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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문화유산여행] 차이나는 클라스 따라잡기 – 이익주 교수님과 함께한 우리가 잘 몰랐던 나라, 고려 심화학습 (#만월대 #강화고려궁지 #삼척궁촌리)

도깨비와 함께하는 문화유산여행
 


도깨비와 함께하는 문화유산여행. 지난 번 이익주 교수님과 함께 했던 차이나는 클라스 70화 <우리가 잘 몰랐던 나라, 고려>의 첫 번째 심화학습 기억나시나요? 잘 기억이 안 나신다면, 이전 고려시대 불교에 대한 심화학습 글 보고 오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심화학습입니다. 이전 도깨비 문화유산 여행에서 고려의 불교에 대한 심화학습을 진행했다면, 이번에는 고려시대의 역사와 문화 전반을 되짚어 볼 수 있는 키워드와 문화유산에 대해 공부해보고자 합니다.
 
도깨비 문화유산이 뽑은 오늘의 문화유산 키워드는 “만월대”, “강화고려궁지”, “삼척궁촌리”입니다. 그럼 고려시대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차이나는 클라스 따라잡기
#만월대 #강화고려궁지 #삼척궁촌리


  첫 번째 키워드, "만월대"입니다.

만월대는 고려의 궁궐터입니다. 919년(태조2) 태조가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지었을 때부터 1361년(공민왕10) 홍건적의 소실 될 때 까지, 무려 450여년간 왕의 거처였던 곳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생소한 이유는 만월대가 북한 개성 송악산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월대는 말 머리 모양을 닮은 명당이라 하여 ‘마두명당’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왕건의 6대조의 이야기를 기록해둔 『편년통록』에 따르면 5대조 강충이 풍수지리에 능한 팔원의 조언에 따라 집을 옮겨 지은 곳이 바로 이 곳, 만월대였다고 합니다.


(*『편년통록』은 현전하지 않기 때문에 『고려사』 세계(世系)에서 내용을 확인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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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발굴조사 재개
UNESCO WORLD HERITAGE
1. 만월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개성시 송악산에 있는 고려시대 궁궐터
2. 남과 북의 손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는 1100년 전의 고려
3. 하나의 역사를 찾기 위한 남북한 모두의 뜨거운 여정
4. 천 년을 거슬러
5. 고려사의 맥박이 뛰기 시작한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의미심장한 발걸음
6. 2007년 5월 남과 북이 순수 민간교류 차원의 공동 발굴 착수
7. 지속적인 공동 연구를 통해 많은 성과와 신뢰를 쌓은 남북의 학자들
8. 하나의 역사를 찾기 위한 시간 9년...
9. 2013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10. 2015년, 6개월간 7천㎡에서 건물지 19동과 유물 3천500여 점 발굴
11. 그리고 2018년 광복 73년 분단 73년
12. 멈췄던 민족의 시계가 다시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13. 민족 동질성 회복과 실질적 협력의 통로를 마련한 A great accomplishment that provided an opportunity for restoring national homogeneity and cooperation
14. 커다란 결실
15. 화려하고 당당했을 고려 황궁의 그 모습처럼
16.  하나된 조국의 미래를 그리며
17. 문화재청은 만월대 남북공동 발굴조사 사업 등 문화유산 분야에서 남북한 상호교류와 협력을 꾸준히 이어 가겠습니다


최근, 북측에서 3년 간 중단되었던 개성 만월대 공동 조사를 재개하자는 제안을 해왔습니다. 지난 7일 8차 공동 발굴조사가 합의에 이르렀다는 발표가 우리를 기쁘게 하기도 했습니다. 만월대에 집을 지으면 귀한 아들을 얻을 수 있다는 신이한 이야기가 서려있다고 합니다.

