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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문화유산여행] 어쩌다 어른 따라잡기 - 서울의 역사 (#독립문 #조계사 #종묘)

도깨비와 함께하는 문화유산여행
 

<어쩌다 어른> 147화에서는 정치지리학자 임동근씨와 함께 했습니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대한민국과 서울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그리고 앞으로는 어떻게 변할 것인지 상상해볼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문화유산을 찾아 여행하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문화유산채널에서 선정한 키워드는 총 세가지로, '독립문', '조계사', 그리고 '종묘'입니다.

 
어쩌다 어른 따라잡기
#독립문 #조계사 #종묘
먼저, 독립문으로 가보겠습니다.

독립문

독립문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는 사적 제32호입니다. 독립협회와 서재필의 주도 아래 1년여의 공사 기간을 거쳐 완공되었습니다. 문의 중앙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는데, 가운데에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오얏꽃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 위의 앞뒤에는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는 글씨가 적혔습니다. 독립문은 영은문을 헐고 지은 것으로, 지금은 독립문과 영은문주초 2개가 남아 있습니다.

 
독립문


독립문을 일제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지었다고 알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독립문은 갑오개혁 이후 당시 청나라였던 중국으로부터의 해방을 염원하며 지은 건축물입니다. 그래서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던 문, 즉 중국 사대의 상징이었던 영은문을 헐고 세운 것이죠.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게 되었고, 그 이미지가 지금까지 이어져 이러한 오해를 낳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독립문의 현판을 친일 매국노인 이완용이 직접 썼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자주독립의 상징물인 독립문의 현판을 매국노가 썼다는 주장은 정말 아이러니한데요. 대체 어떻게 된 이야기일까요? 사람들은 무엇을 근거로 주장을 펼치는 것일까요? 관련된 영상을 통해 함께 알아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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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NA /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독립문! 독립문은 서대문 독립공원 안에 ‘3·1운동 기념탑’, ‘순국선열추념탑’과 함께 독립공원의 일부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독립문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며 세워졌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요. 사실 독립문 안에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 숨어 있습니다. 독립문에 숨겨져 있는 비밀. 지금부터 파헤쳐 봅니다.
< 독립문 – 독립문의 숨겨진 비밀 >
한은정 / (문화유산 X-파일 프리젠터) 저기 뒤에 ‘독립문’이라고 쓰인 현판! 보이시죠? 저 글씨를 누가 쓴 건지 아십니까? 일본에 우리나라 국권을 팔아넘긴 친일파 이완용의 필체라는 주장이 일고 있습니다.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건물로 여겨진 독립문의 현판을 도대체 어떻게 친일파 이완용이 쓰게 되었을까요? 독립문을 건설하는데 앞장섰던 독립협회라는 단체는 도대체 어떤 단체였을까요?
NA / 독립문은 독립문의 건립을 주도했던 독립협회가 근대화와 서구화의 의지를 표명하기 위해 세웠습니다. 독립문은 일정한 크기로 돌을 잘라 쌓은 석축문으로 외형은 서구적 조형물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만드는 방식에 있어서는 숭례문과 같이 돌을 엇물려서 쌓아 올리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전통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이 접목된 아주 독특한 조형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립문의 앞쪽에는 한글로 ‘독립문’이라고 쓰여있고 태극기와 더불어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이 새겨져 있습니다.
안창모 /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 / 문화재위원) 이것이 갖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사실 1897년에 대한제국의 출범으로 가는 상징적인 건축물이라는 점입니다 고종이 아관(러시아 공사관)에 계시면서 독립문을 지으며 자주국으로써 세계만방에 고하고, 실천적 의미로 대한제국을 출범 시키는 거죠. 바로 그 과정에서의 역사적 중요성을 우리가 충분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NA / 고종은 대한제국이 청나라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주독립국으로 인정받기를 염원했습니다.
고종 / “대한제국이 독립국가임을 널리 알릴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NA / 독립협회가 만든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순 한글신문입니다. <독립신문>은 ‘독립문’ 건설을 추진하면서 대대적인 성금 모금 운동을 펼쳤습니다. 독립신문은 모금자의 이름과 사연, 기부액수를 일일이 게재했는데요. 소학교 학생과 시장 상인, 심지어는 군인과 기생까지 성금 대열에 합류할 정도로 전 국민적인 열기가 대단했습니다. 열강들의 침략 가운데 국권이 위태로웠던 시절 대한제국의 독립을 향한 백성들의 열망이 어느 정도였는지 느껴지는데요.
< 일본은 왜! 독립문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보수했을까? >
