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뛰기링크

문화유산채널

영상공모전

주메뉴 시작

메뉴 열기, 닫기
검색어 입력

여행기

홈 문화유산뉴스 여행기

인쇄 공유

[도깨비 문화유산여행] 어쩌다 어른 따라잡기 - 죽음에 관하여 (#정종, #단종, #사도세자)

도깨비와 함께하는 문화유산여행
 


<어쩌다 어른> 146회에서는 의문스러운 죽음에 관한 사연부터 죽음을 선택할 권리까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각각의 죽음에는 안타까운 사연은 물론 숭고한 희생의 이야기까지 담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심화학습에서는 조선시대 사연 있는 왕과 왕족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문화유산채널에서 선정한 문화유산 키워드는 총 세 가지, '정종', '단종' 그리고 '사도세자'입니다.

 
어쩌다 어른 따라잡기
#정종 #단종 #사도제사

그럼, 조선의 제2대 왕 정종부터 만나보겠습니다.

정종


정종은 조선의 개국 공신이었습니다. 왕자의 난 이후 태조의 양위를 물려받아 제2대 조선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종은 왕의 자리에만 앉아있었을 뿐 실질적인 권력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실권을 잡고 있던 건 동생인 정안군, 즉 이방원이었기 때문입니다. 거듭된 왕자의 난으로 힘을 키운 이방원은 틈틈이 왕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정종은 정무보다는 오락에 빠져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정종 이방원


결국 2년 만에 정권을 내려놓으며 정종은 상왕으로 물러납니다. 그 후에는 사냥이나 여행을 즐기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과연 편안한 삶을 살았을지는 의문이 듭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2년 만에 왕의 자리를 내주어야 했을까요? 우리의 이해를 도와줄 영상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대본보기
프로그램 동영상 소스코드 정보
대본보기

