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열기, 닫기
검색어 입력

여행기

홈 문화유산뉴스 여행기

인쇄 공유

[도깨비 문화유산여행] 알쓸신잡 따라잡기 - 경주 (3)

도깨비와 함께하는 문화유산여행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알.쓸.신.잡 시즌1!

오늘은 경주 심화학습 3편!
#감은사지 #문무대왕릉 #동궁과월지


세 가지 문화유산을 만나보러 가보실까요? 고고고~

#감은사지

경주에서 유일하게 사람들이 잘 안 오는데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경주에서 가장 볼만한 데
- 황교익


황교익 박사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곳은 #감은사지 입니다.

감은사는 신라의 문무왕이 부처의 힘으로 왜적을 막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짓기 시작한 절인데, 아들인 신문왕이 완성시킨 뒤 아버지의 은혜에 감동한다는 의미의 ‘감은사’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지금은 절터에 두 개의 탑만 남아 있죠.

황교익 박사님이 특히 강조하신 해질녘 감은사지 석탑의 아름다움은 꼭 한번 감은사지를 찾아가보고 싶게 했습니다.

아래 영상에서 감은사지 석탑의 모습을 함께 감상해보시죠!

 
대본보기
프로그램 동영상 소스코드 정보
대본보기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경주 감은사지(사적 제31호)
소재구 전 고궁박물관 관장 / 전 문화재위원
감은사는 신라 문무왕이 부처의 힘으로 왜적을 막아주소서 하는 마음으로 지은 절입니다.
그의 아들인 신문왕이 절을 완성한 후에 아버지의 은혜에 감동한다는 의미로 감은사란
이름을 붙여준 것입니다
이 탑은 전형적인 신라 통일기 석탑의 모델이 되었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탑의 기본이 되는 중요한 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거보다 탑의 키가 작아지게 되어 탑신이 작아졌지만 기단을 키워서 그 비율을 맞춰서
탑의 격을 유지하였습니다.
지붕돌의 처마에는 다섯층으로 된 층단받침이 세겨져 있는데 이방식도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는 기법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 (보물 제366호)
최응천 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 문화재 위원
탑속에 넣는 사리를 보호하기 위한 그릇과 일체를 사리기 및 사리장엄구라고 부릅니다
당시에 가장 비싼 금속이나 유리를 사용해서 사리를 보호하고, 금은보화를 함께 넣음으로
해서 당시의 공예기술, 종교, 과학 등을 알 수 있는 타임캡슐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감은사지 사리기외함에 조각되어있는 사천왕상의 모습을 통해 당시 당나라를 통해 들어온
국제적인 굽타미술양식이 그대로 통일신라까지 적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7세기후반 신라의 수도 서라벌은 국제적인 도시였다는 것을 이 사리기를
통해서 분명히 입증할 수가 있습니다.

#문무대왕릉


유시민 박사님은 경주 감포 앞바다에 있는 #문무대왕릉을 찾았습니다.
다른 왕들의 능과는 다르게 돌로, 그것도 바다에 있다니 정말 특이하죠.
이곳에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이 잠들어 있다고 합니다. 왜구의 침략을 지키는 동해의 용이 되겠다는 유언에 따라 동해바다에 묻힌 문무왕!

어라? 문무왕이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했죠?
맞습니다. 감은사를 지은 것인데요, 문무대왕릉은 감은사와도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지금 만나봅시다!


 
대본보기
프로그램 동영상 소스코드 정보
대본보기 그 옛날, 신라인들은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소망했습니다.
그 소리에, 온 세상이 평안해진다는 피리였습니다.
그리고, 바다에 수장되어 나라를 지켜주겠다고,염원했던 왕이 있었습니다.
봉길해수욕장이 들어선 이곳 해안에서면 아담한 바위섬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는, 신라 제 30대왕, 문무왕의 수중왕릉입니다.
(2초 쉬고) 문무왕은 해변에서 200미터 떨어진 이곳 바다에 잠들었습니다.
멀리서 보기엔 그저 평범한 바위섬에 불과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보면 그 독특한 형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길이 약 20미터의 바위섬으로,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깎아 절개해 놓은 듯, 바위군들이 모양을 이루고 있는데,
신비로운건 그 사이에 수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은 먼 바다쪽인 동쪽에서 흘러들어와 십자형 수로의 중심을 지나, 서쪽 수로 바위 사이를 흐르도록 돼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돌이 하나 놓여있습니다.
이 큰 돌에 신라 문무왕이 묻혔다는 건데, 세계 유일의 해중릉으로 ‘대왕암’이라고도 불리는 문무대왕릉,
그는 왜, 이곳 바닷속에 잠들게 된걸까요?
김춘추의 맏아들로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661년, 즉위와 함께 수많은 전투를 치렀습니다.
옹산성, 우술성등 백제의 성들을 차례로 함락시키며 백제의 항복을 받아낸데 이어, 김유신 장군과 함께 당나라와 연합해 고구려를 정벌했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는 또 당나라의 야욕을 상대해야 했던 문무왕, 21년의 재위기간 중 16년을 전쟁으로 보낸 끝에, 드디어 통일을 이뤄냅니다.
그렇게 삼국통일을 이뤄냈지만, 왜구의 잦은 침략은 통일신라가 풀어야 할 새로운 숙제였습니다. 이에 문무왕은 유언을 남깁니다.
문무왕은, 바다와 신라를 오가며 용이되어 신라를 지켜주겠다합니다.
그 염원이 담긴 곳이 바로, 감은사입니다. 하지만, 바다 옆에 감은사를 세운 문무왕은 끝내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이에 아들 신문왕이 아버지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의 감은사를 창건합니다.
두 개의 탑과 주춧돌만이 그 존재를 짐작케 하는 감은사 터. 아들 신문왕은 법당아래에 동해를 향한 배수로를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왕래 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이 구멍으로 용이 드나들었다는 것인데, 그 방향이 동해를 향해있습니다.
법당 아래에 난, 구멍을 통해 용이 사찰 내부로 자유롭게 드나들었다는 이야깁니다.
지금은 섬돌에 풀이 무성하지만, 당시 절이 지어질 때만 해도 감은사 앞까지 물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당시 바다건너에 있던 왜는 강한 국력과 군사력을 지닌 존재였습니다. 그렇기에, 문무왕은 죽어서까지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그 뜻이 눈물겨워아들 신문왕은 이견대지에서 대왕암을 망배했다고 합니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의 업적에 많은 역사적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모든 근심. 걱정이 해결된다는 피리 만파식적을 아들에게 건네준 이야기부터 왜적이 바라보이는 차디찬 바다에 누워 스스로 용이 되고자했던 이야기까지.. 이는, 모두 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문무왕의 뜻이었습니다.