개성 만월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발굴 조사 및 고려시대 연구에 참여하신 분들의 인터뷰로 더욱 자세히 알아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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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1. 하나.둘.셋 이것이 진정한 아이돌식 인사법
일동>하나, 둘, 셋! 안녕하세요.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개성만월대 조사연구팀
#2. 지성진 개성만월대 조사연구팀
지성진 > 지성진
#3. 박성진 개성만월대 조사연구팀
박성진 > 박성진
#4. 박지영  개성만월대 조사연구팀
박지영 > 박지영입니다.
#5.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개성만월대 조사연구팀
일동 > 만나서 반갑습니다.(웃음)
#6. 누구냐, 너!
#7.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개성만월대 조사연구팀
#8. 개성만월대 발굴조사 남북공동발굴조사 2007년 1차 발굴조사 시작
박성진 > 개성 만월대 발굴조사는 2007년부터 시작을 했는데요,
#9. 2007년-2015년 1차~7차 공동조사 완료
박성진 > 이제 2015년까지 7차례 진행이 됐고요.
#10. 2018년 제8차 남북공동발굴조사 START
박성진 > 올해는 8차 조사가 시작이 될 겁니다.
#11. 8차 조사, 차이점은? ‘발굴’ 중심  /   8차 조사   1차~7차 조사   ‘정비’ 중심
박성진 > 이전까지는 조사가 보호중심, 대체로 발굴 중심인데요, 이제부터는 좀 이제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어 나갈 것 같습니다.
#12. 개성 배테랑  [veteran]
#13. 박성진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개성만월대 연구조사팀
#14. ‘개성 배테랑’ 박성진 연구사에게 배우는 개성 생활백서
#15. 여권 passport  NO
박성진 > 여권은 없죠. 여권은 없고요.
#16. 방북증 통일부발급
박성진 > 방북증이 있습니다. 통일부에서 발급한. 그쪽에서는 비자 발급 대신에
#17. 초청장 invitation card 드루와~
박성진 > 초청장을 보내는거죠.
#18. 기억에 남는 음식은?
박성진 > 개인적으로는 가물치회. 디스토마가 많다고는 하던데 약 먹으면 되니까
#19. 박성진의 소울푸드 “가물치회” 강추
박성진 > 가물치회가 맛있었어요.
#20. 개성생활, 핸드폰, TV는?
박성진 > 일단 핸드폰이 없어요. 텔레비전은 다행스럽게 나옵니다.
#21. oh~~  종편 OK       오~~    oh~~  케이블 OK     오~~
박성진 > 종편은 다 나옵니다. 다. (케이블은?) 싹 다~
#22. (제작진) 심심하진 않겠네요?
#23. (행복행복) 밤새 봐야징~~  굿~
박지영 > 밤새 봐야지~
#24. 개성 만월대(고려궁성)?
#25. 개성만월대(고려 궁성)? 남북공동발굴조사
박성진 > 고려 궁성은 고려의 수도 개성에 있는 고려의 정궁, 법궁입니다.
#26. 고려의 법궁 [임금이 사는 궁궐]
박성진 > 우리의 기준으로 한다면 이제
#27. 서울의 경복궁
박성진 > 서울의 경복궁 같은 거죠. 그래서 가장 중심인 물질 문화, 고급진 물질 문화가 모여있는 곳. 고려사회라는 것을 아주 응축시켜서 한번에 표현할 수 있는 곳.
#28. 한반도 중세 문화 규명의 핵심 유적