NA / 그런데 특이한 점은 일본이 이 독립문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입니다. 일본은 지금으로 치면 4억 원이 넘는 당시 4100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대대적인 독립문 보수공사에 나섭니다. 한술 더 떠 1935년 8월 일본은 독립문을 고적 제58호로 지정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조선의 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거액을 들여 보수하려고 했을까요?
조선총독부 문화재 관리 직원 / “ 조선이 청으로부터 독립하고자 세운 기념비인데.. 우리에게도 기쁜 일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청일전쟁까지 하면서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많이 했는데요”
NA / 그러니까 독립문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당시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표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독립협회는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던 ‘모화관’을 헐어 그 자리에 “독립관” 세우고, 중국사신이 들어오는 문이었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워서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널리 알리고자 했던 겁니다.
한은정 / (문화유산 X-파일 프리젠터) 그러니까 독립문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 을 상징하는 표상물이었고, 일제는 이 독립문을 대한제국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더욱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생각했던 겁니다. 이후 독립협회 인사들 중 상당수가 친일파로 변모한 점을 생각한다면 일제가 독립문을 조선의 식민지화를 위한 홍보 기념물 정도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독립문에서 독립을 의지를 높이 표상하는 현판! 이 현판의 글씨는 누가 쓴 것일까요?
< 일본은 왜! 독립문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보수했을까? >
NA / 현판에는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 쓰여 있는데 누가 썼는지, 누구의 글씨인지 전혀 적혀있지 않습니다. 1999년 <이완용 평전>을 발표한 육덕한 작가는 독립문 현판을 이완용이 썼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완용은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선 을사오적 중 한 명으로서 국권을 팔아넘긴 매국노인데요. 독립문 건립 당시 이완용은 독립협회의 창립 위원장으로서 협회에 주도적으로 관여하고 있었으며 최고 성금액인 100언을 기부했을 정도로 독립문 건립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습니다. 게다가 당시 제일가는 명필가였던 그가 독립문 현판을 썼다는 주장이 나온 겁니다. 동아일보 기사에도 "독립문이란 세 글자는 이완용이 쓴 것이다”라는 글이 실렸는데요. 하지만 또 다른 주장도 있습니다. 독립문 현판을 독립협회 다른 회원인 김가진이 썼다는 건데요. 김가진은 이완용과 같이 독립협회 활동을 했지만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고문으로도 활약한 독립운동가입니다. 김가진의 손자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은 김가진이 독립문 현판을 썼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김자동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 ‘문(門)’자 글씨체를 비교해보면, 누구나 한 사람이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죠. ‘문(門)’자를 보면 얼마나 글씨체가 똑같아요? 독립문의 문(門)자 돌아가는 것이나 말마(馬)자 돌아가는 것이나 다 비슷하게 둥글거든요 이게 다 지금 있어요. 그런데 이완용 글씨는 모가 나 있습니다. 체가 달라요.
NA / 하지만 문서나 다른 증거가 없어 누구의 글씨인지 그 답은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며 세워졌던 독립문이 어떻게 해서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게 되었을까요?
< 독립문은 어떻게!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게 되었나? >
NA / 한일병합으로 국권을 잃은 이후 독립문은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변모했습니다. 미국 하와이 동포들이 발행했던 <신한민보>는 경술국치를 기억하자는 삽화에 독립문을 그려 넣었습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누군가가 독립문에 태극기를 꽂은 일도 있었는데요. 당시 그 높은 독립문에 태극기를 꽂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에 사람들 사이에는 ‘도깨비 짓’이라는 소문까지 돌았습니다. 놀란 일본 경찰이 소방차를 동원해서 태극기를 뽑아냈는데요. 일제는 그때 소방펌프를 마구잡이로 뿌려 원래 새겨져 있던 태극기의 색채를 일부러 지워버렸습니다. 이렇듯 일제 강점기 이후 독립문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는 기념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1979년 고가도로가 독립문 위를 지나게 되면서 독립문은 원래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70m 이전하게 되었고 1987년 서대문 독립공원이 조성되면서 독립문은 ‘3·1 운동 기념탑’과 함께 독립공원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한은정 / (문화유산 X-파일 프리젠터) 1897년 청일전쟁 당시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부르짖으며 <독립문> 건설에 앞장섰던 독립협회 회원들! <독립문>이 세워진 뒤 독립협회 회원들 중 일부는 친일파가 되어 자신들의 기득권을 챙겼고 또 다른 일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험난한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습니다. <독립문>을 보면서 열강들의 틈 속에서 끝까지 진정한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다음은 종로로 자리를 옮겨 보겠습니다!

