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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문화유산여행] 차이나는 클라스 따라잡기 - 궁궐의 도시, 서울 '조선의 멋과 여유'

도깨비와 함께하는 문화유산여행

 
우리가 문화유산을 더욱 사랑해주기를 바라시는 유홍준 교수님과 함께하는 서울 이야기도 어느새 마지막입니다.
마지막으로 떠난 곳은 바로 창덕궁 후원.

창덕궁 후원은 예약제로 운영되어 평소에도 해설사의 안내를 따라 관람할 수 있는 곳입니다.
차이나는 클라스 35화 <궁궐의 도시, 서울 ‘조선의 멋과 여유’>편에서는 유홍준 교수님께서 직접 창덕궁 해설사가 되어 안내를 해주셨습니다. 왕과 신하들이 풍류를 즐겼던 창덕궁 후원으로 함께 떠나봅니다.



 
차이나는 클라스 따라잡기
창덕궁 후원, 창덕궁과 왕들



# 창덕궁 후원

창덕궁은 조선 태종 1405년에 건립되었습니다. 1년 뒤 왕실 정원인 후원을 조성하였고, 이 후원은 현재까지 남아 우리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 궁궐 중 유일하게 창덕궁만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왜 창덕궁만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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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검소하지만 초라하지 않게,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게 우리나라 궁궐 건축과 전통 후원의 아름다움이 가장 돋보이는 곳, 창덕궁
계절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고궁의 네 가지 향기
창덕궁 -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한국 건축의 조형미와 자연관을 대표하는 궁궐, 창덕궁. 창덕궁은 사계절 어느 때 찾아가도 그 계절만의 아름다움과 멋스러움이 담겨 있다. 향기로운 꽃내음 가득한 봄, 싱그러운 초록의 향연이 펼쳐지는 여름, 알록달록 비단이 깔린 듯한 가을, 그리고 은빛 눈꽃이 눈부신 겨울 설경까지. 계절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고궁의 흥취, 창덕궁의 사계(四季)를 감상해본다.
창덕궁 방문 정보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번지
연락처 : 창덕궁 관리소 02-762-8261/9513
관람시간 : 09:00~18:30 (입장은 15:30까지)
주변 볼거리 : 창경궁, 경복궁, 종묘, 경운궁(덕수궁)
 
 
창덕궁은 원래의 자연 지형을 존중하기 위해
궁궐 건축의 전통을 이탈하지 않으면서도 창조적 변형을 가해서 지어졌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자연적인 산세와 지형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정형성을 벗어나
자유롭게 건물을 배치해 건축과 조경을 하나의 환경적 전체로 통일시킨 훌륭한 사례이다.
-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기준 (ⅳ) -
 

바로 자연과의 조화가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유홍준 교수님께서도 중국,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의 정원을 비교하시며 중국의 정원은 괴석을 갖다 놓고, 고깔 모양의 정자를 세우는 등 형태가 과장되어 있고, 일본의 정원은 빈틈없이 디자인되어 잘 정제되고 균일화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사람의 손길이 많이 닿은 인위적인 정원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정원은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여, 자연을 인위로 가두지 않는 미학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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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자막> 차경(借景)경치를 빌린다 / 소유하고 변형하는 것이 아니라경치를 잠시 빌려 즐기려는 자연친화적 태도 / 화려하게 눈길을 끌기보다소박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추구 / 조화로운 삶을 담아낸 한국 전통 정원

<문화유산 여행길>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삶 – 한국 전통 정원의 미학
NA>전통의 아름다움을 따라 떠나는 여행,첫 여행지는 창덕궁입니다.
자막>창덕궁(사적 제 122호)조선 태종 때에 지어진 궁으로, 나라에 전쟁이나 큰 재난이 일어나 정궁을 사용하지 못할 때를 대비해 지은 이궁
NA>아름다운 후원 때문에 창덕궁을 좋아하는왕들이 많았다는데요. 산자락을 따라 조성한 창덕궁 후원은 한국 전통 정원 중 가장 유명한 곳입니다.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이 함께 어우러진 이곳은, 인공적으로 깎고 다듬기보다 자락에서 후원으로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해 아름다움을 더한 것이 특징입니다.
자막>창덕궁 후원. 부용지 중심 권역, 애련지와 연경당 권역, 반도지 권역,옥류천 권역 등으로 구성
NA>이 정원은 조선 여러 왕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습니다. 조선 태종 때에는 터를 정하고, 세조 때에는 연못을 파고 정자땅을 넓혔으며, 광해군 때에는 이곳에 여러 개의 정자를 지었습니다. 특히 인조는 정원에 남다른 취미가 있어,지금의 옥류천을 만드는 등 후원의 뼈대를 조성했습니다.
자막>옥류천 창덕궁 후원 북쪽의 깊은 골짜기에 있으며 인조 14년(1636)에 조성했다
자막>옥류천. 소요암에는 인조가 쓴 ‘옥류천’이라는 글씨와 숙종이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
NA>소요암이라는 널찍한 바위에 U자형 홈을 파서 작은 폭포처럼 물이 떨어지게 만들었는데요. 임금은 이곳에서 신하들과 더불어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후원은 왕과 왕실 사람들의 휴식처였을 뿐만 아니라, 국왕과 왕자들이 글을 읽고 학문을 연마하거나 과거 시험을 치르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정조는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세우고 유생들을 길러내 새로운 정치와 문화를 펼치려 했습니다. 창덕궁 후원에 있는 아담한 연못 부용지는 네모난 연못 안에 작고 동그란 섬이 있는 모양으로, 네모난 연못은 땅을, 연못 속의 둥근 섬은 하늘을 나타내, 음양의 조화를 담고 있습니다.
자막>부용지. 동양의 음양사상을 담아 만든 연못
NA>부용지 남쪽에 있는 부용정은 작은 정자지만, 오밀조밀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막>부용정. 부용지 안에 세워져 있는 정자로 왕과 왕족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독서를 하던 장소
NA>창덕궁 후원은 우리나라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을 잘 보여주는 곳으로,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창덕궁 후원 돌고 발길을 향한 곳은 경복궁입니다.
자막>경복궁(사적 제117호). 1395년(태조 4년)에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처음으로 세운 궁궐로 임금이 주로 머물던 곳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고종 때 다시 재건했다.
NA>경복궁은 임금이 주로 머무는 정궁으로, 그곳에 있는 경회루는 사신을 대접하거나 공신을 위한 연회 장소였습니다. 간결하면서도 호화롭게 장식한 모습은, 조선후기 누각 건축의 특징을 그대로 담고 있는데요.
자막>경복궁 경회루(국보 제 224호)
NA>처음 지을 당시 경회루는 작은 규모였지만, 태종 때에 연못을 넓히면서 크게 다시 지었고, 임진왜란으로 불탔던 것을 고종 때 재건했습니다. 경회루에서 정원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려면 왕의 자리를 찾아가면 됩니다. 왕의 자리에서 바라봤을 때 가장 아름답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인데요. 경회루에서 왕의 자리는 누각의 한가운데로, 이 자리에 남산부터 인왕산, 북악산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또 아래로 보이는 물에 비친 하늘과 산의 모습은 아름다운 한 폭의 예술작품 같습니다. 경복궁 북쪽 후원에는 연못 향원지와, 물 한 가운데 있는 육각형 정자, 향원정이 있는데요.
자막>향원정 (보물 제1761호)
NA>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간섭에서 벗어나 친정체제를 구축하면서 정치적 자립의 일환으로 건청궁을 지었습니다.
자막>건청궁. 1873년 고종이 경복궁 중건을 마무리하면서 국가 재정이 아닌 왕의 사비를 들여 궁궐 안의 가장 깊숙한 곳에 지은 궁 
NA>그리고 건청궁 앞에 연못을 파서, 가운데 섬을 만들고 2층 정자를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향원정입니다.
자막>향원정 (보물 제1761호). 육각형 초석, 육각형 평면, 육모지붕 등 육각형으로 공간을 구성하고 섬세하고 미려하게 다듬은 2층 정자
NA>향원지는 연꽃을 상징하는데요. 다시 그 연꽃은 군자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향기가 멀리 간다는 의미의 ‘향원’이라는 이름처럼 아름다움의 향기가 멀리 퍼지는 듯 합니다.
NA>꽃이 만개하는 봄에는, 왕의 정원을 보는 동시에 조선궁궐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는 궁중문화축전이 열립니다. 궁중문화축전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등 4대궁과 종묘에서 펼쳐지는데요. 궁궐을 거닐며 의례와 자연, 일상과 연희, 그리고 제례 등의 다양한 테마를 체험하며, 궁궐의 품격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막>궁중문화축전.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종묘에서 펼쳐지며 의례, 자연, 일상, 연희, 제례 등 궁궐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NA>또한 궁궐의 아름다운 야경을 체험 할 수 있도록 고궁야간 특별관람도 이루어지고 있는데요. 특히 창덕궁 달빛기행은 돈화문에서 시작해 금천교를 지나 인정전과 낙선재를 돌아보는 코스로, 걷다보면 어느새 은은한 달빛에 취하게 됩니다. 인간의 힘을 더해 인공적으로 만들려 하기보다,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려 했던 우리의 선조들.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삶을 깨닫게 하는 여행, 정원의 아름다움을 찾아 산책을 나서는건 어떨까요?

