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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남한강의 물길 따라 다산의 향기와 세종의 유산을 만나다 스크랩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with 이철호 작가



남한강의 물길 따라 다산의 향기와 세종의 유산을 만난다 



한강은 수도 한양과 한반도의 시간을 살찌운 원초적인 젖줄이다.

당연히 그 강에는 아름다운 한국의 풍경과 함께 우리의 역사를 발전시킨 놀라운 문화유산과 인물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흐르고 있다.

풍경과 공간을 더욱 깊고, 진하게 만들어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보여주는 그 이야기를 찾아 남양주와 여주의 강변길을 거닐어 본다



수종사에서 여유당까지 


수종사 일주문

<수종사 일주문>


짙은 어둠이 진한 청록색으로 변해갈 때 운길산 수종사를 오른다.

길고, 좁고, 가파른 길을 한참 오르면 나뭇잎과 이끼로 머리를 푸르게 장식한 일주문이 나온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작은 주차장에는 차를 댈 곳이 없다.

참 부지런한 사람들을 상상하며 발아래 돌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편안한 마음으로 오르면 작지만 아담하고 예쁜 불이문이 마치 마중 나온 듯 기다리고 있다.

거기서 위로 오르는 부드러운 계단이 길을 안내하는데, 그 중간 운길산 정상으로 가는 갈림길을 지나쳐 구비를 돌면 돌연 작디작은 해탈문이 나타난다.

이때쯤 하늘의 청록색은 이미 높이 솟아오른 태양에 물들어 차츰 파랗게 변해가고,

작은 문을 지탱하는 기둥은 가장자리를 태양의 남긴 황금빛으로 멋지게 물들이고 있다.

그 해탈문의 너머가 바로 신라시대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전해지는 전설의 운길산 수종사(水鍾寺)이다.


오랜 사찰은 전설을 몇 개씩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수종사는 그중 세조의 전설이 가장 유명하다.

지병 치료를 위해 강원도에 다녀오던 세조가 양수리에서 밤을 보내던 중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 찾아가 보니

토굴 속에 18 나한상이 있고 바위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종소리를 내고 있었다는 전설이다.

세조는 그 18 나한을 봉안해 절을 짓고 수종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데,

이 신비롭고 아득한 전설과 달리 해탈문 안에 자리한 사찰은 소박하고, 아담하고 또 편안하다.


수종사 삼정헌

<수종사 삼정헌>


문을 들어선 이를 가로막듯 가장 먼저 반기는 전각은 삼정헌이라는 이름의 낡은 그윽한 찻집이다.

누구나 남한강의 절경을 내려다보면 한 잔의 맑은 차를 공짜로 마실 수 있어 수종사의 이름을 널리 알고 있는 다실이다.

바로 앞 바위틈으로 잡맛이 없고 물이 달고 시원하다는 수종사 샘물을 맛볼 수 있는 작은 샘터가 보인다.

특히 이곳은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가 함께 차를 마시던 장소라고 하는데,

조선 중·후기엔 정약용, 초의선사, 김정희 등 내로라하는 차꾼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고 한다


샘터 바로 뒤로는 관음전 등 더 높은 곳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고, 그 옆으로 커다란 석불상이 있다.

그 불상 옆으로 종무소, 부도탑과 석탑 그리고 대웅보전과 이어지는 몇 채의 전각이 길게 늘어서 있는 곳이 마당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수종사의 전부이다.

그 앞으로 마치 전망대와 같은 두 개의 마당이자 옥상이 산과 한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전망대에는 크게 묵언이라는 푯말이 붙여 있는데, 마당에는 마치 터줏대감처럼 누워있는 검은 삽살개는 마치 묵언수행을 하듯

쳐다보는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하고 근엄하게 늘어져 있다.


수종사 석탑과 부도

<수종사 석탑과 부도>


견공 너머로 부도탑과 석탑이 보이는데, 그곳을 거쳐야 대웅보전을 들어갈 수 있을 듯 나란히 붙어 있다.

석탑과 부도는 다른 곳에 비해 소박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아담하고 수려해 보인다.

그리고 그 안의 이야기는 더욱 잔잔하게 마음을 파고드는 것들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호인 팔각오층석탑은 그 속에 층층마다 금동부처님이 가득 모셨다고 한다.

1957년 해체과정에서 초층 탑신석에서 금동불감, 그 속에서는 석가모니불, 반가사유 미륵보살, 지장보살 등 금동삼존불이 발견됐다.

특히 석가모니불 대좌 바닥에는 시주 명빈 김씨(施主 明嬪 金氏)’의 명문이 있고,

복장 안에는 성종의 후궁들인 숙용 홍씨, 숙용 정씨, 숙원 김씨가 1493년에 발원한 복장발원문이 나왔다.

또 이와는 별개로 1628년 인목대비가 이 불탑에 24분의 불보살상을 모셨다는 것 역시 추가로 발견되었다.

1957년에 기단 중대석에서 8, 초층 지붕돌에서 4분이, 1970년에 2층 지붕돌에서 9, 3층 지붕돌에서 3분의 금동 불보살상이 발견된 것이다.

지금까지 이토록 많은 불보살상이 한 불탑에서 발견된 경우는 없었고,

조성연도와 발원자가 명확할 뿐만 아니라 한 불탑에 시대를 달리하여 두 번 불보살상을 봉안한 일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한다.

게다가 선조의 계비이자 왕후이며, 서궁에 유폐되었던 10년의 고통스런 나날을

사경과 염불로 참고 견디었던 인목왕후의 간절한 비원을 만날 수 있는 불탑이라 할 수 있다.

 

157호인 수종사 세존사리탑에서는 1939년에 부처님의 사리와 사리장엄이 발견됐다고 한다.