박성진 > 한반도 중세 문화를 규명하는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고요.
#29. 박지영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개성만월대 연구조사팀
#30. ‘개성 만월대, 너는 내 운명’ 박지영 연구사  8차 조사, 중점 내용 및 목적은?
#31. 고려청자 생산지 : 강진, 부안 수요지 : 개성
박지영 > 청자 같은 경우에는 생산지는 남쪽에 있거든요. 강진이나 부안. 그런데 정말 주 수요를 했던 수요지는 개성이라고 볼 수 있거든요. 그래서 아직까지 출토됐던 유물들에 대한 가치나
#32. 유물의 가치 확인
박지영 > 여러 가지 상황 같은 것들이 아직 학계에 알려지지 않았어요. 그런 것들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고 그 다음에 그것을 통해서
#33. 출토 유물의 가치 확인을 통해 고려시대 문화 복원, 재현 가능
박지영 > 당시 고려시대에 대한 문화에 대한 복원, 재현 이런 것들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34. 만월대 조사연구팀, 지원자가 많을 것 같은데...?
박지영 > 그래서 가정도 있다보니까 다른 사람 이야기도 나왔었는데, 결국에는 어떻게 하다보니까 저만 딱 남더라고요.
#35. 개성 만월대, 너는 내 운명
박지영 > 사실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36. (박성진 연구사) 처음에 나한테 했던 얘기랑 좀 다른거 같은데...
#37. (왜 이래?) 직장 생활이 다 그런거지...
박지영 > 가라고 해서 간거에요.(웃음)
#38. 개성만월대 (어찌됐던...) 너는 내 운명
#39. ‘개성 만월대 조사연구’, 왜 해야하나?
박지영 > 가장 중요한 건 일단 문화의 복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40. 문화의 복원
박지영 > 고려는 고려도경이라고 하는 단편적으로 전해져오는 문헌 기록을 가지고
#41. 단편적 기록, 상상에 의한 복원
박지영 > 상상으로 복원하고 지금 전해지는 유물 갖고 추정하는 것보다
#42. 일부 유물에 의한 추정에 의한 복원
박지영 > 발굴된 현장과 거기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서 고려시대 화려했던 귀족적이었던 국제적이었던 문화를 복원할 수 있는 기초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43. 발굴현장 발굴 유물을 통해 고려시대 문화복원의 기초 자료로 활용
박성진 > 민족의 공동의 자산, 재화, 민족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문화유산을 같이 조사하고 연구해서 우리가 어떤 부분에서 같은가, 동질성을 볼 수 있는가를
#44. 문화유산 공동 조사, 연구를 통해 민족적 동질성 확인
박성진 > 체제가 다르고 국가가 다르지만 같은 민족의 입장에서 같은 문화유산을
#45. 체제와 국가가 다르지만 같은 민족의 입장에서
박성진 > 같이 조사하고 연구하자라는데 뜻을 모으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나아가는 게 맞고.
#46. 민족적 가치가 담긴 문화유산에 대한 공동 조사연구가 필요
#47. (제작진) 수고하셨습니다~
#48. (박성진 연구사) 이거 북쪽에서 다 봅니다. 우리 모니터링 해요.
#49. (박지영 연구사) 난 편집 해야 돼. 강제로 간다고 했는데..
#50. 다시 해야하나??
지성진 > 다시 해야돼나?
#51.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개성만월대 조사연구팀