이렇게나 아름다운 우리의 정원. 창덕궁말고도 우리나라에는 많은 정원들이 있다는 것, 알고 계셨나요?
휴스턴 국제영화제 수상작 ‘한국의 정원’을 통해 우리나라 정원의 아름다움을 문화유산채널에서 감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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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na :평범하고 소박한 가운데 진실과 아름다움이 있음은 쉽게 놓쳐버린다.
성석제 : 하늘과 자연과 사람과 세상이 다 모여있다. 여기서 보니까 그게 확실히 느껴지네
na : 자연을 끌어들여 품에 안은 한국의 정원.
최종희 : 지친 현대인들에게 자연을 우리 일상에 끌어들여서 마음의 때를 벗기고 심리적으로 생명의 부활같은 것들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정원은 위로와 격려의 공간입니다.
na : 한국의 정원엔 선조의 철학과 예지가 오롯이 담겨있다. 500년 시간을 거슬러 만나는 지혜의 숲. 잃어버린 참 나를 만나러 간다! 깊고 짙푸른 동해 바다를 보며 생각한다. 스스로는 억센 파도로 다스리며, 타인에겐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동해바다와 나란히 하고 있는 청송의 띠를 넘으면, 푸른 하늘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경포호가 있다. 거울처럼 맑은 호수다.
성) 여기가 경포 호 동쪽이죠? 여기서 배를 타고 저기까지 건너갔다고 해서, 배 선자를 써서 선교가 되었다고 해요 거기서 다리를 건너 들어갔다고 해서 선교장이라는 이름이 경포호가 그 전에는 이렇게 넓은지를 몰랐는데, 그렇다고 여기를 건너가려면 꽤 오래 건너가야하고 중요한건 꼭 건너가야 할 이유가 있어야 건너가죠. 먼 길이니까
최)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갈 수 있어요 / 성) 그 생각은 못 해봤네 / 최) 어디든지 저 정도야
성) 그렇군요 사랑은 어디나 있지 / 최) 절실하면 다 가능하겠죠
na : 소설가 성석제와 화가 최석운. 동갑내기에 생일까지 일치하는 두 사람은, 서로에겐 편안한 여행친구다. 발길은 자연스럽게 선교장으로 향한다.  
흰) 여기가 선교장 다리, 집, 큰 집입니다
장소) 선교장 /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
국가 민속 문화재 제5호.  조선 영조(1703년)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내번이 지음
na : 우거진 송림을 배경으로 그림처럼 자리 잡고 있는, 99칸 조선사대부가의 집. 전형적인 양반주택인 선교장에서 사랑채가 되는 열화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이름을 지었다
자막 : 귀거래사 / 세상과 더불어 나를 잊으니 / 어찌 벼슬을 구할 것인가. /친척들과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 나누고 / 거문고와 서책 즐기며 우수를 떨쳐 버리리라 
na : 행랑채 바깥마당 앞에 놓인 활래정은, 선교장에선 빼놓을 수 없는 아름다운 공간이다.
이왕기) 활래정은 선교장이라고 하는 사대부 집 앞에 있는 정자입니다. 인위적으로 연못을 만들고 그 연못 안에 섬을 만들어서 신선이 사는 봉래산처럼 조성을 하고, 그 연못에 기대어 활래정을 만들었습니다.
흰) 저쪽에 있는 게 활래정. 뭔지 모르지만 활기 같은 게 느껴지네요.
na : 관동제일의 사대부가다운 풍모를 보여주는 고택. 이곳 선교장에서 나고 자란 19대손 이강백씨가 길손을 맞는다.
성) 주인어른 되시는군요. / 이) 수고 많으셨습니다. 선교장 관장입니다.
성) 활래정이 무슨 뜻인가요?
이) 활래. 그러니까 힘차게 온다는 이야기죠. 쉽게 이야기하면 옛날에 우리가 정자를 지으면서 기복사상이 포함되어 있죠. 기도 오고 복도 오고, 모든 것들이 힘 있게 다가온다. 자손도 많이 다가오고.
na : 중국 남송의 주자를 흠모했던 이내번의 손자 이 후가, 주자가 쓴 시 구절인 ‘활수래’에서 1816년(순조 16)에 이후(李垕)가 지음.  ‘활’자와 ‘래’자를 따왔다. 
자막 : 관서유감 ‘근원으로부터 끊임없이 내려오는 물이 있음일세’                 
na : 추사 김정희를 비롯해 흥선대원군, 몽양 여운형, 백범 김구 등 많은 인사들과 시인묵객들이 관동 8경을 구경하러 오가는 길에 이곳에 머물다 갔다.
이) 백두대간에서 내려오는 맑고 깨끗하고 기가 쎈 찬 물들이 이 연못으로 들어왔다가 나가요. 호수로, 여기는 사실 저희들 여름 정자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안에서 기거 하시면서 손님들 오시면 손님맞이 하면서 시문을 읊으시고 또 음악도 즐기시고 여기가 현재 상태로 보면 연잎 위에 앉아 있어요. 이 위치에도 물 위에 앉아있고 그래서 이 연 향이 마루 사이로 올라와서 여기서 오침을 하시면 그렇게 몸에 좋다고 그러더라고요. 
성) 아 몸에 좋다고
na : 욕심내고 꾀를 부리는 마음을 다스리면, 작은 연못도 호수와 바다가 될 수 있다.
이왕기) 사대부들이 정원을 꾸미는 것은 자연 속에서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자 함도 있지만 유학적 천인합일의 도를 이루려고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사대부들이 정원을 꾸미려 하는 게 그들의 생각이죠.
na : 선교장엔 사연을 가진 나무 하나가 있다.
이) 마당에 나무를 별로 안 심는데 선교장에 있는 나무 하나 있죠? 이게 능소화입니다. 선비 꽃이라고도 하죠. 이 열화당을 짓고 한 50년 후라고 제가 이야기를 들었는데,
자막 : 충청도 서해안에 사는 선비가 금강산과 관동 팔경을 유람하던 중에 선교장에 들려 머무는 동안 자신의 고향 충청도에 능소화 자랑 하며 나중에 강릉에 오는 일이 있으면 가져오겠다는 약속을 지켜 선교장에 능소화 나무가 심어졌다
이) 그분이 돌아가시면서 유언이 내가 그 집에, 강릉 선교장에 다시 돌아가서 능소화를 심어주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내가 죽게 되어서 그 약속을 못 지키니 하인을 시켜서 심어준거에요. 옛날에 양반들이 심성들이 얼마나 곱고 또 약속을 잘 지키고 
성) 약속 나무라고 해도 되겠네요.
이) 그러니까 우리 손자들 보고 이제 가훈 비슷하게 이걸 심어놓고 느끼라고 이거 하나만 남겨 논 거지요.
성) 사람이 생전에 한 약속을 죽기 전에 꼭 지킨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감동이 있어요.
최) 감동적인 나무네요
최재영) 예로부터 우리나라 정원에 심어져 있는 수종들을 대체적으로 보면 꽃과 열매 단풍들이 사계절 변화를 주는 이런 나무들을 주로 심었습니다. 연못에는 연꽃을 심었는데 진흙 속에서도 아주 맑은 깨끗한 꽃이 피기 때문에 군자의 꽃이라고 해서 선비들이 많이 즐겨 심었다고 봅니다. 그 외에도 소나무라든지 대나무 이런 종류들을 심었는데, 소나무는 사계절 푸르고 절개를 상징하는 그런 의미가 있고 대나무는 푸른 기상을 가진 나무기 때문에 많이 심었습니다.
성) 나는 기 이런 걸 별로 안 믿는 사람인데, 이 소나무를 보면 특히 금강송을 보면 그런 게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
