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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문화유산여행] 알쓸신잡 따라잡기 - 전주

도깨비와 함께하는 문화유산여행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알.쓸.신.잡 시즌1!

오늘은 시즌1 그 마지막 여정인 전주입니다.
전라도의 이름은 전주와 나주에서 한 글자씩 따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전라남도의 대표 도시, 전주로 떠난 네 명의 박사님들! 오늘은 어떤 지식을 우리에게 알려줄까요?


문화유산채널에서 선정한 전주의 문화유산키워드는 세 가지!
#어진 #조선왕조실록 #한지


#어진


유희열 박사님과 김영하 박사님은 국립전주박물관에 방문했습니다.
들어가자마자 그들을 반기는 것은 조선을 세운 태조의 어진! 어진이란 왕의 초상화입니다. 유희열 박사님은 어진에 그려진 태조의 어깨가 럭비부 수준이라며 놀라기도 했습니다.

뛰어난 장수였던 태조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거쳐 역성혁명을 일으키고 조선의 첫번째 왕이 되었죠.
역성혁명, 즉 왕씨 왕조를 몰아내고 새로운 이씨 왕조를 세운 태조였기에, 그는 민심을 예민하게 주시했고, 왕씨를 몰아내는 등 정치적 안정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만큼 어진에서도 새로운 왕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떡벌어진 어깨를 그린 것 아닐까요?
왕의 모습을 담고 있어 왕과 동일시되었다는 어진. 지금 국립전주박물관에 있는 것은 복제품으로, 진품은 훼손을 막기 위해 전주 경기전 안에 보관되고 있습니다.

왕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에 어진을 옮기는 행렬에는 수많은 수행원이 참여했습니다.
이런 어진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진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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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조선시대 최고의 화원으로 꼽히는 김홍도. 그는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어진화사에 여러 차례 임명된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왕의 얼굴을 그리는 주관화사를 담당하지 못했다.
까다로운 절차와 법도 아래 그린 어진. 어진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왕 그 자체였다.
조선왕조 제1대 왕인 태조의 어진이다. 곤룡포를 입고 익선관을 쓴 채 화려한 용상에 앉아있는 모습이다. 태조의 경우 많은 수의 어진이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전주 경기전에 봉안되어 온 이 한 점 뿐이다.
이 어진은 생전에 화가가 왕의 용안을 직접 보고그린 것이 아니다. 1872년 원본에 충실하게 모사된 이모본이다. 태조 어진 모사를 둘러싼 전 과정은 ‘어진이모도감의궤’에 기록돼 있다. 당시 박기준, 조중묵, 백은배 등 십여 명의 화원이 참여했고, 이모 작업은 대략 한 달 가량이 걸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모본을 살펴보면 우측 상단에 붉은 종이가 눈에 띈다. ‘태조고황제어진’이라 쓰인 종이다. 그 옆에는 이 어진이 어느 왕의 어진이며 제작시기가 언제인지를 알려주는 표제가 붙어 있다. 여기에서 ‘사복’은 선인의 업적을 잇는다’는 뜻이다.
당시 존귀한 인물의 초상인 경우, 표제를 쓸 때 비단바탕 위에 직접 쓰지 않고 종이를 덧붙이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태조어진은 정면관으로 그려졌다. 그림 속 태조는 몸체가 상당히 크고 당당한 모습이다. 또한 노인임에도 눈에는 정기가 가득 차 있어 위풍당당한 군주로서의 위엄이 가득하다.
왕의 초상화는 단순히 자손이 조상을 추모한다는 의미 뿐 아니라 진전에 모시고 1년에 수차례 제사를 올림으로써 왕실이 영구하기를 기원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담고 있다. 태조는 역성혁명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연 개국시조이기 때문에 이러한 상징성이 더욱 절실히 필요했을 것이다.
태조의 어진은 1987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후 예술성과 상징성, 학술적 가치 등을 고려해 2012년 국보로 승격되었다.
태조 이후 조선시대 대부분의 왕들은 어진을 제작했다. 3대 왕인 태종은 생시에 어진이 제작되었지만 털끝 하나라도 틀리면 그 사람이 아니다 라는 생각에 자신의 어진을 없애라 명했다. 그러나 아들인 세종은 차마 그럴 수 없어 어진을 보존해 두었다 전해진다.
그런데 태종의 어진은 물론이고 세종의 어진 또한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조선 왕실에서 가장 소중히 여겼던 그림, 그 많은 어진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한국전쟁 초기, 어진을 비롯한 상당수의 왕실 유물이 부산으로 옮겨졌다. 휴전 이후 어진을 비롯한 유물을 서울로 옮기는 계획을 세우던 무렵, 보관 창고에 화재가 났다. 이 화재로 대부분의 어진이 불에 타버렸다.
화염 속에서 구해낸 어진 중 용안이 보존된 것은 영조 어진과 철종 어진 두 점 뿐이다. 현재 보물로 지정돼 있는 영조의 어진은 1900년 이모 작업을 한 것이다. 보고 그린 범본은 1744년에 그려진 영조의 51세 반신상이다.
늘 안색이 붉고 윤기가 있었다는 영조. 어진 속 안면에 붉은 기가 가득하다. 치켜 올라간 눈매, 오똑 서있는 콧날, 한 올 한 올 공들인 흔적이 남아있는 수염. 변덕스럽고 깐깐한 영조의 성정이 엿보이는 초상화다.
조선시대 어진의 색채를 칠할 때는 배채라 하여 먼저 비단의 뒷면에 물감을 칠했다. 물감의 얼룩이나 변색을 막아주는데 효과적이고 얼굴색을 자연스럽게 나타내기에 좋은 기법이다. 영조의 어진 역시 배채법으로 그렸다.
영조는 이 반신상 어진을 매우 흡족히 여겼던 것으로 전해진다. 신하들에게 어진을 보이며 후일에도 어진을 보고 자신의 저술과 업적을 기억해주기를 당부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왜 전신상이 아니라 반신상으로 그려졌을까. 이 어진은 진전에 걸어 제사를 지내는 용도가 아니었다. 모친인 숙빈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사당에 걸어두기 위한 초상화였다. 그래서 아담한 반신상으로 그려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온전히 남아있는 태조의 어진과 영조의 어진은 모두 범본을 두고 모사한 작품이다.
조선시대에 어진의 상태가 조금이라도 훼손이 되거나 색이 바라면 도감을 설치하고 거국적인 이모작업이 거행되었다.
어진이 곧 조선의 왕실이고 왕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