조계사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에 위치한 조계사는 대한민국 불교의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조계사는 불교 종파 중의 하나인 조계종의 대표교구 본사이기도 한데요. 우리에게 시인으로 익숙한 만해 한용운이 1920년 각황사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태고사로 불리다가 1954년 불교정화 이후 조계사로 개칭하였다고 합니다. 조계사 안에는 천연기념물 제9호 백송을 비롯해 여러 가지의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들이 있어 아름다움을 더합니다.

 
조계사 사진
사진_ 박상진 / 경북대 명예교수
 
조계사 사진
사진_ 박상진 / 경북대 명예교수


한편 조계사는 야경이 예쁘기로 소문난 곳으로 매년 연등축제를 비롯한 각종 축제도 개최합니다. 그럼, 조계사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는 영상을 함께 만나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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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조계사는 대한불교 직할교구 본사로서 조계종 총무원, 중앙종회 등이 자리하고 있는 한국 불교의 중심 사찰이다.
 대웅전은 앞면 7칸·옆면 4칸으로 지붕의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을 이용하였다. 잘 다듬어진 갑석과 면석으로 기단이 이루어져 있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는데 특히 모든 벽에 있는 문은 꽃 모양으로 장식된 문살로 되어 예술적 화려함과 정교함을 갖고 있다.  이 건물의 모든 것이 1920년대 조선시대 후기의 건축양식을 받아들이면서 전각의 대형화를 이룬 것이 특징이다. 이 건물 안에 자리한 불교신문사에서는 주간으로 불교 신문을 발행하고 법당 앞에는 1930년에 조성된 7층 석탑이 있다. 석탑 안에는 부처님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는데, 이 사리는 스리랑카의 달마바라 스님이 1914년 한국에 가져온 것이다.  이 석탑 양편에는 석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법당을 바라보면서 왼편으로 종각이 보이는데 종각에는 큰북과 범종, 운판과 목어가 있어 아침 저녁 예불 때마다 울린다.  이는 비단 사람들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깨달음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모든 중생들을 위한 것이다. 큰북은 네발 달린 짐승을, 범종은 타락하거나 지옥의 고통을 받는 이들을, 운판은 하늘의 날짐승을, 목어는 물에 사는 짐승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다. 백송은 나무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져서 흰빛이 되므로 백송 또는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하는데 중국이 원산지로서 조선시대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다 심은 것이다. 수송동 백송의 나이는 약 5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4m, 뿌리부분 둘레 1.85m이다. 백송은 흔히 볼 수 없는 희귀한 소나무이고,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이며, 생물학적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천연기념물 제9호)
 

이번에는 같은 종로구에 있는 종묘로 가보겠습니다.

종묘

 
종묘


종묘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신 사당입니다. 대한민국의 사적 제125호인 동시에 그 위엄과 건축미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과 서울을 여행할 때 빠지지 않는 여행지인 만큼 실제로 보면 아름다움과 장엄한 자태에 매료된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정전(국보 제227호)은 종묘의 중심 건물로 1395년(태조 4년)에 준공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재건되었고 이후 고종 때까지 제19실이 증축되었습니다. 이로써 한국에서 가장 긴 목조건물이 되었습니다. 여기 모신 신위는 제1실의 태조를 비롯하여, 세종, 세조, 성종, 중종, 선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 헌종, 철종, 고종, 순종 등 19왕과 비가 있다고 합니다.


<어쩌다 어른> 147화 심화학습 시간, 재미있으셨나요?
마지막으로 종묘의 모습을 담은 영상 띄워드리면서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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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종묘 정전, 창덕궁,  창경궁, 종묘 (사적 제125호), 종묘 정전 (국보 제227호)
정전은 종묘의 중심 건물로, 조선왕조 역대 임금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이강근/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전문화재위원)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향을 받드는 조상 신전입니다. 국가의 사당인 종묘는 예법상 시조와 직계 4대조의 신위를 모신 5칸으로 5묘를 이루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형제간에 왕위가 계승되어 한대에 두분의 왕이 나오는 경우 신실을 한 칸 늘려 짖는 원칙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업적이 큰 왕들은 시조와 마찬가지로 신전에 모시고 오래도록 제사를 받드는 원칙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보시는 종묘 정전은 시조와 업적이 큰 왕, 그리고 마지막 왕의 직계 4 대조 까지 신위를 모시19칸으로 이루어진 사당이 되었습니다. 옛날부터 부모가 돌아가시면 잊는 것이 아니라 늘 살면서 생각하고 추모하게 됩니다. 제사예법에는 4대 조상까지는 피를 나눈 혈연관계의 조상으로서 그 친함을 유지하는 기간으로 보고 제사를 받들어야 된다고 합니다. 종묘는 이것이 사당건축에 반영 되서 하나의 제도로 정착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작성자 : 전체관리자 | 등록일 : 2019-08-06 | 조회수 :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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