na : 선교장에 쌓인 시간을 느끼며 노송 숲을 거닌다. 사철 푸르지만, 어느 계절도 버릴 게 없는 곳이 선교장의 정원이다. 선교장의 후원을 거닐며, 옛 사람들도 어지러운 마음을 수양했을 것이다. 관동 제일의 사대부가다운 풍류와 멋이 살아있는 선교장. 선교장 정원은 양반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소작인들의 애환을 공감하고 검소와 덕을 베푸는 마음을 수련했던, 넉넉한 공간이기도 했다. 조선 사대부가의 고택 정원은 우아함과 정겨움, 폐쇄적인가하면 개방적인 공간으로, 길손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던 곳이다.
자막 : 김계행 /  조선 전기 문신. 고령현감  부수찬 등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삼사의 요직을 두루 지내며 간쟁 업무에 힘썼다 거택 옆에 작은 정자를 짓고 보백당이라 이름 짓고 학생들을 모아 가르쳐서 보백 선생이라 불렸다
na : 보백당 김계행은 50세에 과거에 급제해 늦은 나이에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1498년 연산군 4년, 대사간에 올라 간신들을 탄핵하다가 훈구파에 의해 제지되자, 벼슬을 버리고 안동으로 낙향했다. 낙향했을 당시에도 정국은 복잡하고 불안하던 시절이었다. 수차례 이직과 체포, 구속과 석방 끝에 그는 고향의 물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은일의 삶을 살았다.
최) 이 다리를 막 건너가면 안 될 것 같은데 / 성) 좀 경건하게
최) 마음가짐을 다잡고 가요. 여긴 속세고 저기는 / 성) 극락?
최) 마음을 비우고 해탈하듯, 좀 경건하게 가세요
이왕기) 정원은 크게 나누면 내원과 외원으로 구분이 되는데 자연스럽게 생긴 계곡 안에 축대를 쌓고 누정을 짓고 선비들이 좋아하는 수목으로 심고 인위적으로 손길이 갔던 그 일대, 그 영역은 대체적으로 내원이라고 본다면 그 주변에 있는 자연경관은 외원. 이렇게 다 포함해서 하나의 정원으로 완성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막 : 만휴정 /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경북문화재자료 제173호. 보백당 김계행이 1500년(연산군 6)에 건립
최) 만휴정이네요. 이름이
성) 만휴. 뒤늦게 나이 들어 쉬는 그런 정자. 벼슬자리에 물러나서 깨끗하게 살아온 사람으로서, 나중에 쉬는 그런 자리에요
최) 저 다리 건너오기 전에는 속세에서 막 부딪히며 살다가 이 다리 건너와서 여기 와서 만휴정에서 쉬는 거예요
성) 방향은 또 속세를 바라보게 되겠는데? / 최) 바라보는 게 속세가 되나?
성) 저쪽은 아닌 게 아니라 욕망이 들끓고 있는 속세고 / 최) 다 버리고
성) 다리 건너오면서 쉬는 거죠. / 최) 모든 미련이나 탐욕을 버리고
 na : ‘늦게 얻은 휴식’이었다. 김계행은 집이 있는 보백당과 만휴정을 오가며, 고되고 힘들었던 인생 끝에 얻은 평화를 마음껏 즐겼다.
최)여기 적혀 있는 게 아마 이 집의 가장 대표적인 문구 같은데요
성) 그렇지 말하자면 이런 게 가훈 후세에 내려진 가훈 같은 건데 ‘우리 집에는 보물이라고는 없다 보물은 오로지 청백함뿐이다’ 후손에게 내리는 그런 말씀이기도 하고요, 분위기 자체가 불필요한 거 없이 깨끗하고 낭비 없고 이 정자도 그렇고 이 주변에 뜰 안에 있는 나무 하나 풀 하나 불필요한 거는 하나도 없고요 화려할 것도 없고
최) 집주인을 닮았겠죠?
성) 집주인의 성격이 집과 뜰에 그대로 담겨 있는 것 같아요. 여기는 물소리하고 숲이 정말 절경이네요
최) 처음에는 물소리가 시끄러웠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성) 점점 음악소리로 변해가고 이쪽으로 건너오면 뭔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되는 거고 나가면 다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거고 
최) 그럼 우린 깨달은 건가 나가면 안 될 것 같은데 / 성) 하여간 여기가 굉장히 편해요 여기 그냥 가만히 있어도
최) 나가지 맙시다 그냥 여기 있어요  천국입니다. 속세를 떠나서 탐욕을 버리고 여기 돌아왔건만 우리는 다시 돌아가야 될 것 같은데 저쪽으로
성) 그쪽이 좋을 때가 있죠 / 최) 조금 더 가서 좀 부딪히고 살아 보다가 돌아오던지 합시다
성) 나이 들면 돌아와서 쉬어야 되겠네요 / 최) 너무 좋습니다.
성) 맑고 깨끗하게 살다간 분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하고는 전혀 다른, 본받을게 많은 그런 분의 삶의 흔적을 이런 정원과 정자를 통해서 더듬어 볼 수 있게 된다는 것도 배움이죠.
최) 처음에는 시끄러웠어요 계곡 물소리가 ‘그래서 왜 이렇게 시끄러운 곳에 정자가 있지? 다른 데에 비해서 시끄러운 곳이다‘ 라고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거의 안 들려요 이상하죠 그래서 아마 제가 처음 들어왔던 그 물소리는 잘못 들은 소리다. 아직도 때가 묻은 귀를 가지고 있어서 그러나 지금은 아주 고요하게 들립니다
na : 만휴정은 인공적인 요소가 극히 절제된 ‘별서정원’이다.
이왕기) 사대부들이 별서정원을 만들 때에는 경관이 좋은 곳을 찾아가서 거기에 건물을 짓고 특별히 꾸미지 않아도 그 주변이 수려하니까 그 자체로 자연경관을 즐길 수 있지만, 사람이 많이 사는 곳에서는 그런 경관을 즐기기  어려우니까 터를 넓게 확보해서 그 경관을 축소해서 만든 거예요. 그게 곧 정원이라고 보면 되겠죠
na : 말년의 생활을 은둔과 사색으로 보내고자 자연 속에 별서 정원을 조성했던 또 한 선비가 있다. 금곡천을 바라보는 경관을 방해받지 않고자 절벽 위에 지어진 초간정.
자막 : 초간정 / 경북문화재자료 제143호. 조선 중기의 학자 권문해가 1582년(선조 15)에 지은 정자
이왕기) 초간정은 특별히 정원을 꾸미지 않아도 그 주변이 이미 훌륭한 자연경관이 형성되어 있어요. 물이 굽이쳐 흘러가는 바위 위에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정자를 만들었어요. 초간정 같이 할 수 있는 그런 곳은 절경지일 때 가능한 이야기죠
na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자연만큼 변화무쌍한 것도 없다. 깊은 산골 절벽 위에 정자를 들이고 정원을 두고 싶어 했던 그 마음을 헤아려본다.  
최)초간정사 현판이 아주 소박하네. 가을 비 우산 속이구나
성) 편하다 / 최) 이런 깊은 곳에 이런 멋진 곳을 또 찾아왔네
성) 장소가 천만금이다 여기는 장소가 이 폭포에 계류에 나무들 추녀에 떨어지는 빗물 우연한 조합이 아닌 것 같아요
최) 화려하지 않은데 아주 담담하고 편안하게 느껴지네
성) 이런 게 자연이 만들어 낸 회화 같은 거지
최) 여긴 뜰 속의 풍광이 이게 무슨 액자 속에 들어 있는 그림 같이 보이네
성) 여기는(초간정) 편하잖아 아주 편해요
최) 저 돌들을 주워 와서 쌓아 올린 제 각각 다르게 생긴 크기나 엉켜있는 모양들이 너무 변화무쌍해요. 저 변화무쌍한 조형이 회화적인 거 같아요. 정말 자연스러워요 가지고 와서 만들어 놓은거지만
성) 서양 시인 보들레르가 말한 인공자연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게 아마
