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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문화유산여행] 차이나는 클라스 따라잡기 – 신병주 교수님과 함께한 ‘조선의 탄핵 군주 1. 핏빛 독재자 연산’ 심화학습(#서오릉 #경회루 #처용무)

도깨비와 함께하는 문화유산여행
 


차이나는 클라스 85화에는 건국대학교 신병주 교수님이 찾아와주셨습니다. 신병주 교수님의 <조선의 탄핵 군주 1. 핏빛 독재자 연산> 모두 집중해서 들으셨나요? 우리나라의 폭군하면 연산군을 떠올릴 정도로 익숙한 인물이지만 이번 수업을 통해 연산군의 어린 시절부터 최후까지, 더욱 잘 알게 되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연산군과 주변인물들, 그리고 관련된 문화유산까지! 차이나는 클라스 85화의 심화학습을 시작해보겠습니다.
도깨비 문화유산이 뽑은 키워드는 #서오릉 #경회루 #처용무입니다! 하나하나 만나볼까요?


 
차이나는 클라스 따라잡기
#서오릉 #경회루 #처용무


첫 번째 키워드, 서오릉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 위치해있는 서오릉은 총 5개의 왕, 왕비릉이 모여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연산군의 할머니, 인수대비의 묘가 모셔져있습니다. 바로 경릉(敬陵)입니다. 경릉은 세조의 원자지만 일찍 세상을 떠 훗날 추존된 ‘덕종’과 그의 비 소혜왕후, 이후 인수대비가 되는 한씨의 능입니다.


서오릉 경릉

소혜왕후

의경세자(훗날 덕종)가 20세의 나이로 죽자 왕비가 되지 못했던 소혜왕후(훗날 인수대비)는 궁궐을 떠나 사가에서 12년을 보냈습니다. 이후 아들인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덕종 추존과 함께 대비의 칭호를 받으며 궁으로 돌아와 궁의 큰 어른으로써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하지만 손자인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인수대비의 며느리이자 연산군의 어머니였던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이 빌미가 되어 연산군과 인수대비의 사이는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유교적인 여성상을 강조했던 인수대비는 자유로웠던 폐비 윤씨가 맘에 들지 않았고, 결국 폐비와 사사를 허락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권력을 누렸지만 광폭해진 손자를 지켜보며 최후를 맞이해야 했던 인수대비의 무덤! 서오릉의 경릉, 칼럼으로 함께 만나보시겠습니다.

칼럼보러가기

두 번째 키워드, 경회루

조선 초 작은 연못의 누각에서 크게 중건된 경회루는 경복궁에서도 아름다운 건물로 손꼽히는 곳입니다. 연못 가운데 섬의 2층 누각의 풍류와 연못에서의 뱃놀이가 인상적인 경회루는 주로 국가의 경사를 축하하는 연회나 사신의 접대를 위한 장소로 쓰였습니다.


