각이 되었습니다.
우리손, 우리 지식으로 발굴현장의 난제들을 돌파해 나가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던 황남대총 발굴, 작지만 야심에 찬 첫걸음이었다.


또 하나의 주인 모를 무덤, 천마총을 만날 차례입니다.


천마총


천마총도 황남대총과 마찬가지로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고분공원에 있습니다. 주인을 정확하게 알 수 없어서 무덤에서 출토된 천마도 장니의 이름을 따 천마총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지금은 신라의 제22대 왕인 지증왕의 무덤이라는 가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천마총은 황남대총의 발굴에 앞서 시험적으로 발굴했을 만큼 기대가 크지 않았던 고분이지만, 그 안에서 엄청난 유물들이 발견되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천마도 장니입니다. 국보 제207호인 천마도 장니는 말의 안장에 달아 늘어뜨리는 마구인 장니에 천마(天馬)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 그림이 천마가 아닌 기린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외에도 천마총에서는 금관, 목걸이, 팔찌 등 유물들이 발견되었습니다. 황남대총과 마찬가지로 돌무지덧널무덤 형식이었기 때문에 많은 유물들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영상을 통해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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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경주시 황남동에 위치한 대릉원. 사시사철 사람들의 발길이끊이지 않는다. 이곳은 신라시대의 왕과 왕비,귀족의 무덤 23기가 모여 있는 고분군. 여기에 천마총이 있다. 학계를 놀라게 할 만큼수많은 유물이 출토됐지만,누구의 무덤인지는 알 수 없는 천마총. 과연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천마총, 1500년만의 외출>
1973년 4월.신라 고분 155호의 발굴이 시작됐다. 도굴의 화를 전혀 입지 않은 거대한 무덤. 이곳에서만 1만 점이 넘는어마어마한 양의 유물이 쏟아졌다.1500년 만에 세상에 드러난신라시대의 진귀한 유물들.그야말로 희대의 발굴이었다. 하지만 영원토록 역사 속에 묻힐 뻔한155호 고분.과연 40년 전 그때 경주에서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55호 고분의 발굴은 시험용이었다?>
현재까지 겉으로 드러난 신라 고분은모두 155기. 하지만 기록과 묘지석이 존재하는고분을 제외하면주인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고분들 중에서가장 크고 오래된 98호 고분은1973년 당시 큰 관심 속에발굴을 기다리고 있었다.지금의 황남대총. 하지만 문제는산처럼 큰 신라 고분을 발굴한 경험이전혀 없었던 것. 그래서 98호 고분과 가까이 있고비교적 규모가 큰 155호 고분을시험용으로 먼저 발굴했다.순전히 경험을 쌓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발굴 3개월 째,흙더미 사이에서 금빛 유물이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바로 금관.1500년 만에 깊은 잠에서 깨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그동안 신라 유물에서 발견된 적이 없는신비로운 그림이 나타난 것.고대의 회화 수준을 엿볼 수 있는천마도장니였다.이 특별한 유물의 가치를 높이 사당시 155호라 불린 고분을지금의 천마총으로 명명한 것이다. 이런 놀라움도 잠시,뜻하지 않은 유물이 끝없이 출토됐다.바로 영롱한 푸른빛의 유리잔.어디서, 어떻게 신라 땅까지 왔는지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놀라운 유물들이 쏟아졌다. 수 세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완벽한 형태로 남은 유물들.과연 천마총에는 어떤 비밀이숨어 있는 것일까.