최) 인공자연
성) 보들레르가 봤으면 여기를 보고 그런 말을 했을 지도 모르지 누가 오시는데 여기 주인어른
권) 손님이 오셨네요
최) 주인도 없는 데 객이 먼저 와가지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반갑습니다.
권) 귀한 손님들이 오셨네 / 성) 성석제라고 합니다 / 권) 권중섭이라고 합니다
권) 초간선생 조부께서 세거하신 이래로 지금까지 약 오백년 동안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초간 정사는 1582년에 초간 선생께서 암석 위에 막돌 초석을 놓아서 지은 정사입니다.
권) (들문을) 쭉 들어서 위에 이렇게 받치면 / 성) 전체 공간 자체가 확장 공간이 되는
권) 그렇습니다. / 최) 뭐랄까 겸손한 마음이라고 할까 욕심 내지 않고 평소에 조그만 공간에서 사용하다가 이렇게 활용도를 극대화시켜서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처음부터 크게 하지 않았다는 거죠
권) 그렇죠
na :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올린 초간정. 온돌방과 우물마루를 깔았다. 여닫이문과 판문을 달아 공간을 구분했지만, 풍광이 아름다운 개울 쪽 북쪽 면은, 시야를 확보하려고 창호를 달지 않았다.
최재영) 한국 정원은 구릉을 자연스럽게 이용하고 또 차경 기법으로 끌어들이는 수법에서 온 겁니다. 그리고 자연석이라 던지 이런 것도 있는 그대로 그 자리에 두고 약간에 우리들이 활용 할 수 있는 산책길이라든지 조그마한 연못이라든지 정자를 만들어서 언제든지 자연과 쉽게 사색할 수 있는 이런 공간으로 만들어 온 것이 우리 한국 정원의 다른 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na : 자연과 합일을 이루는 정원에서, 선비들은 단지 휴식이 아닌 사유의 지평을 넓혔을 것이다. 상처 입은 마음은 욕심 때문이라며, 자연을 통해 비우고 또 비웠을지도 모른다.
성) 우리 정원이라는 게 휴식하는 그런 공간이기도 하고 치유 받는 그런 공간이기도 하고 재충전을 하는 그런 공간이기도 하고 창작을 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한데, 초간정은 특히 다른 곳 보다 더 그런 의미가 더 강하고 고요하고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장소 같습니다
최) 우리가 좀 바쁘게 살잖아요 모든 게 다 바쁘고. 정보도 많고 정신없지 않습니까. 그런 삶과 여기 앉아서 느끼는 삶이 대비가 되면서 너무 놀랍습니다
na : 소박한 초간정에서 알았다. 요동치는 마음과 고요한 마음은 사실 둘이 아니라는 것을. 깊숙한 계곡의 한쪽을 차지한 초간정처럼, 자연의 풍치를 그대로 살리면서 최소한의 인공을 더한 선비들의 정원 철학. 그것은 수려한 경치를 자랑하는 남도에서 꽃을 피웠다.
자막 : 명옥헌 / 명승 제 58호. 조선 중기 오희도가 살던 곳으로 41세에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오이정이 조성한 정원.
na : 산언덕 너머 전망이 툭 터진 곳에 자리한 명옥헌. 아버지가 살던 곳에 아들이 꾸민 민간정원이다.
자막 : 삼고. 조선 16대 임금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인조반정을 위해 오희도의 마음을 얻고자 세 번 찾아온 것을 기리는 오희도가 쓴 편액.
na : 제갈공명을 찾아 유비가 세 번을 방문했던 고사처럼, 인조도 오희도를 세 번이나 찾아왔었다. 그만큼 세상을 두루 꿰뚫는 안목과 깨끗한 심성을 가진 학자였다.
최재영) 명옥헌에는 정자를 중심으로 위에도 작고 아름다운 연못이 있고 아래쪽에도 아름다운 연못이 있습니다.    위에 연못은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차고 난 후에 다시 그 물이 넘쳐서 계곡으로 흘러 아래 연못에 차게 되는 이러한 지형을 그대로 활용한 좋은 조경 기법이라 보고요 또 그 주변에는 배롱나무를 심어서 특히 여름철에 붉게 피는 배롱나무가 이루는 경관은 정말 환상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na : 배롱나무 정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명옥헌 정원엔 배롱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해묵은 배롱나무엔 늠름한 기품이 배어있다. 단단하고 매끄러우며 윤기가 흐르는 게, 고고한 선비를 닮았다.
최재영) 자연 구릉을 그대로 활용하면서 주변에 아름다운 나무를 심어 더욱 더 경관을 돋보이게 하는 이런 기법은 본 받아야하는 조경기법이라 볼 수 있습니다.
na : 심지가 곧고 학문이 가득해 기품이 넘쳤던 오희도. 그는 후진 양성에도 깊은 뜻을 두었던 참스승이었다. 도시에 살던 오희도의 16대손 부부가 고향에 내려와 농사를 짓고, 시를 지으며 살고 있다. 후손은 오희도의 삶이 그대로 담겨있는 명옥헌 배롱나무 정원에서, 인문학 배움을 이끌고 있다.
성) 안녕하세요. 지나가는 객인데 잠깐 끼어도 되겠습니까?
노) 어서 오세요 / 성) 네 반갑습니다  / 노) 반갑습니다
성) 너무 좋은 자리 같아서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 그런지 들어오면서 문기(文氣_ 충만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명옥헌이라는 이름 자체도 상당히 문학적입니다. 시적인 이런 이름을 가진 곳은 세상에 없는 거 같아요. 구슬을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집이라는 이런 멋진 함축적이고 멋진 문학적 기운이 충만한, 뭉쳐있는 그런 느낌이 듭니다
na : 노모를 지극히 모시던 효자이자 고고한 선비였던 오희도. 후손들은, 명옥헌에 깃든 선비 오희도의 성품과 참스승이었던 그의 유업을 즐거이 따르며 살고 있다.
성) 미적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곳곳에 살고 있다. 자기들의 자족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찾아서 살아왔다는 것을 이런 정원들이 보여주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의 정원 이런 게 쓸모가 없어 보이는데 이것 때문에 우리나라 가치가 문화 수준이 이런 장소가 있으므로 해서 일단 올라가고 노자가 말한 무용지용의 큰 쓰임이 있는 거 같아
최) 무용지용
성) 쓸모없어 보이는 데 사실은 대단히 유용한, 그리고 이게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숨을 돌리게 해주는
최) 제일 중요한 거죠 어쩌면 
성) 그런 장소가 많아서 참 다행스럽다 이런 게 없었으면 어쩔 뻔 했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na : 명옥헌 정원에서 자족하며 살았던 선비를 만나고, 이제 땅 끝까지 왔다. 땅 끝으로 가는 길은, 오갈 데 없는 절망의 벼랑처럼 느껴져 어김없이 감상적이 된다.
성) 가기가 예전에는 쉽지가 않았지 서울에서 워낙 머니까 땅 끝이라는 이름부터가 심상치 않은데 여기까지 와서 거기서 또   
