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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문화유산여행] 차이나는 클라스 따라잡기 - 박현모 교수님과 함께한 새로운 세종의 이야기 심화학습 (#광한루 #수양대군 #자격루) (1)

도깨비와 함께하는 문화유산여행
 


 
박현모 교수님과 함께한 차이나는 클라스 61화에서는 조선 최고의 성장을 이뤄낸 세종대왕의 낯익은 모습이 아닌, 리더십이라는 관점에서의 색다른 세종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세종의 일꾼으로서 조선을 성장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던 많은 인재들에 대해 함께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세종을 따랐던 ‘인물’에 초점을 두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질까 합니다. 도깨비가 선정한 키워드는 3가지. 남원 '광한루'와 조선의 충신 '황희', 수양대군의 희생양이었던 '김종서', 자격루를 만든 천재 과학자 '장영실'입니다.


 
차이나는 클라스 따라잡기
광한루, 수양대군, 자격루, 훈민정음, 영릉



먼저 황희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세종대왕이 평민 차림으로 황희의 집에 찾아갔을 때, 그의 청렴한 생활에 깜짝 놀랐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올 정도로 황희는 ‘청백리’의 아이콘으로 불립니다.

하지만 차.클을 보셨다면 알 수 있듯이 뇌물수수 등 많은 문제를 일으켜 여러 번 파직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인 황희와, 하늘의 정원이라고 불리는 광한루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광한루

광한루


황희는 양녕대군을 두둔하였다가 임금의 미움을 사 남원으로 유배를 가게 되는데, 이 때 황희가 지은 곳이 바로 광한루입니다. 소설 <춘향전>의 배경이기도 한 광한루의 원래 이름은 ‘광통루’였습니다. 
1444년 학역재 정인지가 달나라의 궁전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처럼 아름답다하여 광한루라고 다시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안타깝게도 전쟁으로 인해 소실되어 현존하는 광한루는 재건된 것이지만, 그 아름다움이 인정되어 대한민국 보물 제281호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춘향이 뛰놀던 광한루. 영상으로 만나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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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조선 후기 판소리계 소설 ‘춘향전’ 속 춘향과 몽룡의 사랑 이야기로 유명한 남원 광한루. 하지만 광한루는 단지 이야기 속 연인의 장소만은 아니다. 호남제일루로 꼽히는 광한루를 처음 지은 이는 조선 시대의 유명한 재상 황희다. 이후 정인지, 정철 등 남원 부사들에 의해 신선의 세계를 지상에 재현한 관아정원으로 발전된 것이 바로 광한루원이다. 춘향과 몽룡의 애틋한 이야기로 더욱 풍성하고 아름다운 문화유산, 남원 광한루원. 가을 정취 가득한 정원 을 춘향과 함께 거닐어 본다.


다음은 김종서입니다.

김종서는 세종대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던 신하였습니다. 강직하고 유능하여 고위 관직에 올랐으며 단종이 즉위한 후에도 계속 임금을 보필하면서 충신의 표본과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왕의 세력이 아닌, 새롭게 권력을 쥐려는 야망을 가진 사람에게는 어땠을까요? 제일 큰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겠죠. 그래서 왕위를 취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던 수양대군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결국 그는 수양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이들의 관계를 영상으로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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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자막> 좌의정 김종서  영의정 황보인  우의정 정분 / 단종1년 (1453년)
na> 겨우 12살 나이에 왕위에 오른 조선의 제6대왕 단종. 어린 왕을 지키는 3총사가 있으니 바로 김종서, 황보인, 정분 등 3정승이다. 그러나....
안평대군(단종 둘째삼촌)님이 수양대군(단종 큰삼촌)을 초대했소이다.
안평대군 : 큰형님 진짜 너무한 것 같지 않아? 정승들한테 세자를 부탁하다니...그럼 삼촌들은 뭐가 돼?
수양대군 : 그거야 형님이 너 견제하느라 그러신 거 아니겠냐? 네가 욕심 있어 보이니까
안평대군 : 누가 할 소릴... 수양형님이야말로 관상이 딱 역모꾼 상이랍디다.
수양대군 : 그래? 그럼 내 관상 대로 한번 해볼까? 너부터 엎어주마!  
안평대군 : 아아냐... 넣어둬 내가 바빠서 이만... 안평대군이 퇴장했구료
수양대군 : 넣어두긴~ 넌 조금 있다 보자^-^
na> 문종은 수양대군의 야망을 눈치채고 죽기 전 자신의 어린 아들을 김종서 등 대신들에게 부탁했고, 그로 인해 신권이 강해지자 대군들의 불만이 커졌다.