이어서 두 분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사고(史庫)에 방문하였습니다.
조선 왕조의 이야기를 기록해놓은 조선왕조실록!

472년이나 되는 긴 시간동안 기록해 놓은 분량은 자그마치 1,900 여 권에 달합니다.
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저자가 들려주는 조선왕조실록 이야기를 잠시 듣고 오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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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조선왕조실록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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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서 궁으로 T.D하는 상은 앞으로도 많이 쓰이니 다 없애고 실록 표지에서 바로 시작했으면 해요~)
22 실록 표지 (흘리다가)
1996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왕조실록.
글씨 쓰면
세계 최대의 단일 왕조 역사서로 인류가 함께 보호해야 할 위대한 유산이다.
페이지 넘기면
조선왕조실록 한 장 한 장에는
12 정족산 사고 팬 지난 역사를 진실하고 공정하게
기록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과
12 하늘서 T.D 숱한 전란과 위험을 이겨낸
눈물겨운 헌신이 담겨 있다.
전각 앙각 세계의 유산, 조선왕조실록을 만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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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브 타이틀 : 조선왕조실록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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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 들어서는 박시백 (보고)
10 스탠드 켜면 지나간 시간의 매력에 빠져
우리 역사를 연구하고 고증작업을 해 온
만화가 박시백.
16 배경 실록에서 얼굴로 포커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란
이름 자막 넣어주시고!!! 역사만화를 통해 조선왕조실록에
쉽고 친근하게 다가가도록 도왔던 그가,
세계유산순례를 안내한다.
”조선은 500년이라는 시간 동안 단일왕조를 유지한
세계사적으로 매우 드문 나라다.
제대로 된 조선의 역사, 조선의 정사를 정리하겠다는 생각으로
10년 넘게 조선왕조실록을 연구하고 만화작업을 해왔는데
그 과정에서 조선왕조실록이 담고 있는 그 내용의 방대함과
선조들이 보여준 엄정한 기록정신에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18 하늘에서 T.D하면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를 천명하며 오백 년 동안 화려한 왕조의 뜻을 펼친 조선왕조.
단일왕조로 최장기간 국가를 유지해 온 조선의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
10 실록책 보이면 여기 조선의 정신적 배경과 확고한 국가저력의 비밀을 품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고종, 순조실록까지 포함해서 1967권에 000책이나 되는 현대적 단행본으로 환산하면 400권이 넘는 분량이다. 참으로 방대한 양이다.“
15 규장각 외경 (잠깐 사이) 조선시대 기록물들의 보물창고인 규장각. 이곳 지하서고에 보관돼 있는 조선왕조실록.
20 서가에 누운 책들 태조부터 철종까지 조선 25대 왕들의 행적을 기록한 472년간의 기록물이다. 세계적으로 실록은 여럿이 있지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된 것은 조선왕조실록이 유일하다.
10 책장 넘기면 세계가 그 가치를 인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6 세계지도 보이면 동아시아 삼국의 실록을 살펴보자.
18 중국지도에 자금성 중국 최초의 실록인 황명실록. 명나라 294년의 역사를 기록했지만 황제가 마음대로 삭제하거나 파기하는 등 공정한 실록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