두 번째 키워드 "강화고려궁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고려의 궁궐터는 만월대라고 했는데 왜 고려궁지를 말할까요?

 
강화도에 위치하고 있는 고려궁지는 고려왕조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했던, 대몽항쟁기 동안 머물렀던 장소입니다. 무려 1232년(고종19)부터 1270년(원종11)까지, 총 39년 간의 길고 아픈 기억을 담고 있는 곳입니다. 강화도는 대몽항쟁의 중심지였습니다.

기마전에 강했던 몽골을 피해 개성에서 멀지 않은 섬인 강화도로 대피해 항전하였지만, 결국 강화와 함께 원 간섭기가 시작되고 맙니다. 하지만 이것이 고려 역사의 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외교 국면의 시작이었다 것을 <차이나는 클라스 70회>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고려궁지 강화유수부 동헌
△ 강화 고려궁지(江華 高麗宮址, 사적 제133호)_이영일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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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소개할게 삼별초 과거 무신 정권 때 Ye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 세 종류로 이뤄진 특수부대 Ye 몽골의 침략으로 바빠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자 임금을 보호하는 친위대에서 변한 강화도 수비대 강화 고려궁지 사적 제133호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줄기차게 항전한 곳 39년 동안 임시 궁궐과 관아 건물이 있던 곳은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수도를 개경으로 옮기면서 지금은 옛 터만 남아있어 이미 왕과 신하들은 몽골에 굴복했지만 삼별초는 포기 안했어 됐어 그딴 건 개나 줘버려 물러설 생각 따윈 1도 없어 Real 장군의 혼 그 이름 석자 배중손 끝까지 대항해 무길 놓지 않던 그의 손 그의 손에 달려있던 무게가 느껴져 전라남도 진도로 근거지를 또 옮겨 몽골과의 전쟁 쉬지 않고 계속해
절대로 여기서 끝낼 수 없기에 보여줬지 악바리 근성 그 결과물이 진도 용장성 배중손 그의 삼별초가 항쟁의 터전으로 삼고 쌓은 성 대몽항쟁 삼별초의 대몽항쟁(Yeah)(Yeah) 대몽항쟁 삼별초의 대몽항쟁(Ya)(Ya) 그들은 영웅이었을까 아님 정권 유지만을 위한걸까 진실은 나도 모르겠어 그러나 끝까지 저항해 맞서 싸웠어 계속해서 대몽항쟁 삼별초는 끝까지 포기 안해 그 소식은 널리 퍼져 퍼져 들어갔지 많은 사람들 귀에 사실 안 수 많은 사람들 자발적으로 입대해 다들 군사가 돼 각오가 돼 모국 위해서라면 싸워야 돼 But 수가 너무 많은 몽골의 군대 당해낼 수 없던 수적열세 장군 배중손을 비롯한 많은 삼별초 군사들이 목숨을 잃었대 비극적인 Story 답을 찾아낼 수 없는 상황이지 알고 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와서 멈출 수는 없지 뜻을 이어받은 장군 그 이름 김통정 최후를 준비하는 마지막 그 실정 본거지를 제주도로 옮긴 삼별초 그야말로 배수의 진 느껴지는 고초 애월읍 고성리에 자리잡고 있는 항파두리 성 사적 제396호는 삼별초의 새로운 기지 2년 동안 남해의 몽골 군대를 기습 공격하여 많은 피핼 입혔지만 피습 되었고 여몽연합군에 진압되고 나란 되찾지 못했지만 그들 노고는 고려인의 자주정신을 보여줬지 최후까지 몽골에 저항한 유일한 군대였지 무신 정권 유지의 의도를 떠나 의미가 남다른 사투였지 대몽항쟁 삼별초의 대몽항쟁(Yeah)(Yeah) 대몽항쟁 삼별초의 대몽항쟁(Ya)(Ya) 그들은 영웅이었을까 아님 정권 유지만을 위한걸까 진실은 나도 모르겠어 그러나 끝까지 저항해 맞서 싸웠어 대몽항쟁 삼별초의 대몽항쟁(Yeah)(Yeah) 대몽항쟁 삼별초의 대몽항쟁(Ya)(Ya) 그들은 영웅이었을까 아님 정권 유지만을 위한걸까 진실은 나도 모르겠어 그러나 끝까지 저항해 맞서 싸웠어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고려궁지에 지방 행정관서와 궁궐이 자리 잡았으며 궁궐 안에 의궤를 비롯한 총 1000여권의 서적을 보관하였던 왕립도서관 외규장각이 함께 세워졌습니다. 강화도는 이후에도 왕궁의 피난처로 사용되었고, 이에 따른 침략의 역사를 겪었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약탈당했던 외규장각 도서가 2011년 우리의 품으로 돌아오는 경사를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영상으로 확인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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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145년 만의 귀환이었다!국민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다시 제자리를 찾은 조선의 보물!외규장각 의궤! 자랑스런 우리의 역사!