경회루

경회루


연산군은 이 곳을 쾌락과 유흥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연산군은 채흥사로 하여금 각 지방에서 선발한 미녀들을 운평(運平)부터 흥청(興淸)으로 분류하여 관리했다는 사실, 차이나는 클라스 85화를 주의깊게 보셨다면 다들 아는 사실이시겠지요? 연산군은 경회루의 1층을 비단 장막으로 가리고 흥청의 기예와 유흥을 즐겼습니다. 재물을 탕진할 정도로 마구 즐긴다는 의미의 '흥청망청'이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연산군의 유흥과 음행을 지켜본 아름다운 경회루의 비밀! 영상으로 함께 만나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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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국가의 공식적인 연회장소인 경회루... 어느날... 집현전에서 공부하던 말단관리 구종직은, 멀리서 경회루를 바라보다... 그 안에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은 떨치지 못한다. 임금의 초대 없인 넘볼 수 없는 경회루에, 몰래 들어간 구종직... 그 아름다움에 그만 감탄하고 만다.  그런데 때마침, 경회루를 산책하던 세종임금과 마주치게 된다.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세종은 뜻밖에도, 경전을 외워보라 했고, 구종직은 그 자리에서 춘추를 막힘없이 술술 외웠다 한다. 경회루에 몰래 들어 온 죄로 벌을 받는 대신, 임금의 칭찬을 받고, 더 높은 벼슬을 받게 된 것이다. 그 아름다운 모습에 선비도 넋을 잃었다는 경회루! 경복궁의 꽃, 경회루를 둘러본다.
< 경복궁의 꽃, 경회루 >
 경회루는  궁중연회를 베풀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나라의 공식적인 연회장소였다.  근정전, 종묘 정전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목조건물인 경회루는   우리나라 누각 중 가장 규모가 크다. 마흔 여덟 개의 육중한 돌기둥 위에누마루를 수평으로 깔고, 장엄한 팔작지붕을 씌운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경회루는 우리나라 건물 중 잡상이 가장 많다. 추녀마루에, 열한 개나 자리하고 있다..  경회루는 당대 최고의 토목건축가인, 노비 출신의 박자청이... 태종의 명을 받아 8개월 만에 완성한 대역사다. 이층 누마루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인왕산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연못 풍경이 펼쳐진다. 넓은 연못에서는 뱃놀이를 즐겼다.  동으로는  교태전, 강녕전, 사정전, 근정전에 이르는구중궁궐의 아름다운 경관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경회루를 가장 많이 방문하고 이용한 임금은 세종이었다. 가뭄에는 기우제를 올렸고,무과 시험을 주재했으며 무사들의 활쏘기 시범도 이곳에서 관람했다. 왕들은 경회루에서 외국 사신을 맞이하고종친과 신하들을 위한 연회를 자주 베풀었다. 경회루는 세종의 손자, 단종이...자신을 옥죄어오던 숙부,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넘겨준 곳이기도 하다. 세조는 특히 활쏘기를 좋아해 연못 너머에 과녁을 설치한 후 경회루에서 활을 쏘았는데, 화살이 연못에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 한다. 연산군에게 경회루는 쾌락의 공간이었다.연못 서쪽에 만세산이라는 인공섬을 만들고 경회루 아래층에는 비단 장막을 치고 전국에서 뽑아 올린 기생들에게  춤과 노래를 하게 했다. 이중 특별히 선발된 기생을 ‘흥청’이라 했는데 연산군은 황룡주에 흥청을 태우고 연꽃 사이를 누비며  패덕한 생활을 일삼았다.  재물을 마구 써버린다는 ‘흥청망청’이 바로 여기서 나온 말이다. 경회루 못에는 크고 작은 세 개의 인공 섬이 있다.두 개의... 네모난 작은 섬에는   소나무가 심어져 있다.그 중 가장 큰 섬 위에... 경회루가 자리한다.  못에 비친 그림자가 특히 아름답기로 유명한 경회루.  여기에는 특별한 과학이 숨어있다. 북악산에서 흘러들어온 물이  연못 전체를 순환하게 되어 있어   항상 맑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경회루로 들어오는 물줄기는 세 곳이 있다. 하나는 북쪽 호안에 조각된 용머리로, 그 입을 통해 물이 들어온다. 동쪽 돌다리 밑으로도 또 다른 물줄기가 흘러들어온다.. 북쪽 연못 바닥에서도  지하수가 솟아 나온다. 못의 바닥이 약간 기울어져 있어, 강제순환 장치 없이도 연못을 맑고, 잔잔한 상태로 유지시켜 준다.  외국 사신을 맞이하고 국가의 여러 행사를 거행한 공식적인 연회장소, 경회루! 주변경관과 조화를 이룬 그 아름다운 자태는..가히 경복궁의 꽃이라 할 만한다.  


세 번째 키워드, 처용무

폭군 연산군군이 사실 예술가 타입이었다는 이야기,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차이나는 클라스 85회에서도 신병주 교수님께서 연산군이 특히 춤에 능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연산군이 잘 추었던 춤은 '처용무'로 악귀를 몰아내고 구복을 기원하는 궁중 무용입니다! 처용무는 신라시대 역신을 쫓아내기 위해 처용이 추었다는 춤에서 비롯하였습니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새해 맞이 섣달 그믐 행사를 비록한 다양한 궁중 의식에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기사경회첩 중 처용무
 