최) 배를 타고 가야하니 완전히 단절하겠다는 그런 의지가 느껴지는 거리가 아닐까 땅 끝에서 다시 또 배를 타고
na : 땅 끝에서도 배로 30여 분 더 달려와야 만나는 아득한 섬, 보길도다. 은둔하던 선비가 만든 정원의 걸작이 보길도에 있다.
자막 : 부용동. 1636년(인조 14)에 윤선도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거처할 집을 짓고 그에 딸린 정자와 연못 등을 만든 것이 이 정원이다.
성) 원래 기거하던 / 최) 공부하는 분위기로 정해놨네 현판을 아주 반듯하고 깨끗하네
na : 낙서재에 머물던 선비의 이름은 고산 윤선도. 그는 효종의 스승이었다.
성) 산들은 연꽃의 꽃잎 모양이고 저 앞쪽에 있는 자리가 이제 연꽃의 화심에 해당하죠.
최) 연잎 모양을 가지고 있는 거구나
성) 부용이라는 말이 한자로 연꽃이라는 뜻이죠. 조금 올라왔는데 경관이 확 달라지네
최) 고산 선생처럼 한번 달은 안 떴지만 달이 떴다 생각하고 한번 볼까요
자막 : 동척선실. 낙서재의 정면에 바라보이는 산자락에 있다 3,306m²(1,000여평)의 공간에 한칸 정자와 석문, 석담, 석천, 석폭, 석전을 조성하고 차를 마시며 시를 지었던 곳이다
na :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던 고산 윤선도. 경사에 해박하고 의약이나 음양 지리
 에도 능통하였던 그가 보길도에 정착하면서 거대한 원림을 조성했다.
성) 물이 다 인공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보이기도 하는데 물길이 다 연결이 되었다고 하니까
최) 저기 부용동까지
이원호) 동천석실과 낙서재, 세연정 이런 지역들은 별개로 놓고 보면 하나하나가 다 독립된 정원으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서로 물길로 또 치선으로 이어져 있으면서 총체적인 하나의 집합체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 되겠습니다.
na : 병자호란 때 인조가 삼전도에서 무릎 꿇고 항복했다는 소식에 통분해 세상과 등지려고 했던 윤선도.
성) 이게 세연지라는 연못인데 여기서 어부사시사를 창작하고 배를 타고 재연을 하던 곳 일부러 사람이 꾸민 것 같지가 않아 너무 자연스러워
최) 돌들이 아주 무심하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결코 아무 생각 없이 놓여 있는 것 같지 않아요 큰 돌 작은 돌 중간 돌 절묘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같은데요.
성) 이런 물풀이든 연못가에 있는 나무도 아주 세심하게 배려를 해서 심었거나 아니면 자연 그대로 살렸거나
최) 만들어진 것으로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na : 윤선도는 51세에 외딴 섬 보길도에 들어와 물길을 따라 섬 전체를 수려한 원림세상으로 조성했다.
최) 세연정에는 이 세연지의 연못도 좋은데 좋은 나무들이 많은 거 같아요. 이건 홍송이네 홍송이에요.
성) 이건 고산 선생이 직접 심었다 그래요 직접 심은 나무 중에 하나 남은 유일한 나무
최) 이런 나무는 기운을 조금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선생님부터 한번 혼자 기를 다 받으세요. 나도 조금 주고
성) 뭔가 찌릿 찌릿 / 최) 좋은 일이 많을 겁니다.
성) 생기가 있는 것 같아요 나무가 오래 되었지만 400년 가까이 된 나무인데도 오우가를 지었는데 거기에 다섯 벗이 있고 그중에 하나가 소나무
자막 : 오우가. 1642년(인조 20) 윤선도(尹善道)가 지은 시조. 작자가 은거지인 금쇄동(金鎖洞)에서 지은 <산중신곡 山中新曲> 18수 중 6수로, ≪고산유고 孤山遺稿≫ 제6권 하편 별집에 수록되어 있다.
내 벗이 몇이나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내 벗이 몇이나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고야           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최) 이것이 뭡니까 / 성) 이게 온돌 이라고   
최) 온돌? 정자에 불이 어떻게 들어온다는 거죠?
성) 이런 건 한 번도 못 본 것 같아요 / 최) 그러게 말이에요 그럼 정자가 아니고 주택이 되는데
이) 안녕하세요  / 최) 네 안녕하십니까 / 이) 온돌방에 앉으셨습니다. 
최) 정자에 무슨 온돌이 있습니까
파) 외부손님을 맞이했을 때 겨울이나 추울 때는 온돌방에 앉아서 담화를 나누셨고 차를 드셨던 그러기 위해서 만들었던 공간
na : 세연정 일대는 부용동 원림의 입구이자 백미다.
이) 이거 한번 차 보십시오. 퉁퉁 소리 나는지 / 최) 소리 난다  정말 울림이 크네
성) 큰 돌로 만든 북 같아 / 최) 큰 북소리가 나네
이) 그래서 1미터 높이에서 떨어진 물소리도 공명에 의해서 10미터 위에서 떨어진 것만큼 울림이 있었단 거죠     
성) 얼마나 아름다운지
최) 이 낮은 높이인데도 큰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참 지혜롭다.
na : 평소에는 다리지만, 여름엔 작은 폭포수를 연출하게 만든 판석보에서, 어부사시사를 노래한다. 앞개에 안개 걷고 뒷뫼에 해 비친다. 배 띄어라 배 띄어라 밤물은 거의 지고 뒷물이 몰려온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강촌 온갖 꽃이 먼빛이 더욱 좋다. -춘사 제 1수-
na : 세상을 등진 사대부는 보길도에서 이상향을 꿈꾸었다. 그의 영혼은, 이 원림에서 고깃배를 모는 어부들과 춤을 추며, 음악과 시에 빠져들었다.
이원호) 한국정원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조경기법과 각 경처의 선정 또 이러한 것들의 각 기능적 분화 이런 것들은 섬이라는 하나의 공간을 원림 세계로 구현한 가장 중요한 또 조경사에 있어서도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보길도의 원림은, 날개 꺾인 한 선비에겐 이상의 왕국이었다. 고산 윤선도의 무한한 상상력과 예술혼을
 고스란히 품어준 원림세계. 꿈에도 생각지 못한 높은 차원의 작품이 땅 끝 너머 보길도에 남아있다.
자막 : 창덕궁 / 사적 제122호. 1405년(태종 5)에 지어진 조선시대의 궁궐 1997년 창덕궁과 후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흰) 원래는 경복궁이 조선의 법궁이었는데 창덕궁이 나중에 법궁이 되었죠.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행사 같은 거 다 하고
자막 : 인정전 / 국보 제225호. 인정전은 창덕궁이 건립되던 해인 1405년(태종 5)에 지어졌다. 조선전기부터 왕의 즉위식이 열리는 등 정전으로 주요 기능을 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이 화재로 소실된 후에는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정치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na : 민간 정원이 자연의 일부가 되어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한 사대부 정신의 표출이라면, 궁궐정원은 왕들의 고도화된 철학적 산물이다.
