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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문화유산여행] 차이나는 클라스 따라잡기 - 궁궐의 도시, 서울 '조선의 숨결’ (1)

도깨비와 함께하는 문화유산여행
 
 
오늘도 세계에서 궁궐이 제일 많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도시, 서울로 떠나는 심화학습 여행.
첫 번째 <궁궐의 도시, 서울 ‘조선의 품격’> 편에서는 한양도성과 경복궁, 종묘를 살펴보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재미있게 봐주셨네요!
 
차이나는 클라스 심화학습 서울편 그 두 번째 이야기!
 
<궁궐의 도시, 서울 ‘조선의 숨결’>
서울의 5대 궁궐 중 창덕궁과 창경궁에 얽힌 이야기 속으로 떠나봅니다.


 
차이나는 클라스 따라잡기
창덕궁 창경궁 동궐도 경희궁 덕수궁
 

# 창덕궁
 
상반기, 하반기 나눠서 총 2번 창덕궁은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한양에 지어진 궁궐입니다. 창덕궁은 1405년 태종의 지시로 지어졌는데, 경복궁도 있는데 태종은 왜 새로 궁궐을 또 지은 걸까요?

태종은 임금이 되고자 '왕자의 난'을 일으킵니다.
그 과정에서 태종 자신의 형제들도 죽이게 되는데, 바로 경복궁에서 형제들의 피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태종은 경복궁에 기거하기를 꺼렸고, 그래서 만든 것이 창덕궁입니다.


 
경복궁 전경
 
창덕궁 전경


이로써 임금은 경복궁에서 나랏일을 보고, 창덕궁에서는 생활을 하는 양궐 체제가 시작됐습니다. 경복궁과 창덕궁은 지어진 시기가 20년이 차이나는 만큼 궁궐의 구조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경복궁은 주례(중국 유교 경전)에 따른 세 개의 문과 건물들의 일직선 배치가 눈에 띄고, 창덕궁은 자연 친화적으로 지어져 경복궁에 비해 녹음이 우거졌고 동선이 복잡합니다. 우리 궁궐의 건물들과 조경, 자연 지형이 잘 어우러졌다는 특징 덕분에 창덕궁은 우리나라의 궁궐 중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특히 후원이 아름다운 창덕궁! 이 창덕궁에서 달빛이 내리는 밤, 특별한 궁궐을 경험할 수 있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는 것. 아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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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창덕궁 달빛기행 조선시대 역사를 간직한 창덕궁의 모습들을 보름달빛 아래 즐길 수 있는 대표적 궁궐 프로그램
창덕궁 달빛기행 우리나라 궁궐 중 유일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창덕궁의 아름다운 시간 속으로 떠나는 여행
창덕궁 달빛기행
2011년부터 시행하여 3~6월, 8~10월까지 음력 보름 전후 3~5일 진행중
인정전
창덕궁의 정전으로 외국 사신을 맞이하거나 신하들로부터 하례를 받는 등 국가의 중요한 의식이 행해지던 곳
낙선재
헌종 13년(1847)에 헌종의 거처로 지어짐
훗날 조선왕조 마지막 왕후인 순정효황후를 비롯하여 덕혜옹주, 이방자 여사 등이 이곳에서 생활했다
상량정
창덕궁 낙선재 후원 언덕에 우뚝 서 있는 육각형 누각
부용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 사상을 반영한 전통적 우주관에 의해 조성된 연못
주합루
정조가 즉위한 해에 완성한 건물로 1층은 왕실의 도서를 보관하는 규장각이고 2층은 열람실 건물로 조선후기 왕과 신하들이 학문과 정사를 논하던 곳
연경당
연경은 경사가 널리 퍼진다는 뜻으로 효명세자가 순조와 순원왕후를 위한 잔치를 베풀고자 1927~8년(순조27~8)경 지은 효심이 담긴 집
심청가- 심봉사 눈뜨는 대목'락음국악단'
아리랑 환상곡'락음국악단'
행사안내 : 한국문화재재단
홈페이지 : www.chf.or.kr


바로 <창덕궁 달빛기행>입니다. 창덕궁 달빛기행은 야간의 창덕궁을 즐길 수 있는 행사로, 상반기, 하반기 나눠서 총 2번 100% 예약제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인기가 정말 많아 열리자마자 매진된다고 합니다.