na>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신진 사대부의 지지로 왕위에 오른 이성계! 조선 개국을 끝까지 반대한 정몽주를 제거한 아들, 그리고 조선의 기틀을 마련한 정도전이 있어 새 왕조의 꿈은 실현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 태조 7년...
정도전> 새 술은 새 부대·태조 7년 (1398년) 8월 25일 내 조선의 개국으로 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거늘. 망나니 같은 다섯째 왕자 이방원이 내 집에 군사를 보내니 어찌 이런 망극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오.
na> 이 나라 조선이 누구 덕에 만들어 졌는데... 성정이 과격한 이방원이 급기야 내 집에
군사를 보내 나를 위협하는 구나...어찌 이런 망극한 일이~
이숙번> 삼봉이 자처한 일임을 왜 모르시오
조영무> 자업자득이오
민무구> 쯔쯔쯔
이방원> 욕망왕자·태조 7년 (1398) 정도전과 남은 등이 나와 내 형제들을 제거 하려 해서
약자인 내가 선수를 쳤을 뿐이니 나를 원망 마시오.
na> 나 이방원, 엄연히 새 왕조의 왕자인데 정도전이 이 나라 왕자들을 제거하려해서 내가 먼저 선수 쳤을 뿐이오~ 대신과 백성들은 오해 마시길 바라오~
자막> 조선 건국의 동지, 이방원과 정도전 둘 사이에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na> 10조선 건국에 뜻을 함께 했던 이방원과 정도전, 신하와 왕의 아들 사이에 벌어진 갈등,
이들 사이에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정도전> 왕권보다 신권·태조1년(1391) 지금의 개경은 새 왕조의 수도로 적합하지 않으니
한양으로 옮겨야 하오
na> 새 나라에 맞는 새 수도는 한양이오~ 한양천도, 정치 제도, 법식 등에 이르기까지 조선 건국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온 정도전
정도전> 왕권보다 신권·태조1년(1391) 요순시대처럼 임금과 신하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왕도 정치, 백성을 위한 민본정치를 이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민심을 잘 알고 있는 자를 재상 즉 임금을 돕고 모든 관원을 지휘하고 감독하는 일을 맡아보는 총책임자에게 정치를 맡겨야 합니다.
이성계> 새나라 새임금 : 절대 동감이오.
na> 새 나라는 임금과 신하의 조화가 필요하고 이를 바탕으로 백성을 위한 민본 정치를
이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관원을 지휘하고 감독하는 재상에게 정치를 맡겨야 합니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여덟 번째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고 신권이 된 정치체제를 잘 가르쳐 이상적인 군주로 키워내려 했다.
이방원> 욕망왕자·태조 7년 (1398년) 조강지처의 아들이자, 개국공신인 나를 두고 방석을 세자에 책봉하고, 스스로 그의 스승이 되다니 삼봉의 오만방자함이 극에 달하였소 조선은 이씨의 나라인가? 정씨의 나라인가? 왕권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서는 법 내 삼봉 정도전을 이대로 둘 수는 없소이다
na> 20정도전의 오만방자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먼 “조선은 이씨의 나라인가 정씨의 나라인가?” 정도전~~~ 나래이션 수정 건국 초기부터 강력한 왕의 지도력으로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이방원은 분노했다.
na> 정반대의 정치철학을 가진 이방원과 정도전의 대립은 세자책봉으로 표면화됐다. 정도전은 강력한 군대를 가진 이방원이 얼마든지 자신을 칠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이방원의 사병을 없애려 골몰했다 하지만,,,
뉴스자막> 이방원 왕자의 난 일으켜, 정도전 제거
na> 태조 7년, 1398년 뉴스 속보입니다. 태조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 왕자가 왕자의 난을 일으켜, 한때 동지이자 스승인 정도전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이방원> 욕망왕자·정종 1년 (1398년) 저 이방원이 아니라 둘째 방과 형님께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셨습니다. 형님 부디 성군이 되십시오~
na> 둘째 형 방과를 왕으로 세운 이방원. 하지만, 이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한 조치에 지나지 않았다. 곧바로 왕의 뒤를 이을 동생, 세제가 된 이방원은 2년 만에 왕위를 물려받았으니 그가 바로 조선의 3대 왕, 태종이다.
말풍선> 강력한 왕권이 강력한 나라를 만드는 법! 6자신의 정치신념에 따라 왕권을 강화 하며 강력한 중앙집권 정치를 펼친 태종 이방원! 너무 강한 왕권은 독재입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왕권과 신권에 대한 논란은 계속 되었다.
세종대왕> 훈민정음· 세종 1년 (1419년) 조선의 4대 왕인 나 세종은 절대 왕권도 절대 신권도 아닌 조화로운 정치를 행할 것이오~
na> 신권이냐? 왕권이냐?에 대한 논란은 태종의 아들 세종 때 끝이 났으니 세종 때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어 조선의 여러 문물을 완성해 나갔다.



다음은 단종입니다.

단종

단종은 제6대 조선의 왕으로, 치열한 왕위 경쟁의 희생양이기도 합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즉위한 것도 모자라 아버지인 문종까지 세상을 뜨며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아들을 걱정한 문종이 죽기 전 여러 신하들에게 단종을 부탁하고 떠나지만, 사방에서 왕의 자리를 노렸던 탓에 왕권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견인조차 없던 상황이었기에 고작 열두 살인 단종 혼자 이 상황을 감당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었습니다.


단종 어소


아무래도 단종에게 가장 위협적이었던 인물은 수양대군이었습니다. 수양대군은 세종의 둘째 아들로, 문종이 2년 만에 승하하고 어린 단종이 왕이 되자 왕위에 욕심을 갖게 됩니다. 결국 수양대군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동생인 안평대군과 단종을 보필하던 김종서를 제거하였으며, 압박을 가해 단종을 상왕의 자리에 몰아넣고 결국 조선의 제7대 왕, 세조로 등극합니다.