자막 : 창덕궁 후원 / 사적 제122호. 창덕궁 안에 있는 조선시대 정원 1997년 창덕궁과 후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성) 여기가 후원을 대표하는 부용지 부용정이 있는 자리인데 이곳을 주로 조성한 분은 정조임금이에요. 정조가 이곳을 조성하고 휴식도 하면서 영감을 많이 얻어서 여기를 지혜의 샘이라고 했다는 말이 있어요 
자막 : 부용지. 창덕궁 후원에 있는 길이 34.5m, 폭 29.4m의 장방형 연못
자막 : 부용정 / 보물 제1763호. 창덕궁 후원에 조성된 인공 연못과 열 십(十)자 모양의 정자
na : 자연 지세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면서 하늘과 땅과 자신을 하나로 합일시키려는 왕들의 통치 철학. 그것이 반영된 곳이 바로 궁궐 정원이다.
성) 부용지가 보면 네모나잖아요 네모난 게 천원지방이라고 해서 땅은 네모이고 하늘은 둥글다는 것을 적용한 (하늘을 뜻하는)섬은 둥글고 (땅을 뜻하는)연못은 네모 쉽게 말하면 천지인 거에요 연못 하나가 천지를 담고 있는 거죠.
na : 창덕궁의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동궐도에는 부용지에서 배를 띄웠던 것으로 표현돼 있다.
자막 : 조선왕조 실록 / 정조 34권 16년 3월 21일 ‘여러 각신들을 불러 내원에서 꽃을 구경하고 고기를 낚았다.“
조선왕조 실록 / 정조 42권 19년 3월 10일 ‘내궐 내원에서 꽃구경을 하고 낚시를 한다’ ‘부용정의 작은 누각으로 거동하여 태액지에 가서 낚싯대를 드리웠다’ ‘정조가 낚시로 네 마리를 낚았다’
na : 창덕궁 후원을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조선 22대 임금 정조였다. 다른 왕들처럼, 정조에게도 후원은 정사에 지친 심신을 달래주던 곳이었다.
성) 정조 임금이 여기서 굉장히 본인 스스로도 많은 위안도 받고 신하들과도 친교의 시간을  가지고 정원을 알차게 활용했기 때문에 현군이라는 말을 듣는 게 아닌가. 어수라는 말이 수어지교(水魚之交). 좋은 임금과 현명한 신하 관계를 수어지교라고 했으니까 물고기가 물을 만난거야 어수문이라는 현판이 가파르게 세로로 쓰인 게 용이 올라가는 것처럼 신하가 되려면 과거시험 같은 것으로 약진을 하라
자막 : 주합루 / 보물 제1769호. 1776년 정조가 즉위한 해에 완성한 건물 주합이란 우주와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자연의 이치에 따라 국가를 다스리고자 하는 뜻을 담고 있다.
na :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주합루다. 2층 누에 올라서면, 부용지 뒤편의 수림까지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성) 세상이 다 모여 있다 여기서 보니까 확실히 그런 게 느껴지네. 밑에서 볼 때는 알 수가 없었는데. 하늘과 자연과 사람과 이런 것들이 우주 만물이 다 모여 있는 거 같아. 한군데에 그러다보니까 세운 건물이름이 세 개가 한꺼번에 모여 있다는 뜻의 주합루가 된 거 같아.
최) 그런 게 느껴집니다 / 성)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na : 정조는 장대한 누각을 지어 왕실의 존엄을 일깨웠다. 주합루처럼 통치자의 위상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건물이 존덕정이다. 창덕궁 후원에 있는 여러 연못 중 하나인 관람지는 한반도 모양처럼 생겼다 하여, 반도지였다가 그 명칭이 바뀌었다. 존덕정은 인조 재위 22년인 1644년에 세워졌다.
성) 이렇게 생긴 정자가 전국 어디를 가도 잘 없어요. 작지만 이게 굉장히 당당하고
na : 겹 지붕에 일반적인 4각형이 아닌 6각형으로 이름처럼 격이 높아 보이는 정자다.
최) 청룡하고 황룡이 있어요 아래 위로
성) 용도 아주 생동하는 거 같고 단청도 되게 화려하고 이런 장식 같은 것도 뭐랄까 위엄 같은 게 느껴진다고 할까요 .
자막 : 만천명월주인옹자서 / 달은 하나이며 물은 수만(數萬)이니 물이 달을 받음으로서 앞 시내(川)에도 달이요 뒷 시내에도 달이다. 달의 수는 시내의 수와 같은데 시내가 만 개에 이르더라도 그러하다. 까닭인 즉 하늘에 있는 달이 본시 하나이기 때문이다. 달은 본래 천연으로 밝은 빛을 발하며 아래로 내려와서는 물을 만나 빛을 낸다. 물은 세상 사람이며  비추어 드러나는 것은 사람들의 상(象)이다. 달은 태극(太極)이며  태극은 바로 나다.
na : 자신을 만 갈래 시내와 강을 비추는 달과 같은 존재로 표현했던 정조. 그도 후원의 가장 깊은 곳인 옥류천에선 지친 마음을 잠시 내려놓았을 지도 모른다.
성) 여기가 옥류천 계곡의 핵심 유상곡수 자리
자막 : 옥류천 유상곡수. 소요암이라는 널찍한 바위에 U자형 홈을 파고 샘물을 끌어 올린 다음 작은 폭포처럼 물이 떨어지게 만들었는데 왕과 신하들은 더불어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었다.
최) 술잔을 띄우면 여기서 신하가 이제 술잔을 받아서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하면서 받는거죠.
성) 중요한 것은 둘러앉는다는 거죠. 군신이 평등하게 위에서 술을 내리면 밑에서 친구처럼 이것을 받아서 마시는
na : 응봉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로 유상곡수연의 풍류를 즐겼던 왕들. 숙종은 옥류천 일대의 경치를 노래한 오언절구를 남겼다.
자막 : 오언절구. 옥류천 폭포 삼백 척 저 멀리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하네 돌아보니 흰 무지개 일고 골짜기마다 천둥소리 가득차네
이원호) 고려시대 때는 내원서라고 하는 정원을 관리하는 기관이 있었고 이것이 조선시대 때 오면서 장원서라고 하는 기관으로 탈바꿈합니다. 정원을 직접 관리하거나 조성한 사람들을 동산바치라고 부르는데요. 아주 정결한 건축선의 연장이라던가 또 수목들 지금도 남아있는 노거수는 동산바치 장원서의 사람들이 했던 기술이라 볼 수 있고, 특히 궁궐의 뛰어난 조경기술들은 바로 사대부가에 전해지는 이런 역할도 합니다.
성) 졸졸졸 흐르는 끊임없이 흐르는 물이 아주 깊고 음습한 것도 아니고 너무 얕은 것도 아니고 아주 인간적인 그런 정도 맑은 계곡을 하나 만든 거죠 그걸 이용한 거고
최종희) 정원이라고 하는 부분이 시대의 하나의 트렌드로서 우리 앞에 와 있는 것 아닙니까. 과연 우리가 정원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 정원을 어떤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의도를 가지고 만들 것인가. 특히 자연을 어떻게 대했는가에 대한 태도. 이 부분이 현대에 살아가는 우리의 입장에서 상용되고 정원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거죠.
na : 사람과 자연, 그리고 문화가 어우러지는 한국의 정원. 선비들이 추구한 삶의 가치와 지혜가 녹아있는 곳이다.잃어버린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길! 그것이 바로, 한국의 정원이 가진 힘이다.