<신라 무덤은 도굴 안전지대였다?>
1973년 당시 천마총은온전한 외형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미 도굴에 노출됐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실제 천마총은누구도 손대지 않은 깨끗한 고분이었다. 천마총이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1500년 전 당시의 묘제에서찾아볼 수 있다. 현재 당시 발굴된 모습을그대로 공개하고 있는 천마총에서더 자세히 살필 수 있다. 먼저 지하에 무덤광을 파고상자형 나무덧널을 넣는다. 그런 다음 나무덧널을 강돌로 덮고그 위에 다시 두터운 봉토로 씌워완성하는 것. 즉 빈틈없이 메우는 방식이었다. 이는 천마총이침입자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던가장 큰 비밀이었다. 이러한 방식의 무덤 조영기술은5세기 후반에 집중됐고,지금의 경주지역에서만 볼 수 있다.그래서 신라의 왕이나 귀족을 위한특수 무덤으로 여겨지는 것. 지금 우리가 완벽한 형태의 신라 문화를엿볼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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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국립경주박물관. 고고관에 들어서자마자천마총 발굴 유물과 마주한다. 천년고도 신라의 흔적들이고스란히 전시돼 있는 공간. 화려한 신라 문화의 극치를 보여주는금관도 볼 수 있고, 희대의 발굴이라 할 만한 천마도장니는신라 최고의 회화 작품으로 손꼽힌다. 실크로드를 따라 신라 땅에 도착한 유리잔은영롱한 푸른빛이 아직도 살아있다.  6세기 신라 왕실의 삶을 엿볼 수 있는천마총.과연 그 비밀의 열쇠는 무엇일까. 천마총의 발굴은 6개월 동안 진행됐다. 장신구류 8,766점.무기류 1,234점, 마구류 504점.그릇류 226점 등모두 1만 1,5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된천마총.그야말로 세기의 발굴이었다. 화수분처럼 쏟아지는 유물들 중눈길을 끈 것은단연 금빛 찬란한 장신구였다.1,500년 전 사용했던 모습 그대로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나비모양의 관장식은 물론, 무덤의 부장품으로 엄청난 양의황금 제품을 사용했던 신라. 과연 그 숨은 이유는 무엇일까. 대릉원에 위치한 천마총.1973년 발굴 조사 이후무덤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돔 형태의 무덤을 빙 둘러당시 발굴된 유물 중 일부를전시하고 있는 천마총. 그중 금관이 있다. 신라 장인의 뛰어난 미적 감각이녹아있는 신라 금관.전 세계 고대 금관 중절반 이상이 신라의 것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오직신라 땅에서만 출토됐다. 특히 천마총 금관은신라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한 것.이는 당시 신라의 국력과 왕의 절대 권력을상징한다. 이외에도 천마총에서는새 날개 모양과 나비 모양의금관 장식품을 비롯해 모자, 귀걸이, 팔찌 등수많은 황금 장신구들이 발굴됐다. 이러한 황금 제품들은발굴된 신라 무덤마다적지 않은 수량이 출토됐다. 죽은 자의 무덤 위에서새롭게 이어가는 산 자의 권력을 나타내는국가의 상징물, 왕릉. 이러한 권력의 상징은또 다른 유물에서도 엿볼 수 있다. 어떤 물건들이 있을까.
< 실크로드 종착지는 신라였다?>
천마총 발굴 6개월째.지금까지 신라에서 발견되지 않았던유리잔이 출토됐다. 높이 7.4cm의 작은 유리잔. 실크로드를 거쳐 신라로 들어온아름다운 유리 제품.1500년 전 신라가국제사회와 활발한 교류를 했다는 증거다. 5~6세기 신라의 다른 무덤에서도국제교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색적인 문양이 장식된 보검은페르시아와의 교류를 짐작케 한다. 이런 서역의 물건들은왕족 및 귀족에게귀한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먼 곳에서 온 희귀한 물건인 만큼위세품으로서의 가치가 상당했다.이는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반도 끝에 위치한 작은 나라, 신라.하지만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데주저하지 않았던 열린 국가였다.