단종은 반란 세력으로 몰려 유배 당하고 사약을 받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합니다. 세조에게 희생당해야만 했던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와 무덤 장릉의 이야기를 담은 영상이 있습니다. 지금 함께 보시겠습니다.


장릉
 
대본보기
프로그램 동영상 소스코드 정보
대본보기 열두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다. 태어난 다음날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인 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던 소년 왕 단종. 강원도 영월 땅에서의 유배 생활은 하루하루가 눈물이요 한숨이요 그리움이었다. 시신과 함께 강물에 버려진 채 어쩌면 영원히 묻혔을 소년왕의 이야기가 잠들어 있는 곳. 장릉이다.
강원도 영월군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청령포. 단종의 유배지다. 서쪽으로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고 나머지 삼면은 물로 둘러싸여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출입조차 할 수 없는 곳. 단종은 이 적막한 곳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유배생활을 했다. 수십년에서 수백년 된 소나무들이 들어차 숲을 이루는 송림, 이 곳에 단종이 유배생활을 하던 집이 있다. 어린 단종에게, 떠나온 한양은 그리움이자 두려움이었다. 언제 어떤 바람이 또 불어닥칠지 모르는, 숨죽인 하루하루가 눈물 속에 그렇게 흘러갔다. 이곳엔 수령이 600년이 넘는, 유명한 소나무가 한그루 있다. 쫓겨난 어린 왕이 걸터앉아 하염없이 한양을 바라보며 한숨 지었다는 나무. 단종의 애달픈 유배 생할을 지켜보았으니 ‘관’이요, 한양을 바라보며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으나 ‘음’이라 해서 이름 붙여진, 이른바 ‘관음송’이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유배 생활은 그리 길지 못했다. 또 한차례의 단종복위사건이 발각되면서 단종은 결국 영월 관아인 관풍헌에서 사사되고 시신은 강물에 버려졌다. ‘시신에 손을 대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 하였으나’ 영월의 하급관리였던 엄흥도가 몰래 거두어 자신의 선산에 암매장했다. 잡초에 가려 제사지내는 이도, 찾는이도 없던 단종의 묘는 그후 240년이 지난 숙종대에 이르러서야 장릉이라는 능호를 받고 모양새를 갖췄다. 장릉 경내에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홍도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각과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을 기리는 위패가 모셔져 있다. 경황이 없는 가운데 급하게 잡은 터여서일까? 장릉으로 오르는 언덕은 경사가 가팔라 직접 오르기 어렵다. 정자각 뒷문을 열면 능침이 바로 올려다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나, 장릉의 경우엔 가파른 언덕이 시야를 가로막는다. 급경사의 언덕을 우회해 오른 후, 완만한 능선을 따라 걸으면 그제서야 능침이 나타난다. 능침 공간 역시 다른 왕릉과 비교해 상당히 단촐하다. 왕릉의 예에 따라 삼면에 곡장, 즉 낮은 담장은 둘렀으나 서인으로 강봉되었다가 추존된 왕이니만큼 병풍석도 없고 난간석도 없다. 그러나 그보다 가슴 아픈 것은 수백리 밖, 평생 그리워만 하다가 만나지 못한 정순왕후에 대한 그리움이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자 정순왕후 역시 서인이 되어 궁밖으로 쫓겨났다. 이후 여든 한 살 나이로 세상을 뜰때까지, 평생 단종을 향한 그리움으로 살다간 정순왕후. 능호를 사릉이라 붙인 이유다. 다른 왕릉과는 달리 사릉은 일반 묘역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서인 신분으로 죽은 정순왕후를 거두는 이가 없자, 단종의 누나인 경혜공주의 시가에서 자신들의 선영에 왕비를 모신 까닭이다. 사릉 역시 장릉과 마찬가지로 규모가 소박하고 석물이 단촐하다. 왕릉조성 당시 대군부인의 예로 조영된 탓이다. 남양주에서 영월까지, 혹은 영월에서 남양주까지 조선 왕릉의 왕과 왕비 중 가장 멀리 떨어져 서로를 그리워 해야 하는 단종과 정순 왕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이래 500년 동안 지속적으로 조영돼 온 스물 일곱 왕과 왕비의 조선 왕릉은 장릉이 있으므로 해서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도세자입니다.