# 창덕궁과 왕들


창덕궁 후원은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켜온 만큼 여러 왕들의 휴식처였습니다. 지금의 후원은 왕들의 손길을 거쳐 만들어진 모습입니다. 후원의 연못인 ‘부용지’는 원래 언덕이었는데, 세조가 4개의 샘물을 찾아 연못으로 만들었고, 숙종이 이를 기념하여 ‘사정기비각‘을 세웠습니다. 숙종은 왕과 신하의 연회장인 ’영화당‘을 중건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곳에서는 연회를 열기도 하고, 과거 응시자들이 마지막으로 왕 앞에서 시험을 치루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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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창덕궁 권역 가장 깊은 곳. 수백년에 걸쳐 만들어지고 세워진 연못이며 정자들은 그 어느 하나 화려하거나 위압적이지 않다.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자연스러운, 한국정원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는 곳, 조선의 왕들이 가장 사랑한, 창덕궁 후원이다. 조선의 왕들이 가장 오래 산 집, 창덕궁이 조선 왕조 전 시기를 통틀어 왕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넓고 아름다운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공적으로 깎고 다듬고 꾸미는 대신, 창덕궁은 북쪽의 북한산과 응봉에서 뻗어내린 9만여평의 넓은 산자락을 후원으로 삼았다. 산길을 거니는 듯, 숲길을 노니는 듯, 후원을 따라 걷다 보면, 수백년 전, 바로 그 길을 걸었을 왕들의 흔적과 만난다. 창덕궁 후원 북쪽, 소요정과 태극정, 청의정 등 정자들이 아기자기하게 어우러진 옥류천 일대-. 인조는 이곳의 바위를 깎아 계곡물을 끌어들였다. 그 물이 바위를  휘돌아 흘러 작은 폭포를 이루며 떨어진다. 인조는 친히 바위에 옥류천 세글자를 새겼으니, 이곳 소요정 앞, 굽이굽이 휘돌아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운 모습은 창덕궁 후원의 10대 절경 중 하나로 꼽혔다. 숙종도 질세라, 자신이 본 옥류천을 바위에 새겼다. 창덕궁 후원의 또 다른 절경으로는 단연 부용지가 손꼽힌다. 이곳 부용지에서 뱃놀이를 하는 모습을 비롯해 희우정에서 바라보는 연꽃, 청심정에서의 달구경, 능허정에서의 저녁 눈 풍경 역시 10대 절경 중 하나다. 부용지 남쪽에는 날렵한 모양의 정자가 두 다리를 물에 담그고 있으니,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로 꼽히는 부용정이다. 열십자 모양의 정자에 오르면 건너편 북쪽으로는 주합루가, 동쪽으로는 영화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조선의 왕들에게 창덕궁 후원은 단순한 휴식 공간이 아니었다. ‘창덕궁 후원의 또 하나 10대 절경’으로, 조선의 왕들은 이곳 영화당에서 시험을 치르는 선비들의 모습을 꼽았다. 영화당 앞 넓은 마당, 춘당대는 최종 단계의 과거 시험이 치러지던 곳이었다. 춘향전의 이몽룡이 과거 시험을 보던 곳 역시 이곳 춘당대였다. 시험이 있을 때면 이곳엔 300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의 넓은 마루가 만들어지고, 큰 나무도 덮을 수 있을 정도의 차일이 쳐졌다. 왕들은 직접 영화당까지 나와 시험을 참관했다. 말하자면 영화당은 일종의 고사본부였던 셈이다. 조선의 왕들에게 영화당 앞마당을 가득 메운 젊은 인재들만큼 아름다운 모습이 또 있었을까? 창덕궁 후원은 왕이 백성들의 삶을 체험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옥류천 부근에 자리잡은 청의정은 현재 남아 있는 정자 중 유일하게 초가 지붕을 하고 있다. 왕은 이 곳 서너평 땅에 논을 일구어 벼를 심고 그 짚으로 지붕을 얹었다. 손수 농사를 지어보며 백성들의 땀과 수고를 되새기기 위함이었다. 농사는 식량을 넉넉히 하는 근본이요, 양잠은 옷을 넉넉히 하는 근본이다. 양잠을 권장하기 위해 왕비 역시 이곳 창덕궁 후원에 뽕나무를 심고 친히 누에를 쳤다. 400년 수령의 뽕나무는 백성들을 향한 왕과 왕비의 마음이다. 창덕궁 후원에는, 휴식을 취할때조차 나라를 이끌어갈 아름다운 인재들을 고민하고 백성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놓치 않았던 조선의 왕과 왕비가 있었다.