세계 그 어느 나라도 흉내낼 수 없는 한국의 기록유산!외규장각의궤가 돌아왔다! 145년 만에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2011년 7월부터 두달간 열린외규장각의궤특별기획 전시회!이 전시회에서는 프랑스에서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 297책 중 71책이공개됐는데, 외규장각 의궤는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하던 것으로임금이 보는 어람용이 대부분이다. 인목대비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연회를 기록한 풍정도감의궤. 외규장각 의궤 중 가장 오래된 유일본이다-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에게 존호를 올릴 때 의식을 기록한 장렬왕후존숭도감의궤. -1751년 현빈 조씨의 장례절차에 관한 기록한 의궤 <현빈예장도감 의궤> 경희궁 중건 과정을 기록한 서궐영건도감은 궁궐건축의 면모를 글과 그림으로 전해주고 있는데,앞으로 궁궐건축을 연구하는데 있어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프랑스에서 귀환한 외규장각의궤가 원래 있는 곳은 강화도 외규장각이다.병인양요 때 불타 소실된 전각을2003년에 복원한 것이다. 외규장각은 1782년 2월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규장각이다. 이곳에 임금이 보는 어람용 의궤를 보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병인양요 당시조선에 패배한 프랑스 군대가후퇴하는 도중, 외규장각 전각을 불태우고 의궤를 비롯한 340여 책의 문서를 약탈해 간 것이다. 역사 속에 묻혀버릴 뻔 했던 외규장각 의궤를 발견한 이는재불 서지학자 박병선 박사였다. 프랑스에서 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박병선 박사는 먼지가 잔뜩 쌓인 채 창고에 방치돼 있던 고서가 조선의 의궤임을 확인하고 그때부터 혼자서 프랑스에 있는 외규장각 도서 목록을 정리해,1979년 기자들과 한국 정부에 이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프랑스에선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동양의 오래된 고서가한국인에 의해 발견돼 그 가치가 입증되자, 프랑스 정부는 소유권을 주장하며 한국으로의 반환을 거부해왔다.박병선 박사 또한 의궤의 존재여부를 밝혔다는 이유로 프랑스 도서관에서 해임을 당했다. 하지만 박병산 박사는 프랑스가 고집을 부리면 부릴수록 의궤반환운동에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박병선 박사의 노력으로 학계와 정부, 시민단체 등 많은 사람들이 외규장각 도서 반환에 관심을 갖게 됐고, 1992년엔 한국 정부가 직접 프랑스에 도서 반환 요청을 하고 나섰다.
자막/ ▲1992년 7월 : 주프랑스 한국대사관, 프랑스측에 반환 요청.
▲1993년 9월 : 미테랑 대통령, 의궤 1권 전달하며 반환약속.
▲1994년 11월 : 영구대여 협상 무산.
▲2007년 2월9일 : 국내 시민단체 문화연대, 파리행정법원에 반환소송 제기.
▲2009년 12월24일 : 파리행정법원, 약탈은 인정했으나 반환청구 소송은 기각.
▲2010년 3월4일 : 한국정부, 프랑스에 외규장각 도서 191종 297권 영구대여 요청.
▲2010년 11월12일 : 한불 정상, 사실상 반환 공식 발표.
-그리고 마침내 2011년 5월 27일145년 만에 약탈당했던 우리의 역사,외규장각의궤 297책이고국의 품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박병선 박사를 비롯해 정부와 시민, 모두가 힘을 모아 이룩한 쾌거였다. 외규장각 의궤의 가장 큰 특징은임금이 감상하기 위해 제작된 어람용이라는 점이다. 어람용의궤는 분산용의궤에 비해색이 더 화려하고 여러번 덧발라 칠해도변색되지 않도록 최고급 안료를 사용했다. 겉표지도 분산용은 삼베를 사용한 반면어람용은 비단을 사용해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제목을 쓰는 부분도 비단을 덧대어 썼다.어람용 의궤는 종이도 최고급 종이인 ‘초주지’라는 한지를 사용했다. 일반한지보다 초주지의 밀도가 더 높아 먹이 번지는 것을 방지한다. 무엇보다 이번 외규장각 반환이 주는 값진 의미는 돌아온 297책 중 30책이 국내에 없는 유일본이라는 것이다.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왕실 전통행사를 복원하고 조선시대 궁중문화를 이해하는데 더할나위 없이 소중한 자료가 된다. 의궤는 상상이 아닌 현실이다!문자만으로 이해하기 힘든의식의 현장을 생동감 넘치는 그림으로 기록함으로서, 궁중의식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높이고 있다.-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철저한 기록정신을 바탕으로 완성된역사적 사실성과 예술성의 조화!세계가 부러워하고 인정하는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꽃, 의궤!의궤가 있기에 우리의 역사는 영원한 꽃을 피우고 있다.