# 창경궁


문정전과 사도세자


상왕과 왕대비(*임금이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물러나면, 물러난 임금과 대비는 상왕과 왕대비로 칭해졌습니다.)가 머물렀던 공간인 창경궁은 창덕궁 바로 옆에 지어졌습니다.

창경궁의 건물 중 하나인 문정전은 창경궁의 편전으로 일종의 왕의 집무실이었습니다. 임금이 평상시 거처하며 일상적인 집무를 보거나, 신하들과 학문을 토론하는 '경연'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나 영조는 문정전을 다른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죽은 첫째왕비 정성왕후 서씨의 위패를 모셔놓은 혼전으로 삼은 후, 휘령전이라 이름붙인 것이죠.
죽은 정성왕후와 영조, 그리고 영조의 아들이자 세자였던 사도세자에 얽힌 비극이 바로 이 문정전 앞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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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조선왕조의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 창경궁
내전 전각중 하나인 환경전은 중종이 대장금의 진료를 받던 곳이었으며 지금은 없어진 자경전은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건물이었다. 또한 역대 왕들이 직접 농사 시범을 보이던 내농포도 창경궁에 있었다. 창경궁은 수많은 왕과 왕후들이 승하한 곳이자, 순조, 헌종, 정조 등이 탄생한 산실이기도 했다. 내전에 위치한 ㅁ자 형태의 독특한 전각인 집복헌. 후궁들의 처소로 사용되던 이곳은 조선 최대 비극의 주인공인 사도세자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문정전은 창경궁의 편전으로 일종의 왕의 집무실이었다. 임금이 평상시 거처하며 일상적인 집무를 보거나, 신하들과 학문을 토론하는 '경연'을 여는 곳이었던 문정전. 그런데 영조는 문정전을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 죽은 첫째왕비 정성왕후 서씨의 위패를 모셔놓은 혼전으로 삼은 후, 휘령전이라 이름붙힌 것이다. 어느 날 문정전을 거닐던 영조는 죽은 정성왕후의 환청을 듣게 된다. 변란이 호흡사이에 달려있단 말은 역모가 가깝다는 뜻으로, 영조는 이를 듣고 사도세자를 떠올리게 된다.
사도세자는 영조가 첫아들을 잃고 마흔 하나의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이었다. 세자에 대한 영조의 사랑과 기대는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그 기대에 부응하듯, 사도세자는 남 달리 영특하여 왕을 기쁘게 했다. 왕세자 책봉당시 내렸던 죽책에도 그 같은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영조는 종종 아들을 불러 공부한 내용을 확인하곤 했는데, 엄격한 아버지 영조는 세자가 조금이라도 부족한 모습을 보이면 매섭게 다그쳤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세자는 커갈수록 비행을 일삼았고, 정신병과 강박증에 시달렸다. 영조의 분노는 나경언이란 자가 올린 고변을 통해 극에 달한다 나경언의 고변이 있고 21일 후 영조는 세자를 문정전에 부른다. 그리고 세자에게 믿기지 않는 전교를 내린다. 자결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한 세자... 영조는 더욱 화를 내며 아들을 뒤주 속에 가두고 스스로 못질을 하기에 이른다.
홍화문에서 남쪽으로 70여 미터 떨어진 선인문. 사도세자가 들어간 뒤주는 문정전에서 이 선인문 안쪽으로 옮겨진다. 윤 5월 중순. 양력으로는 7월의 뙤약볕 아래 여드레를 지낸 사도세자는 마침내 뒤주 안에서 숨을 거둔다. 선인문 앞에서 이 비극을 고스란히 목격했을 400년된 회화나무. 밤새 흐느꼈을 세자의 울음을 들었음일까 고통스러운 듯 온몸을 비튼채 서있다.
그러나 어떤 아비가 자식을 죽이고 가슴을 치지 않을까. 훗날 영조는 아들의 묘비에 절절한 슬픔을 토로했다. 세자가 죽자 영조는 사도세자라는 묘호를 내린다. 사도의 도는 서러워할 도로. 잔인한 운명을 서러워한 아비의 마음이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무소불위의 삶이지만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을 잃었던 두 사람. 문정전 앞뜰에는 두려움 속에 죽어간 사도세자의 처절한 외침과 후회로 가슴 치는 아버지의 눈물이 서려있다.