방금 보셨던 황남대총과 천마총 모두 돌무지덧널무덤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독무덤, 널무덤, 돌무지무덤 등 무덤 양식은 이 외에도 많이 존재합니다. 고분은 매우 보수적인 문화였기 때문에 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계통을 연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신라를 비롯한 고구려, 백제 삼국의 무덤 양식은 어떤지 알아볼까요? 큰별쌤 최태성 선생님이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주셨다고 하는데요! 함께 영상으로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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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안녕하세요! 큰별쌤 최태성입니다. 여러분 혹시 윤이상이라는 작곡가를 아시나요? 현대음악의 5대 거장이라 불리는 세계적인 작곡가입니다. 독일의 베를린예술대학교의 작곡과 교수였어요.그런데 윤이상이 남긴 많은 곡들 중에 ‘이마주(IMAGES)’라는 곡이 있습니다. 이 곡이 오늘의 주제와 관련이 있죠. 플루트와 오보에, 바이올린, 첼로의 4중주로 연주하는 이 곡은 어느 무덤의 벽화에서 영감을 얻은 곡입니다. 플루트는 청룡, 오보에는 백호, 바이올린은 현무, 그리고 첼로는 주작… 떠오르는 게 있나요? 바로 ‘사신도’입니다. 사신도가 오늘 강의와 어떤 관련이 있냐고요. 퀴즈를 보죠. 밑줄 친 무덤이 위치한 곳을 지도에서 옳게 찾은 것은? 1971년 도굴되지 않아 완전한 형태로 발굴된 이 무덤은 중국 남조 양식의 벽돌무덤이다. 왕과 왕비의 장신구와 금관 장식, 귀고리, 팔찌 등 3천여 점의 껴묻거리가 출토되어 당시 문화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지도에는 고대국가의 수도인 국내성, 평양, 한성, 웅진, 금성이 있네요. 답은 뭘까요? 오늘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고분에 대해 살펴볼게요. 고대 사회 왕이나 왕족을 모신 무덤은 보물창고나 다름없어요. 고구려 고분은 세계 문화유산으로도 선정되었어요. 삼국의 무덤 양식은 시대가 변화하면서 조금씩 달라지는데요, 고구려의 초기 무덤 양식은 돌무지무덤입니다. 돌을 잘라서 무더기로 쌓아서 만든 무덤이지요. 대표적인 것은 장군총입니다. 고구려 20대 왕인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능이죠. 당시 고구려 사람들이 이 무덤을 만들기 위해 쌓아 올린 장대석들은 모두 1,100여 개에 달한다고 해요. 그리고 무덤의 내부에는 채색의 흔적이 보이는데, 아마도 벽화가 있었던 것 같죠. 마치 피라미드처럼 커다란 돌을 높이 쌓아서 무덤을 만들던 고구려 사람들은 중국 한나라의 영향으로 무덤 속에 커다란 방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굴식돌방무덤이죠. 굴식돌방무덤에는 관을 모시는 석실이 있습니다. 방과 무덤 입구를 잇는 벽에는 벽화를 그렸고요. 4세기에 등장한 고구려 고분의 벽화는 고구려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계속 그려졌다니 대단합니다. 꼭 지하에 세운 궁전 같지 않나요? 그런데 입구가 있기 때문에 도굴이 쉽습니다. 고구려 무덤 하면 벽화 밖에 떠오르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죠. 유물은 전부 도둑맞고 벽화만 뎅그러니 남은 거예요. 벽화는 떼어갈 수가 없으니까요. 굴식돌방무덤은 모줄임천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모줄임천장은 기하학적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요, 사각형의 모서리를 잘라서 부피를 반으로 줄인다고 상상하세요. 머릿속에 그려지나요? 이런 식으로 위로 갈수록 모를 줄여나가요. 그러면 사각형과 마름모가 반복되는 프랙털 구조가 됩니다. 초기 고분에 그려진 벽화는 주로 풍속화였습니다. 무용총, 장군총, 각저총이 대표적이지요. 각저총의 벽화를 한 번 볼까요. 