23 지도에서 일본으로 이동 일본의 경우, 삼대실록이 있지만 3대 왕의 재위 기간인 29년의 기록물이다. 그나마 당대에 실록을 편찬하는 제도가 없어 후대에 정리를 했고, 그 때문에 중요한 기록들이 빠져있다.
30 궁궐 문 열리면 이에 비해 조선왕조실록은 단일왕조 472년간의 역사를 기록했고 공정성과 객관성에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기록물이다.
마당의 품계석 왕의 곁에 사관을 두고 국사를 빠짐없이 기록했으며 왕이라 할지라도 열람할 수 없게 함으로써 진실성과 객관성을 확보했다.
10 책 높이 재는 조선왕조실록은 모두 1,893권, 책 한 권의 두께가 1.75센티미터 정도로
13 CG 모두 쌓아놓으면 32미터나 된다. 고층 아파트 13층에 달하는 엄청난 높이다.
20 쓰는 모습 재연 화면 472년간 매일매일 작성한 기록이다 보니 전체 글자 수만 해도 천자문 6만 4천권 분량에 달한다. 한 사람이 매일 백 쪽씩 읽어도 4년 3개월이 걸리는 방대한 양이다.
20 표지 넘기는 실록을 펼쳐보면, 첫 장에는 왕의 즉위 경로와 치적을 적은 총서가 기록되어 있다. 국왕에 대한 엄정한 평가로 시작하는 것이다.
23 페이지 바뀌면 본문에는 국정의 중요 사안은 물론 백성들의 생활까지 모두 담겨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조선 전체의 기록이 담겨있어 사료로서의 가치도 높다.
15 책 본문에 하이라이트 표시 실록의 내용을 들여다보자. 태종실록에는 흥미로운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자막 (보고)
25 코끼리 모습 지금도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코끼리가 조선시대에 존재했다는 것인데, 선물로 받은 귀한 코끼리가 사람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첫 번째 자막 빠지면 엄청난 양의 곡식을 소비하는 코끼리에 대한 걱정도 나온다.
20 섬 풍경 결국 코끼리는 전라도 해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자막 빠지면 코끼리 유배사건은 실록이 당대 생활상을 얼마나 충실하게 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15 백록담 풍경 백두산 화산폭발에 대한 기록도 남아있다.
20 UFO 자료화면 생활상과 천재지변에 대한 기록 외에 불가사의한 일도 기록돼 있다. 의문의 비행물체 사건으로 기록된 내용이다.
28 책 + 구름 지나가는 풍경 500년의 시간이 흐르고 역사는 바뀌었어도 진실하고 공정한 기록은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
잠깐 사이 조선왕조실록에는 역사를 바로 보고, 준엄한 역사의식으로 나라를 다스리고자 했던 조선의 정신이 담겨있다.
궁궐 전체 부감 (흘리고)
근정전으로 올라가는 MC (보고)
”조선은 기록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기록을 남겼다. 그 중에서 압권은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은 기록만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다. 조선의 건국자들의 왕의 독주를 막기 위해 여러 가지 견제 장치를 마련했는데 조선왕조실록 또한 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20 붓에 먹물 묻히는 (흘리다가) 그들은 붓 한 자루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인류 최고의 역사기록으로 만든 사람들. 그들은 누구인가?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함으로서 왕으로 하여금 후대의 평가,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하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견제장치는 사관의 존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22 활시위 당기는 조선 태종 4년, 사냥을 좋아하는 태종이 말을 타고 활시위를 당기다 그만 말에서 떨어지고 만다. 경황이 없는 가운데도 태종이 내뱉은 첫마디는 이것이었다.
28 실록 넘기는 그러나, 태종실록을 보자.
자막 보다가 사관이 모르게 하라는 임금의 말까지 기록돼 있다. 그날의 사관은 임금이 숨기고 싶었던 일마저도 주저 없이 기록한 것이다.
18 의궤 넘기면 조선시대 사관은 임금이 있는 자리면 어디든 참석했다.
국가의례였던 대사례 기록을 보면 의례가 진행되는 중에도 임금 옆에서 종이를 들고 기록하는 사관의 모습이 보인다.
18 근정전 마당의 품계석 사관은 정 7품 이하의 낮은 벼슬이지만 임금의 언행을 물론 국정 전반을 기록하고 평가한다는 점에서 자격 조건이 매우 엄격했다.