정조의 화성능행


사도세자는 문정전 앞에서 뒤주에 갖힌 채 죽음을 맞이합니다. 시신은 경기도 양주에 매장되었고, 영조는 사도세자의 죽음 보름 뒤에 복권시켜주지만 왕으로 추존시켜주지는 않습니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효심이 지극하여 왕위에 오른 뒤 아버지의 묘를 경기도 화성으로 이장시킴과 동시에 묘의 규모도 확장하였습니다. 또한 왕으로 추존하려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죠. 이렇게 자신의 아버지를 항상 생각하던 정조는 재위기간 중 13번이나 수원에 있는 아버지의 묘를 찾았다고 합니다. 이 행렬을 정조의 화성능행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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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왕세자에서 조선 최고의 개혁 군주로>
 
자막. 조선시대 존재한 신도시 수원 화성 / 계획도시를 건설한 조선의 22대 임금, 정조         
      새로운 조선의 미래를 꿈꾼 개혁군주 / 정조의 개혁정신과 효심이 깃든 화성행차, 그 발자취를 따라  
타이틀 / 비운의 왕세자에서 조선 최고의 개혁 군주로 - 정조의 화성능행
NA. 정조가 화성능행을 떠날 때마다 건너가야 했다는 한강입니다. 한강에 다리가 없던 그 시절, 과연 어떻게 갔을까요? 예전에는 배 여러 척을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놓고 그 위에 판재를 건너질러 사람과 말이 건너가는 이른바 ‘배다리’를 놓아야 했는데요. 그 오랜 기다림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수원 화성은 정조에게 의미 깊은 장소입니다. 그렇게 한양을 떠난 정조는 다음 날이 돼서야 화성에 도착하곤 했습니다. 화성은 개혁을 이뤄내기 위한 새로운 공간을 꿈꿔온 정조의 꿈이 실현된 계획 도시입니다. 치밀한 준비 덕분에 불과 2년 9개월 만에 완공되었는데요. 화성은 조선의 과학기술이 집약된 조선 최고의 성곽이자 최후의 신도시입니다. 약 6KM의 성곽으로 둘러싸인 화성은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기능을 함께 지닌 매우 독특한 공간입니다. 그 독창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자막. 수원 화성 / 뛰어난 건축술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우리나라 최후의 신도시로 정조는 아버지의 능 주위에 살던 주민들을 팔달산 아래로 이주시켜 도시를 만들고 성곽을 축성했다 
NA. 화성에는 모두 4개의 문이 있는데요. 팔달문은 남문입니다
자막. 팔달문 (보물 제402호)       
       수원 화성의 남문. 한국 성문 건축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팔달산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NA. 성의 정문은 보통 남문이지만, 화성의 정문은 북문인 장안문인데요. 정조가 한양에서 화성으로 행차할 때 첫 번째 만나는 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자막. 장안문 / 수원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이다. 
NA. 당시, 정조가 화성에 행차하면 모든 관리들이 이 장안문으로 가서 맞았다고 합니다. 장안문의 견고한 성벽을 끼고 한참을 걷다보면 화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서장대에 닿습니다.
자막. 서장대 
     팔달산 정상에 위치한 지휘본부로 정조는 서장대에 올라 군사를 지휘하며 강력한 왕권을 과시했다
NA. 성안에 있는 군사들을 지휘하기에 안성맞춤인 이곳에서 정조는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선보이며 새로운 조선을 꿈꾸는 개혁군주의 위엄을 확인시켰습니다. 서장대에서 멀리 않은 곳에 정조가 머물렀던 공간인 화성행궁이 있습니다. 
자막. 화성행궁 (사적 제478호)
     화성 행궁은 정조가 행차할 때 임시 거처로 사용하던 곳. 경복궁의 ‘부궁’으로 불릴 만큼 어느 행궁보다 크고 웅장하고 활용도가 높았다
NA. 화성행궁에서 가장 중요한 전각은 봉수당입니다. 
자막. 봉수당
NA. 효심 깊은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기원하며 지은 곳이자 어머니의 회갑연을 열었던 특별한 곳입니다.  현재, 회갑연 당시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인사를 올리던 정조의 모습과 상차림을 재현해 놓아서 그날의 모습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자막. 봉수당진찬도 / 혜경궁 홍씨의 일주갑을 기념하여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행한 진찬 장면을 그린 진찬도이다