사도세자

사도세자는 조선의 제21대 왕인 영조의 두 번째 아들입니다. 맏아들이 요절한 뒤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인 사도세자는 큰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래서 영조는 사도세자를 왕세자로 책봉하고 왕위를 이을 훌륭한 인물로 키우기 위해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사도세자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지휘 아래 학문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살 때부터 몇십 개의 글자를 알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학문보다는 무예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관심은 당연히 영조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고, 이에 둘의 사이는 점점 틀어지게 됩니다. 영조의 기대는 날로 커져만 가는데, 그를 충족시키지 못했던 사도세자는 괴로움만 커져갔습니다. 부담감을 이기지 못한 세자가 정신 질환을 앓았을 정도라고 하니 두 사람의 다른 가치관이 얼마나 불행한 결과를 낳은 것인지 짐작이 갑니다. 결국 영조 38년(1762) 윤5월 13일,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었고 그 후 9일 만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영조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영조의 손자였습니다. 정조는 어린 나이에 자신의 아버지가 처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아야만 했습니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추존을 금지했지만, 정조는 즉위 후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하며 사도세자의 시호를 올리고 묘소를 이전하는 등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합니다.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했던 사도세자,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던 정조. 그 둘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가슴이 아픕니다. 사도세자의 씁쓸한 마지막과 정조의 효심을 담은 융릉의 영상을 보면서 어쩌다 어른 심화학습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효심으로 빚은 신의 정원 융릉·건릉