한명회가 황보인(영의정), 정분(우의정)을 초대했소이다
한명회 : 다들 들으셨죠? 지금 당장 궁으로 들라셨소
황보인 : 근데 댁은 뉘슈? 웬 듣보... 흠흠
한명회 : 아, 제가 좀 듣보잡이죠? 수양대군 댁 집사입죠
정분 :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 밤에 들라시는게요?
한명회 :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속히 들라고 하셨답니다.
황보인 : 근데 김종서 대감은 어디 계시오? 안 알려드려도 되는게요?
한명회 : 그 분은 특별히 수양대군이 직접 모시러 갔습니다.
황보인 : 알겠네. 바로 출발하겠네 
na> 1453년 10월10일 늦은밤. 영의정 황보인, 우의정 정분 등은 임금이 급히 궁으로 들라했다는 전갈을 받는다. 그러나 이는 함정이었다. 수양대군의 심복인 한명회가 살생부를 만들어 수양대군에 반대하는 인물들을 죽이기 위해 만든 자리인 것. 한명회 일당은 궁궐 입구에 숨어있다가 대신들이 문턱을 넘을 때마다 차례차례 목숨을 빼앗는다.
자막> 영의정 김종서의 집 
na> 대신들을 죽이기 전, 수양대군은 직접 몸종 한 명과 무사 한명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들어가 김종서와
그의 아들 김승규를 철퇴로 제거한다. 이 때 죽은 사람이 무려 400명. 단종이 즉위한지 불과 1년 만에 일어난 조선 초 최대의 난,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자막> 김종서는 왜 반역을 꾀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어야했을까?
na> 한반도 동북 6진을 개척하여 조선의 국경을 확장한 문신(文臣) 출신의 장군으로 ‘백두산 호랑이’라 불릴 정도로 용맹을 떨친 인물이다. 태종 때부터 충직한 신하였던 김종서를 문종 역시 매우 신임하여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는데...
문종 : 내 해놓은 일 없이 가거니와 잊지 못하는 것이 어린 세자요. 간절히 부탁하노니, 부디 저버리지 말고 힘써 보호하여 주기 바라오.
na>12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단종. 단종의 영정단종 역시 김종서를 믿고 의지하였다.
na)문종이 어린 단종을 신하인 김종서에게 부탁한 데에는 단종의 어머니, 할머니가 모두 세상을 떠나 수렴청정을 할 왕실의 웃어른이 아무도 없는 것도 큰 이유였다.  단종의 가까운 피붙이는 왕위 경쟁자인 삼촌들뿐이었던 것이다.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 그는 김종서만 의지하는 어린 조카보다는 자신이 강한 왕으로서 조선을 더 잘 이끌 것이라 믿었다. 
수양대군 : 김종서만 없으면 조선은 내 것이다. 강한 왕이 되어 더 강한 조선을 만들 것이다!
na> 수양대군은 결국 단종을 몰아내고 1455년, 스스로 왕이 되었다. 세조다.
자막> 1455년 세조 재위
na> 세조는 강력한 왕권주의자였다. 재상의 기능을 약화시키고 세종때 중심기구인 집현전도 없애버렸다. 세조 어진에 귀마개 막히는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이렇게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며 호적·호패제 강화 토지개혁 등 치적을 쌓았다.
na>그러나 재위 기간 내내 ‘왕위찬탈자’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훈구대신들의 장막에 싸여 그들의 입김에 휘둘렸다.
자막> 관리가 세조를 초대했습니다
관리 : 전하~ 한명회가 재상들의 재산을 빼았습니다
세조 : 냅둬라~ 고생하지 않았느냐
관리 : 전하~ 훈구대신들이 세금도 안내고
세조 : 냅둬라~ 훈구대신들 몫까지 백성더러 내라 해라
관리 : 전하~ 훈구대신들이 살인을 저질...
세조 : 아 냅두라니까! 어차피 계유정란 때 죽은 놈이 400이니라
한 명 더 죽이는 게 뭐 대단하다고 그러느냐
관리 : 전하 조전이 훈구대신의 나라이옵니까
세조 : (읽지 않음1 표시)
관리 : 전하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옵니다
세조 :  (읽지 않음1 표시)
관리 : 전하~ 혹시 저 차단하신 것이옵니까? 전하?
세조 (읽지 않음1 표시)

na> 세조는 강한 왕권을 외치며 계유정난을 일으켰으나, 정당성 결여로 오히려 훈구대신의 눈치를 봐야했고. 다음 왕인 성종은 약화된 왕권을 감내해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조선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을 만날 차례입니다.

세종대왕은 신분보다 실력을 중시했고, 따라서 신분이 천하더라도 개인의 능력을 알아보고 인재를 등용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장영실도 천민 출신이었지만 세종의 신임을 얻어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엄청난 발명품들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죠. 장영실 또한 신분과 상관없이 실력으로만 자신을 믿어준 세종에게 충성을 다했습니다.