NA. 그날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회갑날이기도 했기에 정조의 심경은 특별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수원 화성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곳으로 발길을 옮겨봅니다. ‘꽃을 찾고 버드나무를 따른다‘는 뜻을 가진 아름다운 정자는 방화수류정입니다.               
자막.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선 후기 건축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며 송나라 학자 정명도의 시에서 이름을 따왔다. 
NA. 원래, 군사 지휘소의 역할을 하던 곳이죠. 이곳에서 활을 쏘거나 신하들과 잔치를 열기도 하면서 풍류의 공간으로도 활용했다고 하지요. 군사시설이면서도 주변 풍경과 조화를 이루며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방화수류정은 조선 후기의 대표 건축물입니다. 방화수류정 근처에 수문이 있는데요. 아름다운 무지개 문이라는 뜻의 화홍문입니다.
자막. 화홍문
NA. 무지개 모양의 7개의 수문에서 흘러나오는 물보라가 장관을 이루는데요. 이 아름다운 경관은 수원 8경으로 손꼽힙니다. 화성능행의 마지막 여정은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융릉입니다. 정조는 재위기간 중 13번이나 수원에 있는 아버지 묘를 찾았는데요. 이것만 봐도 아버지를 위한 효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키 큰 소나무와 울창한 숲을 통과하면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융릉이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NA. 정조의 효심은 죽어서도 드러나는데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정조가 묻힌 건릉 있습니다. 아마도 늘 아버지 곁에 묻히고 싶어 했던 정조의 바람이 이루어진 것이겠죠.     
자막: 융릉과 건릉 (사적 제206호) 융릉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를 합장한 묘이며 건릉은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다 
NA. 개혁군주의 꿈을 이루려고 했던 곳이자, 아버지의 묘를 모신 효심의 공간, 수원 화성! 수원화성에서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품고도 ‘화합’을 꿈꾸던 참된 개혁 군주, 정조를 만날 수 있습니다. 못다 이룬 꿈이지만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애썼던 정조의 뜻만큼은 오늘날에도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동궐도


오늘 살펴본 두 궁, 창덕궁과 창경궁을 묶어 동쪽에 있는 궐이라 하여 동궐이라 불렀습니다.
이 두 궁궐을 담은 그림이 있는데요, 그것이 바로 동궐도입니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동궐도는 16첩에 이르는 크기와 섬세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누가 언제 제작하였는지 아무런 기록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림 속에는 많은 단서들이 남아있는 법.

누가, 언제, 그리고 왜 만들었는지 영상으로 함께 알아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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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비단에 그려진 궁궐 그림.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렸다 하여 동궐도라 이름 붙여진 작품이다. 동궐도는 본래 16첩 화첩의 형태로 제작되었다. 화첩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본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병풍 형태로 만든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본, 두 작품은 나란히 국보로 지정돼 있다.
당대 최고의 도화서 화원들이 총동원된 역작 동궐도. 그 속에는 비운의 왕세자, 효명세자가 품었던 개혁의 꿈이 담겨 있다.