#동궁과 월지

김영하 작가님은 동궁과 월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경주 동궁원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동궁과 월지? 경주에 이런 곳이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 하게 만들지만, ‘안압지’ 하면 ‘야경 좋은 거기!’ 하실 분들이 많으실 것 같네요.

동궁과월지는 바로 이 안압지랍니다.
안압지는 조선시대에 붙여진 이름이고, 동궁과 월지가 신라시대에 불리던 진짜 이름이기에 이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해요.


연못 위 정자에서 한잔 두잔 풍류를 즐겼던 신라인들.
신라 귀족들이 연회를 즐겼던 동궁과 월지로 함께 떠나볼까요?
대본보기
프로그램 동영상 소스코드 정보
대본보기 통일신라시대, 별궁 안에 있던 것으로 신라 원지를 대표하는 유적, 안압지.
임해전을 비롯해, 여러 부속 건물과 정원이 있었던 안압지는 문무왕이 조성한 인공연못으로, 왕족들이 놀이를 즐기고, 사신을 접대하던 연회의 장소입니다.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어 그곳에 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지는 안압지...
못의 원래 이름은 안압지가 아닌 ‘월지’였습니다. 후에, 조선시대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었다 해서 ‘안압지’라 불리게 됐는데,
독특한건 안압지가 인공연못임에도 물이 흐르는 구조를 띠고 있다는 겁니다.
언제나 맑은 물이 흐르도록, 배수로를 만들어 두고, 호안의 형태를 굴곡지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높이의 차이를 두면, 실제보다 더 넓어 보이는 효과를 줍니다.
보통의 인공연못에서는 느낄 수 없는 탁 트인 전망을 가진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안압지가 군신들의 연회나 귀빈들의 접대장소로 이용되었다는 것은 출토된 유물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1975년, 준설을 겸한 발굴조사에서, 신라 때 축조되었던 안압지의 모습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안압지에서는 무려 서른 한 곳의 건물터가 발견됐고, 왕족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삼만 여점의 유물이 출토됐습니다.
이 중에, ‘주령구’라는 목제품이 있습니다.
나무로 만들어진 주령구은, 모두 열 네개의 면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주사위로, 각 면에는 각기 다른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술 석잔을 한 번에 마시기, 요즘 말로 단숨에 마신다는 원샷을 뜻하고,
팔을 구부려 다 마시기,러브샷을 뜻합니다.
또, 술잔을 비우고 크게 웃어야 하고, 여러사람 코를 때리라는 내용도 적혀있습니다.
간지러움을 태워도 가만히 있어야 하는걸 보면, 잔치 때 흥을 돋구는 놀이기구임이 분명한데,
여기엔 음악 없이 춤을 춰야 하는 내용도 적혀 있습니다.
안압지에서 주사위를 던지며 벌칙을 받았을 신라인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안압지에서는 그 규모만큼, 많은 유물이 나왔습니다. 연꽃무늬 수막새를 비롯해 출토된 유물 대부분, 신라왕족의 생활과 깊숙이 관련된 것들로, 이는 당시 왕실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금동연꽃 오리장식과 난간을 통해 당시의, 화려했던 안압지의 정원과 정자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여기에, 여인들이 사용했던 유물도 발견됐습니다. 청동거울과 비녀, 청동 빗과 반지는 이곳이 왕실의 자리였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줍니다.
통인신라시대 별궁 안에 있었던 연못, 안압지를 통해 당시 신라인이 외국과 교류를 활발히 펼쳐나갔던 사실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슴, 기러기, 낙타 등 희귀한 동물의 뼈가 발견됐는데, 이는 바다를 통해 수많은 나라와 문물을 교환했던 신라인의 교역망을 보여줍니다. 여기에는 신라인들의 뛰어난 항해술도 뒷받침되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원형 그대로 출토된 목선이 발견됐다는 겁니다. 길이 6미터에 달하는 목선은 통나무 배 중에서도 가장 발달된 형태로, 우리나라 최초의 목선입니다.
신라 귀족들이 배를 띄워, 유희를 즐겼을 안압지..
연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듯하지만, 굴곡져 아스라이 이어지는 풍경은 한정된 공간에 역동적인 효과를 더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넓은 바다를 연못에 담아내고자 했던 신라인
안압지는 통일신라의 왕실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작성자 : 전체관리자 | 등록일 : 2018-04-10 | 조회수 : 2246

SNS 로그인 페이스북 로그인하기 트위터 로그인하기 네이버 로그인하기 카카오 로그인하기 로그아웃

(0 / 300)

댓글등록
전체댓글수 0

quick menu

quick menu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