18 용상 뒤로 사관 자리 보이는 우선 문과 급제자 중 성적이 우수하고 친가와 처가 4대조까지 흠이 없어야 했다. 미혼자도 제외시켰는데, 장차 어떤 가문과 맺어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22 연못에 비치는 임금행렬 이렇게 선발된 사관이기에 기개도 드높았다.
자신이 작성한 사초가 조선왕조실록의 근간을 이룬다는 자부심과 임금의 권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공정한 역사를 기록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15 왕릉 풍경 그렇다면 사초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을까?
(잠깐 사이) 인조 때 정태제라는 사관이 있었다.
10 보따리 들고 나오면 사초는 실록편찬과 함께 폐기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정태제는 사초의 일부를 남겼다.
사초 모습 (보고)
10 사초 페이지 넘기면 이 사초는 인조 15년부터 그 이듬해에 걸친 5개월간의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12 하이라이트 표시 임금의 말을 기록한 부분과 왕세자 왕세자에 대한 내용, 기근 기근으로 굶주리는 백성들에 대한 걱정도 있다.
48 양쪽 펼쳐놓고 흥미로운 것은 사신 왈 부분이다. 이것은 사론, 곧 사관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것으로 놀랍게도 사초에는 임금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이 적혀있다.
자막 (보고)
12 페이지 바뀌면 임금을 나무라는 내용은 더 있다.
자막 (보고)
22 근정전 안 사관 자리 보이는 조선의 사관은 임금을 평가하는 것마저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런 소신을 보호하기 위해 임금이라도 사초를 볼 수 없도록 하고 예민한 내용은 임금이 죽은 후에 제출하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했던 것이다.
12 어두운 방문 팬 (흘리다가) 하지만 사관의 역사기록이 늘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10 피 묻은 책 연산군이 즉위한 뒤 성종실록 편찬을 둘러싸고 벌어진 필화사건, 무오사화다.
15 무오사화 자막 당시 실록편찬 책임자인 훈구파의 이극돈은 사관 김일손의 사초를 검토하던 중 그가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은 것을 발견한다.
40 조의제문 자막 뜨면 조의제문은 연산군의 선왕인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로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내용이었다. 더욱이 김종직과 김일손은 훈구파와 대립하던 사림파로 이극돈은 이를 연산군에게 고해바친다.
자막 보다가 결국 연산군은 이 사초를 빌미로 무오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대대적으로 제거하고 만다.
25 피 묻은 페이지 C.U되면 (잠깐 흘리다가) 목숨을 걸고 사초에 소신을 밝힌 사관과 사초가 공개됨으로서 벌어진 비극, 무오사화는 사관의 소신과 권력 간의 갈등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이다.
32 사관의 자리 조선의 사관은 정직한 기록을 생명으로 여기며 치열하게 역사를 기록했다. 조선의 임금과 관료들이 사관의 붓을 두려워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쓰는 붓에 내용 겹치면 조선의 사관. 조선왕조실록의 빛나는 가치를 지켜온 수호자이다.
근정전 마당
근정전 내부 곳곳 C.U (보고)
"사관은 붓 한 자루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왕의 언행과 동정, 정책결정을 둘러싼 논의 과정, 신하들이 올렸던 상소와 비답 등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또 조선팔도에서 있었던 중요한 사건, 사고, 기후와 특이했던 날씨들 또 농업과 어업 등 백성들의 생활상까지 참으로 풍부하게 들어있는데 이렇게 기록된 사초와 이에 근거해서 제작된 조선왕조실록은 왕조차도 열람할 수 없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켜나갔던 것. 바로 여기에 조선왕조실록의 위대함이 있다 하겠다.”
7 박시백의 조조록 표지 조선왕조실록이 얼마나 세세하게 기록되었는지 살펴보자.
25 세종의 대사 부분 뜨면 “출산이 예정된 달은 물론 출산 후 백일을 쉴 수 있도록 하라!“