누가 언제 제작하였는지 아무런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 동궐도. 동궐도 제작에 효명세자가 깊이 관여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그 제작시기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그림에 남아있다. 1824년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의 경복전. 동궐도에는 주춧돌만 그려져 있어 화재가 난 1824년 이후에 제작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다른 단서는 1830년 불에 타 없어진 환경전, 경춘전, 양화당 세 전각이다. 이 건물들은 동궐도에 화재 이전의 상태로 묘사돼 있다. 이처럼 화재로 소실된 전각들과 동궐도 속 전각들을 비교해보면 1828년에서 1830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압축된다.
이 시기 조선을 다스리던 왕은 순조였다. 그렇다면 왜 순조가 아니라 효명세자가 동궐도를 제작한 것이라 여겨지는 걸까. 당시는 외척인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왕권이 한없이 추락하던 시기였다. 1827년 2월. 38살이었던 순조는 맏아들인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한다. 복잡한 정국을 전환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렇다면 대리청정중이던 효명세자는 왜 동궐도의 제작을 지시했던 것일까. 그 단서는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조가 왕권강화의 목적으로 설치한 규장각. 주변의 건물과 비교해보면 실제보다 크게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수만 권의 책을 갖춘 규장각은 도서관을 넘어 정조의 개혁정치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다.
효명세자는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인 정조를 닮으려고 노력했다. 실제보다 크게 그려진 규장각은 왕권을 회복하고 조선을 다시 살리려는 효명의 개혁 의지가 반영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세도정치의 압박 속에서 외롭게 싸우던 효명세자. 그가 대리청정의 정당으로 사용한 곳은 중희당이다. 중희당은 정조가 아들 문효세자를 위해 건설한 전각으로 넓은 마당에 해시계, 측우기, 풍기대 등 각종 기상 관측기기가 배치돼 있다. 과학을 중시했던 정조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 하지만 200여년이 지난 지금은 덩그러니 터만 남아있다.
효명세자가 머물렀던 처소는 연영합이다.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동궐도를 통해 단청도 없는 소박한 형태의 팔작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속 연영합에는 눈길을 끄는 또 다른 특징이 있다.
마당에 학 두 마리가 서로 마주보고 서 있고 학 옆에는 두 개의 괴석이 놓여 있다.
효명세자가 쓴 <학석소회소서>라는 글에는 연영합 앞마당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한 구절이 남아있다.
창덕궁의 북쪽에 자리한 금마문. 금마문을 들어서면 나지막한 단 위에 소박한 집 두 채가 나란히 서 있다. 기오헌과 운경거다. 온돌방 하나와 작은 대청, 누마루로 구성된 기오헌은 효명세자가 공부방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단청을 하지 않아 궁의 건물로는 단촐한 모습이고 궁궐 내 유일한 북향 건물이다.

정조를 빼닮아 영특하고 학문에 밝았으며 소박한 성정을 가졌던 효명세자. 단청도 없는 북향 건물에서 새로운 조선을 꿈꾸던 그는 대리청정의 시작과 함께 안동김씨 세력을 향해 사정의 칼날을 들이댔다.
신진 세력을 등용하기 위해 과거제도의 비리를 척결하고 3년 동안 50차례가 넘는 과거를 실시했다.
개혁의 꿈을 하나씩 실현해나가던 효명세자. 그런데 22살이 되던 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 대리청정을 시작한 지 3년 3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할아버지 정조에 대한 존경의 마음과 개혁의 의지를 동궐도에 담은 효명세자.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세자의 야심은 22세 젊은 나이로 꺾이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남겨놓은 유산 동궐도는 200여 년 전 창덕궁과 창경궁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유물로 남아 그 가치를 더하고 있다.


이렇게 서울의 5대 궁궐 중에서도 창덕궁과 창경궁에 얽힌 이야기를 찾아보았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오늘 살펴본 이야기는 창덕궁과 창경궁의 이야기 중 극히 일부입니다. 문화유산채널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아직 서울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음 편도 서울의 이야기로 만나요!
 

작성자 : 전체관리자 | 등록일 : 2019-07-05 | 조회수 : 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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