정조


그중에서도 정조는 창덕궁 후원 이야기에 많이 등장하는 왕입니다. 정조는 부용지에서 가장 아름답게 자리를 잡고 있는 정자 ’부용정‘을 세웠습니다. (차이나는 클라스 출연자 분들도 못에 비치는 모습이 정말 예쁘다며 감탄하였는데요.) 오상진 님이 읽으신 ’만천명월주인옹‘의 주인 또한 정조입니다. 어수문, 규장각, 주합루 등등 창덕궁 후원에 남아있는 정조의 흔적을 함께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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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창덕궁 후원의 존덕정. 규모는 작으나, 겹지붕에, 청룡과 황룡이 어우러진 천정이, 예사 정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더욱 주목을 끄는 것은 현판에 씌인 글. 내용인즉 ‘뭇 개울들이 달을 받아 빛나지만 달은 오직 하나뿐’이라...여기서 ‘뭇 개울’은 신하요, ‘하나뿐인 달’은 왕을 이름이니 신하들이 왕을 따르는 것은 합당한 이치라는 것이다. 글의 주인은 바로, 강력한 왕권을 꿈꾸던 조선 제22대 왕, 정조였다.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휴식 공간 위주였던 창덕궁 후원은 크게 탈바꿈한다. 즉위 원년, 정조는 이곳에 규장각을 설치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리고 3개월 뒤, 부용지 북쪽 언덕에 2층 누각인 주합루가 완성됐다. 주합루로 오르기 위해서는 왕은 어수문을, 신하들은 양 옆의 작은 문을 통과해야 한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는 것처럼 왕과 신하의 관계도 이같다는 뜻의 어수문. 신하들은 고개를 숙여 겸손한 자세를 취해야 작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이는 정조가 신하들에게 전하는 또 하나의 메시지였다. 어수문을 들어서서, 다시 계단을 몇 단 더 올라야 다다를 수 있는 곳. 주합루다. 1층이 규장각, 2층이 주합루다. 왕의 글이나 글씨 등을 보관하는 규장각에 대한 논의는 이미 숙종대부터 있어왔으나 유신들의 반대로 시도되지 못했다. 하지만 정조에 의해, 작은 서고에 지나지 않던 규장각은‘국내외 도서를 다수 소장한 왕립도서관’으로, ‘학문연구기관’으로, 나아가 왕의 비서실이자 정책개발실로 기능이 확대된다. 주합루 현판 2층 주합루는 열람실로 사용됐다. 이후 이 일대에 우리 나라 책을 보관하는 서고와 중국책을 보관하는 특별도서관 등 규장각 부속 건물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이곳은 정조를 중심으로 젊은 인재들이 새로운 학문과 문물을 배우고 익히는 중심 공간이 되었다. 창덕궁 후원이 왕의 학문 연구 공간이자 혁신 정치의 중심 공간으로 새롭게 탈바꿈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정조가 이렇듯 규장각 설치를 서두른 까닭은 무엇일까? 선왕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로 인해 출발 기반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정조에게, 왕권 확립은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이를 위해선 새로운 개혁 정치를 도울 젊은 인재가 필요했고, 그런 의미에서 규장각은 학문 연구와 동시에 왕을 가장 가까이 보필하는 국왕 직속기구였다. 뒷날, 정조가 만든 규장각 학사들의 근무 수칙이다. 손님이 와도 일어나지 마라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의자에 앉아 있으라 아무리 높은 벼슬아치가 와도 규장각 전임자가 아니면 들어오지 말라 공무가 아니면 근무지를 떠나지 말라. 규장각 학사들에 대한 정조의 지원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주합루 서편의 서향각. 주합루 등에 보관돼 있던 많은 책들을 매년 4개월에 한번씩 내어 말리던 곳이니, 이름 그대로 책향기가 나는 집이다. 대부분의 부속 건물들이 사라지거나 옮겨진 반면 지금도 주합루 서편을 지키고 있다. 하늘에서 나무로 규장각이 너무 후원 깊숙이 있다는 지적에 따라 정조 5년, 규장각은 인정전 서쪽, 금천 건너로 옮겨진다. 정조는 이곳에 규장각의 다른 이름, ‘이문지원’이라는 편액을 친히 내리고 수시로 들러 학문을 논했다. 이렇게 양성된 규장각 학자들은 정조대의 문예부흥을 주도하면서, 하늘에 하나뿐인 달, 정조의 왕권안정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창덕궁 곳곳에 심겨졌던 정조의 이러한 꿈과 야망은 그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린다.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 정조가 살았던 창덕궁. 오늘, 그곳에 가면 정조를 만날 수 있다.


효명세자

 
창덕궁 후원 연경당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창덕궁 후원 건물들 중 단청이 없어 소박한 느낌을 가진 연경당. 궁궐이 아닌 양반 고택에 온 듯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연경당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아버지를 위해 지은 건물입니다. 정말 효심이 지극한 것 같습니다. 효명세자는 현재 보존된 궁중 무용 절반 이상이 그의 작품일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안타깝게도 향년 22세로 요절하고 맙니다.

아버지를 향한 효심과 그의 재능은 ’정유진찬‘이라는 잔치에서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1829년에 순조 등극 30년과 탄신 40년을 기념하기 위해 효명세자가 열었던 '순조기축진찬'을 복원한 것이 ’정유진찬‘입니다. 연회의 현장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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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순조 보령 사순 어극 30년 기념 연향 정酉유進진饌찬
- (정보자막)정유진찬 세 번째 잔치 : 야진찬
- 2017년 5월 13일 토요일 오후 5시 / - 창경궁 명정전 일대
포구락_抛毬樂
고려 문종 27년(1073) 때 여령, 초영등 13인이 처음 팔관회에서 실현한 것으로 문종 이전에 고려에 유입되었음을 고려사』 「악지」에 「용속악조」에서 밝혀주고 있다. 양대로 나뉘어 노래하고 춤추며 차례로 채구를 던지는데, 구멍에 넣으면 상으로 꽃을 주고, 못 넣으면 얼굴에 먹점을 찍어주는 재미있는 놀이형식의 가무희다.
무고_舞鼓
고려사악지 속악조에 보면 고려 충렬왕 때 시중인 이혼이 영해에 귀양을 갔다가 해상에 떠 있는 뗏목으로 북을 만들어 쳐서 소리가 굉장했다 하였고, 그 춤의 변태와 형상은 한 쌍의 나비가 펄럭이며 꽃을 감도는 것 같고 두 마리용이 용맹스럽게 여의주를 다루는 것 같다는 형태에서 기록되어 있다. 무고는 중앙에 북을 놓고 북채를 든 원무 4인과 협무 4인이 북을 돌면서 추는 향악정재이다.
춘앵전_春鶯囀
1828년 순조 때 아들 효명세자는 어느 봄날 아침 유지에 지저귀는 꾀꼬리 소리에 유감하여 이를 무용화 한 것이다. 효명세자의 모친인 순원숙황후 40세 탄신을 경축하기 위하여 세자가 친히 만든 춤이다. 
검기무_劍器舞
삼국시대부터 전래하는 향악정재로 신라 사람들이 애국소년 황창랑의 충심을 기리기 위해 황창의 가면을 쓰고 검무를 추기 시작한데서 유래하였다. 원래는 민간에서 가면무로 행하던 것인데, 조선 순조 때 궁중정재로 채택되었고 궁중연희가 된 후로는 가면이 없어졌다. <공막무>, <첨수무>라는 이름으로 궁중연례에 자주 연행되었다.


서울 구석구석에 아직도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문화유산이 많습니다.
홍진경 님은 내 조상들의 발자취를 알지 못하면서 다른 나라에 관광을 다녔다며 자책했지만, 유홍준 교수님께서는 '다른 것을 경험했기에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 답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이번 주말, 우리의 문화유산을 찾아 떠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작성자 : 전체관리자 | 등록일 : 2019-07-11 | 조회수 : 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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