페이지 바뀌면 세종이 당시 7일이던 관비의 산후휴가를 100일이 넘게 보장해주었다는 기록이 있고.
죄수 부분 죄수들의 감옥생활까지 돌 봤다는 기록이 있어, 세종의 백성사랑이 얼마나 각별했는지 알 수 있다.
10 유교의 생활화 성종실록에는 유교를 정착시키기 위해 왕이 직접 제정한 상속법, 장례법, 열녀문 등의 내용이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20 연산군 등장하고 연산군의 경우 향락을 좋아해 천 명의 기생과 천 명의 악공을 모아 자주 잔치를 열었다는 기록과 잔치에 초대된 사람의 명단과 연회 내용까지 기록하고 있다.
15 조조록 내용 지나가는 이처럼 실록에는 왕을 둘러싼 조선의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조선 왕의 모습을 남긴 또 하나의 기록이 있다.
10 규장각 외경 2011년 5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일성록이다.
13 놓인 일성록 한권 정조에 의해 시작돼서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까지 151년에 걸쳐 기록된 조선시대 왕의 일기.
15 적혀지는 한자 하나씩 이 일기는 날 ‘일’에 살필 ‘성’, 곧 하루를 반성하는 기록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왕의 일기에 담긴 내용은 무엇일까?
15 일성록 내용 (자막 보다가) 감기에 걸려서 공부를 중단했다는 소박한 일상이 적혀 있는가 하면.
7 영인본 홍수피해를 입은 지역을 걱정하고 조치한 내용도 있다.
22 ‘予’ 자 부각 일성록에서 눈길을 끄는 글자가 있으니 나를 가리키는 ‘여’ 자다.
이것은 이 일기가 일인칭 시점, 곧 왕의 시점으로 쓰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조선의 역대 기록물 중에 왕을 ‘나’라고 표현한 것은 일성록 뿐이다.
13 글자 쓰면 조선의 왕들은 국정을 다스리는 와중에도 필부필녀처럼 매일 일기를 쓴 것이다.
6 정조 어진 Z.I 그 시작은 조선의 22대 왕 정조가 세손시절부터 써온 일기에서 비롯됐다.
13 경희궁 전도 정조는 왕세손으로 책봉된 뒤, 왕위에 오를 때까지 거처인 경희궁 내의 존현각에서 매일 밤 일기를 썼다.
8 서궐도안 Z.I 그래서 존현각일기라고 이름 붙였는데 근정전 카메라 무빙 정조는 즉위 후에도 일기 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28 용상 즉위 5년이 되던 해까지 일기를 쓴 정조는 일기를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규장각에 책임자들을 정한다.
이때부터 일성록은 왕이 직접 쓰던 일기에서 입직 건교직각 ... 자막 신하가 대신해서 왕의 일과와 치세내용을 적는 국정일기로 바뀌게 된다.
12 손으로 가리키는 부분 일성록은 주제별로 제목을 붙여서 한 눈에 알아보기 쉽게 하는 독특한 집필방식을 택하고 있다.
20 경상좌수영에 표시 거북선 개조를 언급한 날의 일기를 보면. 주제인 제목이 있고 그 아래 비변사에서 보고한 내용, 임금이 신하의 청을 허락한 내용 등이 정리돼 있다.
(* 여기서부터는 제례에 관련된 자막 3개 빼주시고!)
18 마당에서 제례 재연 화면 조선왕조실록이 당대의 역사를 후세가 판단하도록 비공개로 관리된 반면, 일성록은 왕이나 관료가 국정운영에 활용할 수 있도록 알기 쉬운 편집체제를 갖춘 것이다.
20 논의 벼부터 계절 S.K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꿈꾸면서 하루하루 써내려간 왕의 일기, 일성록과 후대를 위한 역사의 교훈, 조선왕조실록. 오백년 조선왕조를 지탱한 든든한 버팀목이다.
15 근정문 나오는 MC (보고)
“왕에서 서민의 생활에 이르기까지 조선왕조실록은 백과사전이라고 할 만큼 조선에 대해 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
우리 선조들이 조선왕조실록을 남긴 것은 당대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후대로 하여금 조선사를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조선시대에 겪었던 숱한 오류들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조선왕조실록에 담겨있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하늘에서 T.D (흘리고)
8 전각 앙각 역사는 당대에 평가되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후대를 위한 것임을 알려주는
15 붓으로 쓰는 조선왕조실록.
잠깐 사이 과거의 선조들이 오늘을 향해 보내는 뜨거운 전언이다.
12 근정전으로 Z.I 이를 보존하고 지켜나가는 것이 우리의 답장일 것이다.