그림 속의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요? 씨름을 하고 있군요. 재미있는 것은 이 사람들의 얼굴 모습이에요. 코가 우리나라 사람의 코가 아니지요? 맞아요, 서양인입니다. 페르시아 쪽 사람이 와서 우리나라 사람과 씨름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한쪽은 고구려 사람이 맞고요. 서역과의 교류 사실을 보여주는 멋진 자료입니다. 사마르칸트로 갔던 고구려 사신, 아시나요? 풍속화를 그렸던 초기의 고분 벽화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림 내용도 바뀌는데요, 나중에는 사신도 그림이 그려집니다. 이 사신도는 평안도에 있는 강서대묘의 벽화입니다. 사신은 도교에서 유래된 방위신을 묘사한 거예요. 동쪽에서는 청룡이, 서쪽에서는 백호가, 남쪽에서는 주작이, 북쪽에서는 현무가 무덤을 지키고 있죠. 우리가 고분을 말할 때 가장 헷갈리는 게 ‘총’과 ‘능’인데요, 그 차이가 뭘까요? 총은 주인 미상인 무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누구의 무덤인지 분명히 알 수 없으니 발굴된 유물의 특징을 보는 거예요. 춤추는 사람이 그려져 있으면 무용총이라고 부르는 식이지요. 그런데 왜 누구의 무덤인지 분명히 알 수 없을까요. 우리나라 무덤 중에는 멀쩡한 게 없거든요. 도굴 때문입니다. 게다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의 무덤이란 무덤은 전부 파헤친 탓에 남아 있는 것이 없어요. 일본인들이 발굴한 유물은 대부분 일본으로 헐값에 팔려나갔습니다. 그래서 어떤 무덤에 어떤 유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요, 이때 입은 역사적인 손해는 실로 막심합니다. 백제의 무덤들도 마찬가지였어요. 백제에는 돌무지무덤인 석촌동 고분군이 있습니다. 원래는 89기의 무덤이 웅장하게 서 있었어요.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전부 파헤쳐졌어요. 지금은 8기만이 복원되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 중 하나는 굉장히 규모가 커요. 시기와 크기를 볼 때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추정되지만 역시나 확실하지는 않죠. 이 무덤은 장군총과 아주 비슷합니다. 이 역시 백제가 고구려와 같은 계통임을 보여줘요 원래 무덤 양식은 굉장히 보수적이에요. 조상을 모시는 것이니까 함부로 바꾸기가 쉽지 않지요. 고구려와 백제의 초기 무덤은 정확히 똑같아요. 고구려와 백제의 민족적 연결고리를 엿볼 수 있습니다. 백제의 무덤들 중에서 공주에 있는 송산리 고분은 7개의 무덤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이 중 6호분과 7호분은 벽돌무덤이고 나머지는 굴식돌방무덤입니다. 여기서 7호분이 바로 무령왕릉이에요. 당시 무령왕릉의 발견은 국내를 발칵 뒤흔들었었죠. 1971년 비가 많이 왔어요. 송산리 고분에서 무덤 안으로 물이 흘러들어가지 못하게 물길을 터야 했지요. 그래서 관리인 아저씨가 삽질을 하는데 삽이 안 들어가는 거예요. 뭔가에 깡, 깡 걸리는 거지요. 애써 흙을 치워보니 기왓장이 나온 거예요. 깜짝 놀란 관리인은 전화로 신고를 합니다. 이 소식에 나라 전역이 들썩였어요. 우선 국립박물관장이었던 김원룡 교수와 고고학자들이 급히 달려옵니다. 기자와 구경꾼들도 몰려들었고요. 처음으로 일제에 약탈당하거나 도굴되지 않은 무덤이 발견된 거니까요. 하늘이 준 기회지요. 드디어 발굴이 진행되던 날 먼저 위령제를 지낸 후에 입구를 막는 벽돌 하나를 들어내자 하얀 연기가 나왔다고 합니다. 마치 봉인을 해제한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컴컴한 통로를 따라간 곳에는 석판 하나가 놓여있었는데요, 이런 내용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 ‘사마’는 무령왕이 살아 있을 때의 이름! 그렇게 해서 무덤의 주인공이 백제의 제 25대 무령왕으로 밝혀진 거죠.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그때까지 발굴은 모두 일본인 손으로 이루어진 탓에 우리나라 고고학자들에게는 제대로 되 발굴 경험이 없었던 거예요. 