세 번째 키워드 "삼척 궁촌리"입니다.

삼척의 궁촌리는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성계가 창왕을 폐위하고 옹립한 공양왕은 실권이 없던 꼭두각시 왕으로 조선의 건립과 함께 재위 3년 만에 폐위되고 맙니다.

이후 강원도 원주, 간성(현 고성 편입), 삼척을 거치며 유배 되었던 공양왕은 왕씨가 그 존재 자체로도 조선 왕실에 위협을 준다는 이유로 삼척에서 일가족과 함께 살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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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NA > 떠오르는 태양은 가슴 벅차지만, 지는 해는 아쉽기 마련이죠. 사라져가는 왕조를 마지막으로 품은 땅. 강원도에서 고려의 시작과 끝을 되짚어 봅니다. 강원도 철원은 궁예와 인연이 깊은 곳입니다. 궁예는 901년에 도읍을 개성에 두고 고려를 건국한 이후, 905년에 이곳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철원 평화의 전망대에 가면, 궁예가 세웠던 도성을 멀리에서나마 볼 수 있습니다. 성벽의 흔적만 남은 궁예도성의 위치는 비무장지대 안쪽. 군사분계선이 도성 한가운데를 지나갑니다. 고려를 세운 뜻은 컸지만 궁예의 폭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결국 왕건에게 왕위를 뺏기고 명성산으로 쫓기게 됩니다. 추격군에 의해 끝내 피살됐다는 설이 전해지는 명성산.. 이 곳은 궁예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해서 울음산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박광일> 전설이에요. 궁예와 왕건의 부대가 이곳 명성산 일대에서 접전을 벌였고 궁예가 폐퇴를 했다. 궁예가 머물렀던 곳이라고 해서 궁예봉, 궁예 능선이라는 이름이 남아있는 것죠.
NA > 강원도 고성군 왕곡 마을에선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다섯 개의 산으로 둘러싸여 계곡을 이루고 있다 해서 왕곡이라 불리게 된 이 마을은 하늘에서 보면 영락없는 배 모양입니다. 폐위된 몸으로 고성으로 유배 온 공양왕.... 고려의 충신이었던 함부열은 폐위된 공양왕을 따라 이곳에 내려왔고, 그의 차남도 옮겨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됐습니다. 왕곡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후 하나 둘 복원되어 지금은 북방식 전통가옥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는 마을이 됐습니다. 마루와 부엌을 한 건물 안에 나란히
배치하고, 뒤쪽은 벽을 두어 추위에 대비합니다. 왕곡마을은 국가 중요민속문화재입니다. 고려 말, 강원도 양양에선 새로운 나라를 꿈꾸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하륜과 조준은 왕실이 지도력을 상실하자 새로운 왕조 건립에 뜻을 두고 이곳 양양으로 내려왔습니다. 기암괴석과 바위섬들로 이뤄진 암석 해안. 그 위에 세워진 하조대 이곳에서 하륜과 조준은 새로운 세상을 계획했습니다. 아름다운 풍경과 천길 낭떠러지가 공존하는 곳... 새 나라를 꿈꾸던 하륜과 조준의 심정 또한 이곳 풍경 같지는 않았을는지... 그들은 훗날 조선의 개국 공신이 되었습니다. 삼척 공양왕릉 강원도 삼척에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릉이 있습니다. 공양왕은 무능한 왕이라는 평가와 착하고 여린 성품의 왕이었다는 평가로 엇갈립니다. 고려 멸망과 함께 유배 생활을 거듭하다 삼척에서 최후를 맞이한 공양왕.. 이곳에는 그의 두 아들도 함께 묻혀 있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전문가 > 역사기록하고 관련이 있을 겁니다. 공양왕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처음에 강원도 고성으로 유배를 갔다가 삼척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아마 그때 무덤을 만들었을 거구요. 태종때 무덤을 다시 정비했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고양 지금 원당쪽으로 옮겨왔을 것으로 생각이 되는대요. 두 개의 무덤을 알려주는 기록도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세종 17년 기록에 따르면 안성에 있었던 공양왕 초상화를 현 고양왕릉으로 옆으로 옮겨왔단 기록이 있구요. 허목의 ‘척주지’에 보면은 삼척에 공양왕릉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해볼 때 처음에 무덤을 만들었던 곳은 삼척이었고 어떤 이유에서 고양으로 옮겨왔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NA > 장식 하나 없는 쓸쓸해 보이는 느낌으로 고려의 마지막을 함께 한 비운의 왕... 그의 무덤엔 사라진 왕조의 쓸쓸함이 묻어납니다.


궁촌리에는 공양왕의 슬픈 최후를 보여주는 공양왕릉이 위치해있습니다. 놀랍게도 고양시에 공양왕의 또 다른 무덤, 그의 부인 순빈 노씨와 함께 묻힌 쌍릉인 고릉이 존재합니다. 고양시의 능은 조선 왕조가 인정하였고, 삼척의 능은 민간에서 전승된 것이나 모두 기록이 전해 내려오기 때문에 무엇이 진짜 공양왕릉인지는 밝혀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저 처음 삼척에서 만들어져 고양으로 이동했을거라 추측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왕이 머물렀던 마을이라는 이름의 ‘궁촌리’, 공양왕이 살해당했다는 고개라는 의미의 ‘살해재’ 등 관련 지명이 내려오는 것을 보면 공양왕의 최후를 봐야만 했던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알 것만 같습니다. 고려의 최후가 담긴 궁촌리를 비롯한, 강원도가 자랑하는 고려의 문화재들을 만나보시겠습니다.


http://www.k-heritage.tv/brd/board/275/L/menu/256?brdType=R&bbIdx=1654

<차이나는 클라스 70화 우리가 잘 몰랐던 나라, 고려>에 대한 두 번째 심화학습을 마쳤습니다.
고려의 시작을 함께한 만월대, 고려 역사 최대 환란을 버텨주었던 고려 궁지, 고려 마지막 왕의 최후를 함께한 궁촌리까지. 고려의 흥망성쇠를 한 눈에 본 느낌입니다.

비록 개성에 위치한 만월대는 찾아갈 수 없지만 맑은 가을 하늘 아래, 장대한 역사를 가진 고려를 만나러 강화도와 강원도 삼척으로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작성자 : 전체관리자 | 등록일 : 2019-07-26 | 조회수 :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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