 
자격루
 
자격루


장영실의 발명품 중 대표적인 것은 앙부일구, 자격루, 혼천의 등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였던 자격루는, 농사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시간’을 어떻게 하면 정확하게 알 수 있을까 하는 세종대왕의 고민에서 탄생했는데요.

어떻게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를 만들었을까요?
영상으로 함께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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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na : 무려 500년 전에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가 있었다? 덕수궁 안에 자리하고 있는 국보 229호 자격루- 스스로 치는 물시계다.
인터뷰 : 자격루는 일단 사람이 매시간 체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되면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자동기능이 있어서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기계였고요.
na : 세종 때 만들어 사용하다 없어진 것을 중종 때 복원해 중종 자격루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현재 남은 건 만든 세 개의 항아리와 물통 뿐! 이것으로 어떻게 시간 자동 알람이 가능했단 것일까? 자격루 작동의 비밀을 풀어보자.
[조선 정말 기술의 완전체 자격루]
na : 지난 2007년 자격루가 복원됐다. 그간 보아온 청동 물항아리에 가로 세로 각각 2미터, 높이 6미터의 자동시보장치가 연결되면서 제 모양을 갖추게 된 것이다.
자막 : 자격루 (1434년 세종).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 물시계로 사람이 눈금을 일일이 읽지 않고도 때가 되면 저절로 시각을 알려주는 물시계
자막 : 자격루 (1434년 세종). 아라비아식 자동시간 알림 장치인 시보장치를 물시계와 결합한 매우 정확한 표준시계
na :3단 구조의 항아리를 거쳐 흐른 물이 구슬을 움직이면 정해진 시간에 맞춰 종과 징, 북소리가 났다는 자격루. 이 자동시보장치는 어떻게 작동했던 것일까?
자막 :  1.물시계(파수호) - 1열 3단으로 배치되어 대파수호 종파수호 소파수호 순으로 흘러간 물이 수수호에 채워진다. 
na : 먼저 수압을 고려해 3단으로 놓여있는 물항아리에 1분당 100cc의 물이 흘러내려 간다.
자막 : 2.수수호 - 물받이 항아리 수수호에 물이 고이면서 부력에 의해 부전이 위로 떠오르면서 부전의 잣대가 위에 설치된 작은 구슬을 떨어뜨린다. 
na : 이 물은 일정한 속도로 차오르게 되는데 어느 정도 높이에 이르면 안에 있는 부표가 구슬판을 밀어 올려 작은 구슬이 나오게 되고 이 구슬이 자동시보장치로 들어가면서 큰 구슬을 움직이게 한다.
자막 :  3.시보장치 -  눈금잣대에서 밀어 떨어뜨린 작은 쇠구슬이 관을 지나면서 지렛대의 원리로 더 큰 구슬이 있는 다른 틀에 떨어지면서 수저 모양의 막대기를 누르게 되고 막대기의 다른 쪽이 들어올려지면 인형의 팔을 들어 올려 종을 치게 되는 구조
na : 큰 구슬은 떨어지면서 처음보다 힘이 커지고 종이나 북, 징을 치는 시보 기구에 연결돼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게 된다. 동시에 십이지시에 맞춰 목각인형이 자동으로 나온다.
na : 즉 자격루는 쇠구슬이 떨어지면서 생긴 동력으로 나무인형이 종과 북을 쳐서 시보장치를 움직이게 하는 디지털 알람시계의 원리를 덧붙인 것이다. 그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파수호는 제일 위에서 물을 부으면 2개의 물통을 거쳐 긴 물통에 모이도록 만들어졌다.
인터뷰 : 3단으로 배치되어 있는 파수호들의 용량을 달리하는 것은 일정한 수압에 의해서 다음번 항아리로 물을 전달하기 위한 기저장치입니다
자막 : 수압을 일정하게 조절하는 원리.  소파수호에 1.5cm의 구멍을 내 흘러온 물이 넘치지 않게 빼내어 일정한 수압을 유지시키게 됨
na : 마지막 물통에 떨어지는 수압의 세기와 물의 양은 항상 일정해야 한다. 그래야 부표가 일정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정하지 않으면 시간도 길었다 짧았다 할 것이다. 때문에 마지막 항아리에 1.5cm의 구멍을 내어 일정 높이 이상으로 물이 차면 넘치도록 만들었다.
인터뷰 : 항아리가 3개 있죠. 그것을 넘쳐 흐르게 한 것이 폐수호인데 폐수호에서 이쪽으로 내려오는 거예요
na : 500년 전에 수압의 원리를 이해하고 장치까지 만든 것이다.