어떻게 됐을까요? 무덤 내부가 공개되자 아수라장이 벌어집니다. 기자들은 특종을 찍으려고 몸싸움을 하고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소란을 틈타 유물에 눈독을 들이는 사람도 생겼고요.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발굴대원들도 마음이 급해집니다. 그래서 최소 1년에 걸려 차근차근 진행되었어야 하는 발굴작업이 단 하룻밤 만에 끝나버립니다. 유적 발굴은 그냥 부장품만 들고 나오는 게 아니에요. 현장이 어떠했는지 기록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발굴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당시 발굴 단장이었던 책임 교수는 회고담에서 무령왕릉 발굴을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실패라고 고백합니다. 무령왕릉 발굴에 참여했던 이들은 작은 사고에 시달리기도 했죠. 무령왕의 잠을 방해한 탓일까요? 좀 으스스하네요. 무령왕릉의 특징은 돌무지무덤도 아닌, 굴식돌방무덤도 아닌 벽돌로 만든 벽돌무덤이라는 겁니다. 고구려의 무덤양식이 돌무지무덤에서 굴식돌방무덤으로 바뀌었듯이 백제도 시간이 흘러가면서 굴식돌방무덤으로 바뀌었는데 여기에 새로운 무덤 형태가 추가된 거죠.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서 생겨난 게 벽돌무덤이고, 무령왕릉이 대표적인 벽돌무덤으로 남아있는 거죠. 아치형의 문, 그리고 빽빽한 벽. 백제의 25대 왕인 무령왕과 왕비가 묻혀있습니다. 백제의 고분은 밖에서 출입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어서 도굴 당하기 쉬운데,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은 무덤입니다. 무령왕이 사망한 523년부터 약 1400여 년 동안 고스란히 그 원형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5호분과 6호분 사이에 숨어 있고 봉분의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도굴꾼은 물론 일제강점기에도 발견되지 않은 거죠. 무령왕의 무덤에는 4,600점이나 되는 문화재가 고스란히 남아있었습니다. 금으로 만든 관장식이나 장신구, 거울과 그릇은 화려한 백제 문화를 보여줍니다. 이 중 금제관식과 금귀걸이, 금제 뒤꽂이 등 12종 17건이 국보로 지정됐죠. 무령왕릉은 당시 백제가 어떤 국가였는지
많은 것을 알려줘요. 우선 벽돌을 빽빽하게 쌓아 만든 양식은 중국 남조 양나라에서 유행하던 것이었고요, 무령왕과 왕비를 안장한 관은 일본에서만 나는 ‘금송’이라는 소나무로 만든 것이었죠. 이건 뭘 의미할까요? 무령왕 당시, 백제가 중국이나 일본과 교류를 할 정도로 외교력이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백제의 문화유산은 한성시기인지, 웅진시기인지, 사비시기인지 구분을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무령왕릉은 공주와 부여 중 어디로 가야 볼 수 있을까요? 무령왕은 성왕의 아버지입니다. 웅진 천도 이후의 왕이지요. 그러니까 당연히 공주로 가야 합니다. 이번에는 신라의 고분을 살펴볼게요. 신라의 고분은 고구려나 백제와는 다릅니다. 계통성이 이어지지 않거든요. 신라는 돌무지덧널무덤으로 고분을 만들었어요. 돌무지덧널무덤에서는 나무널과 껴묻거리 상자를 방에 모셔요. 껴묻거리 상자에는 수많은 부장품이 담기지요. 그 후 나무덧널 위에 돌무지를 쌓고 흙으로 덮어서 봉분을 만듭니다. 이것이 돌무지덧널무덤이에요. 이 돌무지덧널무덤을 앞에서 설명한 굴식돌방무덤하고 비교해 볼게요. 일단 돌무지덧널무덤에는 입구가 없습니다. 그러니 방과 입구를 잇는 통로도 존재하지 않지요. 벽화도 그리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돌무지덧널무덤으로는 천마총이 있어요. 천마총은 지증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어요. 