처용무


연산군이 훌륭하게 추었다는 처용무는 현재 국가무형문화재 제39호이자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어있습니다! 처용무의 아름다움을 영상으로 한 번 만나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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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궁에서는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에 악귀를 몰아내고 왕실의 평화를 기원하는 새해맞이 행사로 처용무를 추었다. 다섯 사람이 처용의 탈을 쓰고 다섯 방향을 상징하는 색깔의 옷을 입고 추는 춤으로 오방처용무라 이르기도 한다. 다채롭고 화려한 색상의 의상이 부드럽고 인자한 모습의 가면과 조화를 이루어 궁중무용의 화려함과 여유를 보여주는 처용무. 음양오행의 원리를 담고 있는 처용무를 만나본다. 처용무란 처용 가면을 쓰고 추는 춤으로 처용설화에서 유래됐다 전해진다. 삼국유사에 이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라는 사람의 아내가 무척 아름다웠는데, 역신마저 흠모해 사람으로 변하여 남몰래 처용의 아내와 동침을 하였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두 사람이 누워있는 것을 보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자 역신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 뒤 물러났다고 한다. 이때, 처용이 악귀를 쫓기 위해 만든 노래가‘처용가’이고, 덩실덩실 추었던 춤이 ‘처용무’라 전해진다.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처용무는 악귀를 몰아내는 의식을 넘어 궁중 잔치에도 곧잘 등장하는 대표적인 궁중 무용으로 정착되었다. 처용무는 궁중에서 추는 춤으로는 유일하게 사람 형상의 가면을 쓰고 추는 춤이다. 처용탈이 팥죽색을 띠는 이유는 악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와 관계가 깊다. 탈에 사모를 쓰고 좌우에 모란꽃을 꽂고 가운데 복숭아 열매를 장식하는데, 복숭아는 잡귀를 쫒기 위한 것이고, 모란꽃은 재물을 불러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신라 때는 한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1인 처용무였다고 한다. 조선 초기 성현의 [용재총화]에 따르면 “처음에는 한 사람이 검은 장삼에 머리에는 사모를 쓰고 춤을 추었다. 그 후에 오방처용무로 변하였고 세종이 복잡한 내용과 노래의 가사를 고치고 이름을 봉황음이라 하고 궁정악으로 삼았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성종 때에는 더욱 발전해 궁중 의식에 사용되었다. <악학궤범>에 의하면 섣달 그믐날 전도와 후도 두 차례에 걸쳐 처용무를 추었는데 전도에서는 의식무용으로 오방처용무만 추고 후도에서는 학무와 연화대무와 합설해 무용극 형식으로 공연되었다. 화려하고 장엄한 무용으로 발전된 처용무는 나례의식은 물론 각종 연회, 중국 사신접대 등 다양한 궁중 의식에 연희되었다. 처용무는 처용탈을 쓴 다섯 명의 처용이 중앙으로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이때 수제천 음악이 연주된다. 다섯 사람이 두 팔을 허리에 붙이고청색 처용부터 홍색, 황색, 흑색, 백색 처용 순서로 등장한다. 나란히 선 다섯 처용은 모두 북쪽인 관객석을 바라보고 처용가를 노래한다. 노래를 마치면 앞을 향하여 절을 하는데 이를 ‘전배’라 한다. 전배가 끝난 후 중앙에 서 있는 노란 옷의 처용을 중심으로 푸른 옷과 붉은 옷, 검은 옷과 흰 옷의 처용이 서로 마주 보고 인사한 후 관객 쪽을 바라보고, 다시 등을 대고 선다. 이 과정이 끝나면 모두 관객 쪽을 향해 돌아선다. 서로 덕을 칭송하는 과정이다. 다섯 처용이 5방위의 각 자리에 서서 추는‘사우작대무’는 역신으로부터 사방을 지키려 한 처용의 모습을 춤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다섯 색깔의 옷은 오방위를 나타내는데 중앙을 의미하는 노란 옷의 처용을 중심으로, 동쪽엔 파란색, 서쪽엔 흰색, 남쪽엔 붉은색, 북쪽엔 검은 옷을 입은 처용이 선다. 가운데 서 있는 노란 옷의 처용은 제자리에서 조금씩 돌고, 사방의 처용들이 왼 쪽으로 원을 만들며 돈다.‘오방작화무’에서는 중앙의 황색 처용이 흑색 처용, 청색 처용, 홍색 처용, 백색 처용의 순서로 가까이 다가갔다가 마주 돌아서서 제자리로 돌아간다. 사방의 네 처용과 개별적인 맞춤을 벌이는 것으로, 시간의 변화인 동지, 춘분, 하지, 추분의 사계절의 시점과 순환을 의미한다. 이 부분이 처용무의 절정을 이룬다.이어 일렬로 북쪽인 관객 쪽을 바라보고 처용가를 노래한다. 마지막으로 낙화유수의 춤사위, 즉 두 팔을 양쪽 어깨로 들었다가 뿌리는 동작을 하면서 한 사람씩 퇴장한다. 신라시대부터 천년 넘는 시간을 끊이지 않고 전해 내려온 처용무. 사람들은 다섯 빛깔의 처용이 나와 춤을 추면 온갖 사악한 기운이 물러가고 기쁘고 경사스러운 일이 생긴다고 믿었다.


연산군과 관련된 문화유산, 함께 알아보았는데 어떠셨나요? 아픈 과거를 거울 삼아 앞으로 나아간다는 '반면교사'를 잊지 않으면서 서오릉과 경회루 그리고 연산군의 유배지인 교동도까지 함께 찾아가보시는 건 어떨까요?



 

작성자 : 전체관리자 | 등록일 : 2019-08-12 | 조회수 :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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