인터뷰 : 그래서 3번째 항아리에서는 물을 넘쳐 흐르게 시켜서 수압을 일정하게 해 수수호로 물을 공급 시켜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데 넘쳐 흐르게 된 물은 폐수호로 흘러내려 오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물시계의 시간을 가장 정확하게 측정하는 원리가 여기 숨어있는 것입니다.
na : 파수호를 거친 물이 모이는 수수호는 물시계에서 디지털시계로의 전환이 이뤄지는 연결 장치다.
자막 : 수수호. 물시계를 디지털시계로 전환시키는 연결 장치
na : 물이 차오름에 따라 부표에 꽂아놓은 잣대가 떠오르면서 미리 설치해 놓은 작은 구슬을 떨어트리는 것이 그 시작. 이 구슬이 자동시보장치와 연결된 구리통으로 굴러 들어가는 것이다.
인터뷰 : 이 수수호 안에는 부표 위에 잣대를 설치하게 됩니다. 이 부표는 물이 일정하게 공급하면 부표가 서서히 떠오르게 되고 잣대 눈금을 읽게 되는데 그걸 시간으로 읽게 되는 것이 물시계입니다.
na : 자격루의 핵심인 자동시보장치는 스스로 종과 징, 그리고 북을 울려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기 위해서 매 시간마다 정해진 구슬이 떨어져야 하고 그 구슬이 지렛대를 움직여 원하는 장치를 작동시켜야 한다.
인터뷰 : 자격루의 자동시보장치에는 특별한 동력장치가 없습니다. 이것은 철환방출장치를 통해서 작은 구슬이 큰 구슬을 자유낙하 시켜서 지렛대의 원리에 의해서 인형을 돌리고 하는 것이죠. 동력장치가 작은 구슬이 큰 구슬로 힘을 증폭시켜서 소리를 내고 기계를 돌리고 하는 지렛대 원리가 이 기계 안에 숨어있는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na : 자격루가 완성될 당시의 기록을 보면 각각의 크기와 구조, 움직이는 순서까지 세밀하게 적혀있다. 이에 따르면 큰 구슬이 떨어져 수저모양의 받침을 누르면 인형의 팔이 움직여 징을 치게 된다. 이어 구슬이 두 번째 수저모양의 받침을 누르면 각각의 시각에 해당하는 인형이 시보상자 구멍에서 튀어 오르게 된다. 이때 2시간 간격의 시에는 종을 120분 간격의 경에는 북을 24분 간격의 점에는 징을 울려 시간을 알렸다.
자막 :  인정·파루 제도. 도성문을 닫고 여는 시각을 규정한 것으로 태정 원년부터 시행된 치안유지제도
na : 보루각 자격루가 스스로 시간을 알리면 육조거리에서 북을 쳐 종루에 전해졌다. 종루에 시간이 전달되면 보신각의 종이 울리고 이후 남산의 봉수대를 통해 한양 성 밖까지 널리 시간을 알려 백성의 시간과 일과를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
인터뷰 : 밤 10시가 되면 종을 쳐서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 시켰는데 이것이 부정확하게 되면 사람들의 원망이 많았고 이것으로 인해서 치안의 문제가 생겼고 농사지으려면 시간이 중요한 수단인데 그것이 맞지 않으니까 문제점이 많아서 세종께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으면 좋겠는가 백성을 위하는 측면과 국가의 운영 측면에서 자격루를 고안해낸 것입니다. 측우기보다 먼저 만들어졌던 자격루는 15세기 동아시아 과학에서는 획기적인 장치라고 할 수 있죠. 중국에서도 원나라나 송나라 때 기록만 남아있을 뿐이지 이런 자격장치가 달린 그런 것은 없거든요. 이것을 만들고 난 뒤에 20년 뒤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태어납니다. 다빈치가 태어나기 20년 전에 이러한 과학기구를 이미 만들어서 널리 사용하고 측정하고 시간을 측정해서 백성들이 생활하는데 있어서 이로움을 줄 수 있는 과학 기술 도구를 만들어서 사용했다는데 가장 큰 의의가 있습니다.
na : 우리만의 시간을 갖고자 했던 세종과 각고의 노력으로 새로운 관측기를 개발한 장영실.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조선의 국가표준시계 스스로 울리는 자동시보시계 자격루를 완성했다.


신분제가 곧 진리였던 조선시대에 세종이 신분에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할까요?

단순하게 보면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탁월한 임금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왜’ 그랬을까를 생각해본다면 신분과 같은 관례보다는 국민과 나라의 실리를 우선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는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려 600년 전에 여성노비는 물론 그 남편에게도 출산휴가를 줬을 만큼 백성을 생각했던 왕, 다음 시간에는 이런 왕 ‘세종’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작성자 : 전체관리자 | 등록일 : 2019-07-18 | 조회수 : 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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