천마총에는 관람객을 위한 입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천마총 발굴에는 어떤 사연이 숨어있어요. 무령왕릉이 발굴된 해에 경주에서도 신라 고분을 발굴하기로 결정했어요. 그런데 광복 이후에 한 번도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는 발굴 작업이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던 거예요. 천마총 옆에 황남대총이라는 쌍둥이 무덤이 있어요. 경주의 고분군에서 제일 큰 무덤이라 시선을 끌었지요. 무령왕릉에서 범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작은 무덤 하나를 테스트용으로 발굴해 보기로 했는데, 천마총이 샘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큰 기대 없이 발굴한 천마총에서 가치 있는 유물이 쏟아져 나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1만 1,500여 점에 이르는 유물 수도 대단하지만 신라시대의 화려하고 수준 높은 금관이 나왔거든요. 무엇보다 경주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천마도가 이목을 집중시켰죠. 여기에 그려져 있는 천마도는 벽화가 아니라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그림입니다. 사실 이게 말을 그린 것인지는 의문이에요. 적외선으로 찍어봤더니 전설 속 영물인 기린이랑 닮았거든요. 그러면 이제 기린총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다시 돌무지덧널무덤을 볼게요. 이 고분은 도굴할 방법이 없어요. 제아무리 도굴꾼이 감을 발휘하려고 해도 들어갈 입구가 없습니다. 흙은 다 파낸다 해도 돌무지는 어떻게 할 수 없잖아요. 사람의 힘으로는 치울 수가 없거든요. 도둑질하는 마당에 굴착기를 동원할 수도 없고요. 그래서 덧널 안에 있는 유물들이 온전한 거랍니다. 국보 188호로 지정된 금관이나 국보 88호로 지정된 금제허리띠처럼요. 덕분에 경주 역사의 비밀을 고스란히 남겨주었던 거지요. 폐쇄적이고 도굴이 불가능한 무덤 구조 덕분에 신라의 유물이 후대까지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박물관에 가면 신라의 유물을 유독 많이 볼 수 있게 된 배경이죠. 그런데 신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굴식돌방무덤으로 고분 양식을 바꿉니다. 고구려, 백제, 중국 같은 주변국과 교류하면서 더 세련된 모양으로 무덤을 짓고 싶었나 봐요. 이제 다시 퀴즈를 풀어볼까요. 밑줄 친 무덤이 위치한 곳을 지도에서 찾는 문제였죠. 1971년 완전한 형태로 발굴된 이 무덤은 중국 남조 양식의 벽돌무덤이다. 왕과 왕비의 장신구와 금관 장식, 귀고리, 팔찌 등 4,600여 점의 껴묻거리가 출토되어 당시 문화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어떤 무덤이에요? 벽돌로 쌓은 무덤은 무령왕릉이 잖아요. 그렇다면 무령왕릉은 어디에 있죠? 지도에는 국내성, 평양, 한성, 웅진, 금성이 있네요. 자, 무령왕릉의 비밀을 알고 싶어서 답사를 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우연히 발견됐는데, 입구에 있는 벽돌을 끄집어냈을 때 안에서 하얀 연기가 나왔다는 그 무령왕릉! 그 무령왕릉이 궁금해, 가보고 싶어! 어디고 가야할까요? 공주입니다, 공주. 공주는 웅진이죠? 정답은 4번입니다. 오늘은 삼국의 무덤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오래 전, 작곡가 윤이상이 강서대묘에서 사신도를 보고 받았을 감동이 이해가 되시나요? 강서대묘는 북한에 있어서 윤이상처럼 직접 가볼 수 없지만 경주나 공주에 있는 고분들은 꼭 한 번씩 직접 찾아가보기를 바라면서 오늘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작성자 : 전체관리자 | 등록일 : 2019-08-14 | 조회수 :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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