저렇게 오랜 시간동안 기록해 놓은 것만 해도 대단한데, 실록이 유실되지 않도록 전부 필사(손으로 베껴 복사본을 만듦)한 뒤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해 후손들이 볼 수 있게 한 것은 정말 엄지 척!

박사님들도 그 시대에 백업을 만들 생각을 다 했다며 감탄하시기도 했습니다.
전국에 4곳의 사고가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세 곳의 사고가 불에 탔지만 다행히도 전주사고는 남아 지금 우리가 조선왕조실록을 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보존이 어려운 종이책을 이렇게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역사의 격랑 속에서 실록 사수에 몸을 바쳤던 두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여기서 알아봅니다.
대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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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조선왕실의 도서관, 규장각..
이곳 지하 수장고에는 세계기록 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이 보존돼 있다.
종이에 금속활자로 인쇄된 472년간의 기록물, 숱한 화재와 전란을 겪었던 조선이 보존이 어려운 종이책을 이렇게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여유있게)여기, 역사의 격랑 속에서 실록 사수에 몸을 바쳤던 사람들이 있다.
태백산맥의 한 자락인 오대산, 이 첩첩산중에 비밀스럽게 들어앉은 건축물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 중 하나인 오대산 사고다.(이어서)조선은 조선왕조실록이 화재나 전란에 소실되지 않도록 국가적 관심을 기울였다. 실록은 모두 네부를 만들어 각각의 사고에 분산 보존하고 종이책을 보존하는만큼 사고의 건축기술에도 각별한 노력이 들어갔다.
습기를 막기 위해 지면과의 공간을 뒀고, 햇볕에 손상되지 않도록 창은나무로 된 판창을 덧대었다.
그러나 통풍을 고려해서 창은 크고 널찍하게 만들었다.
햇볕과 습기에 예민한 종이책 보존을 위한 과학적인 건축물이 사고였다.
(바로)조선왕조실록은 모두 네 부가 만들어져 서울의 춘추관과 전주, 충주, 성주사고에 보관했다.
(이어서)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실록은 위기에 처한다.
(이어서)왜군이 한양으로 진격해오면서 춘추관과 충주, 성주에 있던 실록들이 모두 불타버리고 만 것이다.
(이어서)유일하게 남은 전주 사고마저 왜군의 진격로에 위치해 있었는데,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전주사고의 실록만은 온전했다..
당시, 전주사고에는 태조부터 명종까지 13대에 걸친 804권의 실록이 보관돼 있었다.
사고 앞마당에 세워진 비석 하나, 이 비는 전주사고가 기적적으로 보존될 수 있었던 임진왜란 당시의 숨가빴던 사정을 말해준다.
이 고장의 유생이었던 손홍록과 안의-전쟁과 함께 소실될 뻔 했던 조선의 역사를 악전고투 끝에 지켜낸 아름다운 이름들이다.
(여유있게)전라북도 정읍에 있는 남천사, 손홍록, 안의 두 사람을 기리는 사당이다.
당시, 두 유생은 왜군이 근처 금산까지 침략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풍전등화의 위험에 처한 실록..
이대로 두면, 전주사고의 실록마저 불타 없어지고 말 거라는 생각에두 유생은 실록 이전을 결심한다.
아수라장 같은 전쟁 속에서 800권이 넘는 실록을 옮기는 일이 가능한 일이었을까.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잃는 것은 조선의 역사를 잃는 일이다,
두 사람은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정읍의 유생들과 더불어 전주사고 실록 전량을 옮기기 시작한다.
낮과 밤을 다퉈 그들이 도착한 곳은 내장산에서도 산세가 험한 금선계곡의 용굴, 이 용굴은 그들이 실록을 습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고심 끝에 선택한 장소였다. 밤에는 서로 번갈아가면서 보초를 서고, 왜군의 진격 소식이 속속 전해지면서다시 실록을 옮기는 고단한 일정이 계속됐다. 좀 더 깊고 험준한 비래암으로, 그렇게... 두 사람은 1년이 넘는 기간동안 실록을 옆에 두고 불침번을 섰고내장사의 스님과 승군들도 이 일에 가세해서 힘을 보탰다.
안의가 남긴 <임계기사>를 보면 두 사람이 370일간 숙직을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산속에서 1년 넘게 불침번을 서며 실록을 지켜낸 손홍록, 안의의 눈물겨운 헌신, 그리고 마침내 손홍록, 안의 두 사람이 살려낸 전주사고 실록은 춘추관에 봉안된다.
선조 36년, 실록은 다시 네 벌로 등사돼서 (이어서)정족산과 오대산 등 네 곳에 봉안되기에 이른다. 두 유생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실록의 화려한 부활이었다.
조선역사의 집대성인 실록의 가치를 알아보고 귀히 여겼던 두 유생의 역사적 혜안과 목숨을 건 보호작전, 조선 역대 왕들의 초상화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도 이들 덕분이었다.
역사는 그 가치를 알고 보존하는 이들의 자산이다. 손홍록, 안의로 대표되는 조선왕조실록의 수호자,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는 조선왕조실록이라는 빛나는 이름을 보유하고 있다.