효심으로 빚은 신의 정원 융릉·건릉
 
대본보기
프로그램 동영상 소스코드 정보
대본보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당대 최고의 예술과 기술이 집약된 이 문화유산에는 조선왕조 519년 27명의 왕이 전하는 파란만장하고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습니다. 저마다의 각기 다른 사연을 품고 있는 40기의 조선왕릉 중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대왕의 애달픈 사부곡이 흐르는 이곳이 바로 융릉과 건릉입니다. 왕실과 국가의 번영을 위해 조선왕릉은 터를 선정할 때 풍수를 고려하는 것이 필수였고, 이는 융릉과 건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남정맥의 광교산에서 백운산을 거쳐 오봉산과 수리산의 중간에서 갈라진 구봉산, 칠보산과 고금산, 호산을 잇는 융릉과 건릉. 주산인 화산은 800여 장의 연꽃잎이 봉우리를 감싸고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반용농주(盤龍弄珠)형 지세이며, 융릉과 건릉의 안산은 여의주에 해당합니다. 융릉과 건릉의 능역은 일제강점기와 1950년대 농지개혁법 등을 거치며 상당 부분 훼손되어, 현재는 조성 당시 지형의 1/20만 보존되어 있습니다. 추존왕 장조와 헌경의황후, 즉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인 융릉. 영조에 의해 수은묘로 이름 붙여진 사도세자의 무덤은 정조가 즉위한 후 영우원으로 높여지고,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며 현륭원이라 하였다가 고종 때 비로소 융릉이라 불리게 됩니다.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 되어 뒤주 속에서 비운의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 11살의 어린 나이로 그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아들 정조. 삼년상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큰아버지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살아가야 했던 그는 즉위하던 날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합니다. 오랜 세월 가슴에 묻어두었던 아버지. 정조가 사도세자의 억울한 원혼을 달래기 위해 무덤을 옮기고 지극정성으로 꾸민 곳이 바로 현륭원, 지금의 융릉입니다. 다른 조선왕릉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이 원형 연못에서도 아버지를 위한 정조의 정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의주를 상징하는 연못을 파 이곳을 더욱 길한 곳으로 만들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천 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다는 최고의 명당에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정조는 왕릉의 터를 도성으로부터 10리 밖, 100리 안에 두어야 한다는 조선왕실의 원칙을 어기는 것도 불사했습니다. 원래 조선왕릉은 능침이 보이지 않도록 홍살문과 정자각, 능침을 일직선에 두는 것이 원칙이지만 뒤주에 갇혀 죽어간 아버지의 갑갑함을 덜어주려는 듯 융릉은 특이하게도 정자각이 옆으로 비켜서 능침의 시야가 훤히 틔어 있습니다. 효심이 빚어낸 걸작 융릉. 정조는 당시의 기술력과 문화적 역량을 쏟아내 이곳을 왕릉처럼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세자의 무덤에는 세울 수 없는 무인석, 기존의 왕릉과 달리 목이 시원하게 뻗은 예복 차림의 문인석, 왕을 상징하는 봉황이기에 문인석의 금관에 조각된 봉황 문양에서 왕이 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위로하고자 하는 정조의 마음이 느껴지는 듯 합니다. 융릉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병풍석은 있지만 난간석이 없는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능침을 둘러싼 병풍석 표면에 조각된 화려한 모란과 연꽃, 병풍석 덮개의 12방위 연꽃 조각은 융릉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형식으로, 조선 최고의 연꽃 조각으로 평가됩니다. 이 만개하지 않은 꽃봉오리는 어쩐지 한껏 피지도 못하고 요절한 사도세자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정조는 이곳에 아버지를 모시고 이후 11년간 12번이나 찾아뵈었다고 합니다. 조선 최대의 왕실 행사로 평가받는 화성 행차. 정조는 화성 행차를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표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백성과 소통하며 민심을 살피고, 수십 건의 민원을 해결하는 기회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평생의 한으로 남았던 정조. 그는 죽어서도 효를 다하고자 승하하기 다섯 달 전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 자신을 그 곁에 묻어 달라 청합니다. 자신의 유언대로 죽어서도 아버지의 곁을 지키고 있는 정조. 이곳이 조선 제22대 왕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인 건릉입니다. 속세의 깨끗하지 못한 것들을 씻어내는 금천을 건너면 산 자와 죽은 자를 맞이하여 제사를 지내는 제향 공간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인간과 신들의 영역을 나누는 홍살문, 왕이 능에 오셨을 때와 떠날 때 매번 절을 올리던 배위, 정자각까지 뻗어 있는 참도. 융릉과 마찬가지로 양옆에 각석이 넓게 깔려 있는 것이 특징인 참도의 높은 쪽이 역대 왕들의 혼이 가시던 신도, 낮은 쪽은 왕이 가시던 어도입니다. 산 자들의 출입이 금지되는 신의 공간 능침. 어느 왕릉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화려하게 꾸민 아버지의 융릉에 비해 정조 자신의 건릉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사실적인 기법으로 표현된 무인석과 문인석, 여덟 개의 면마다 매화, 난초, 국화 무늬가 아름답게 새겨진 팔각 장명등, 합장릉임에도 혼이 머무는 혼유석이 하나인 것 같이 융릉과 건릉은 거의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화려한 병풍석으로 꾸며진 융릉과 달리 건릉은 난간석을 둘렀다는 것, 그리고 무인석의 좌우로 석마를 두고, 석호, 석양의 배치와 숫자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깊은 슬픔과 그리움을 딛고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개혁적인 군주로 우뚝 선 정조대왕. 아버지께서 그 영혼이나마 편안히 잠드실 수 있도록 주변의 나무 한 그루에까지 세심하게 정성을 기울이던 정조는 죽어서도 아버지의 곁을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작성자 : 전체관리자 | 등록일 : 2019-08-09 | 조회수 : 127

SNS 로그인 페이스북 로그인하기 트위터 로그인하기 네이버 로그인하기 카카오 로그인하기 로그아웃

(0 / 300)

댓글등록
전체댓글수 0

quick menu

quick menu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