#한지

이번 전주편에서는 유희열 김영하 두 분만 따라가게 되었네요 :)

전주한지박물관에서는 우리 전통 종이인 한지를 만들어보는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두 분도 박물관에 방문해 종이를 만들어보셨습니다.
물에 틀을 넣고 계속 흔들어주고, 물기를 뺀 뒤 말리면 예쁜 한지가 만들어진답니다.

박물관에서는 체험 형식으로 간단하게 만들어졌지만, 원래 한지는 백 번의 손길이 닿아야 만들어지는 귀한 종이였습니다. 이것을 만드는 장인을 ‘한지장’이라고 합니다.

한지장이 만드는 전통한지의 모습을 함께 보시죠!
대본보기
프로그램 동영상 소스코드 정보
대본보기 '한지장(韓紙匠)'이란 전통한지를 제작하는 장인을 말한다. 한지는 닥나무와 황촉규(黃蜀葵)를 주재료 하여 고도의 숙련된 기술과 장인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완성된다. 닥나무를 베고, 찌고, 삶고, 말리고, 벗기고, 다시 삶고, 두들기고, 고르게 섞고, 뜨고, 말리는 아흔아홉 번의 손질을 거친 후 마지막 사람이 백번째로 만진다 하여 옛사람들은 한지를 '백지(百紙)'라 부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한지는 고려시대부터 그 명성이 높아 중국인들도 제일 좋은 종이를 '고려지(高麗紙)'라 불렀다. 송나라 손목(孫穆)은 『계림유사(鷄林類事)』에서 고려의 닥종이는 빛이 희고 윤이 나서 사랑스러울 정도라고 극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태종대부터 조지서(造紙署)를 설치해 원료 조달과 종이의 규격화, 품질 개량을 위해 국가에서 관심을 갖고 관리해오다가 근·현대를 지나오면서 건축양식과 주거환경의 변화, 서양지의 수입으로 전통적인 한지의 명맥은 거의 단절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에도 한지제작은 생산원가와 제작공정의 편의로 닥나무 껍질 대신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수입한 펄프를 사용하기도 하고, 황촉규 대신 화학약품인 팜을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문화재청에서는 전통한지의 올바른 보존과 전승을 위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도깨비문화유산과 함께한 알쓸신잡 시즌 1,2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하지만 도깨비 문화유산여행은 더 흥미로운 문화유산 이야기로 찾아뵐 예정입니다.
그럼 다음에 더 재미있는 도깨비문화유산여행으로 만나요!

작성자 : 전체관리자 | 등록일 : 2018-04-10 | 조회수 : 2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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