부처님 사리14과를 수정 사리병에 넣고, 이것을 사리 내함인 금동 구층소탑에 넣고 다시 은제도금 육각 사리 외함에 넣은 후,

사리 외함을 청자호에 넣어 교리에 따라 탑 속에 봉안하였다.

봉안한 기록을 두터운 지붕돌 옆면에 새겼는데 의역하면

태종 이방원과 의빈 권 씨의 딸인 정혜옹주의 극락왕생을 위해

부처님의 사리탑을 문화 류씨와 금성대군이 세종 21(1439) 10월에 조성하였다로 해석된다고 한다.

의빈 권 씨의 유일한 자식 정혜옹주는 1424년에 꽃다운 나이로 죽었는데,

이에 권 씨는 죽은 딸을 위해 사후 16년 만에 세존사리탑을 조성한 것이다.


수종사 대웅보전

<수종사 대웅보전>


당시 시대의 역사와 간절한 염원을 만나고 그 부도탑과 대웅전의 앞에서 멀리 세상을 바라본다.

원래 남한강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었지만, 좀처럼 물러서지 않는 안개로 수종사는 마치 산과 구름 위의 섬이자 인세와 떨어진 또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하다.

이곳을 자주 찾던 다산 정약용은 수종사의 세 가지 즐거움을 동남쪽 봉우리에 석양이 붉게 물드는 것을 보는 즐거움,

강 위에 햇빛이 반짝이며 창문으로 비쳐 들어오는 것을 느끼는 즐거움, 한밤중 달이 대낮처럼 밝아 주변을 보는 즐거움이라 말했다고 한다.

이른 시간이라 햇살 들어오는 창가에서 차 한 잔을 마시면서 강을 내려다보거나, 밤과 함께 찾아오는 아름다움을 만날 수는 없을 듯하다.

하지만 짙은 안개가 전해주는 신비함을 한 움큼 마시면서 아득하고 거친 세상을 헤쳐나갔던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가슴 깊게 담아볼 수는 있을 듯하다.


 

생태공원의 여유와 다산의 넓디넓은 품


다산생태공원

<다산생태공원>


산을 굴러 내려가듯 급하게 내려오면 그 끝이 남한강변이다.

강을 만나기 바로 전 작은 마을을 지나는데, 그 끝에 다산유적지와 생태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아직 아침인데 사람들은 연인, 가족 그리고 애견들을 한손에 잡고 공원을 찾고 있었다.

서늘한 아침공기와 잔잔한 강과 하늘은 사람들을 절로 즐겁게 만들고, 산책에 들뜬 강아지들을 더욱 흥분하게 만드는 듯하다.

그들은 소소한 장난으로 걷거나, 의자에 앉아 다정한 셀카와 다독거림으로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다산유적지 앞 거중기

<다산유적지 앞 거중기>


생태공원 주변은 독특한 카페와 음식점이 제법 그럴 듯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그 경계지역을 사이로 다산유적지가 있다. 입구에는 거중기 모형이 커다랗게 세워져 있어 반갑다.

안으로 들어서면 절로 시원함 숨을 들이키게 하는 그 넓은 공간에 반긴다. 저편 멀리 커다란 나무를 수호신처럼 세운 다산의 여유당(與猶堂)이 보이고,

그 뒤 그리 높지 않지만 풍성해 보이는 언덕이 있다. 그 위가 바로 다산의 묘소이며, 그 아래에 제작이 있다.

단정한 여유당을 둘러보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꼿꼿했던 그의 모습을 그려본다.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우리에게 실학으로 대변되던 조선 후기 변혁의 상징이자, 비운의 천재이며, 시대를 기록한 운둔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곳 북한강과 남한강이 갈라지는 양수리 위쪽 정씨들의 세거지인 마재에서 나고, 자랐다.

권철신이나 이가환 등 성호 이익의 제자들을 통해 실학적 사상을 받아들였고,

소년시절에 지방수령이었던 아버지 정재원을 따라 지방행정을 몸소 겪기도 했다.

스무 살 때 과거에 합격해 성균관의 유생이 되었으며, 1789(정조 13) 마침내 알성시에 급제해 첫 벼슬길에 나섰다.

정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그의 앞에는 탄탄대로가 펼쳐지는 듯했다.

게다가 민심이 흉흉해 민란의 조짐이 팽배해 있던 곡산지역의 부사로 부임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3년 만에 백성의 살림살이와 관아의 재정을 튼튼하게 만들었다.

또 수원성의 설계도와 기구를 만드는 일 맡아, 일꾼들의 힘겨움을 보고 거중기와 활차(滑車, 도르래),

고륜(鼓輪, 바퀴달린 달구지) 따위를 발명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새로운 것에 항상 열려 있었던 그는 서학에 빠져 있었고,

그를 비호해주던 정조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꿈과 벼슬생활도 끝이 났다.


다산유적지 여유당

<다산유적지 여유당>


정조의 상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당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 했다.

이것은 도덕경(道德經)의 한 대목인 ()함이여,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함이여,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이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으로,

조심조심 세상을 살아가자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풍파는 득달같이 그에게 달려 들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셋째 형 약종은 옥사했고 그는 둘째 형 약전과 함께 기나긴 귀양살이를 떠났다.


그렇지만 강진 일대에서 지낸 그의 귀양살이는 단조롭지만 한가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과 농촌의 현실을 관찰하고 기록하여 경세학과 목민학의 정리에 골몰했던 것이다.

그렇게 수령의 부정을 막기 위해 쓴 목민심서, 치도의 방책을 제시한 경세유표, 공정한 형벌을 위한 흠흠신서등 불후의 저작을 남길 수 있었다.

그렇게 죽기 3일 전까지 학문을 놓지 않았던 다산은 대단한 낙관주의자이며, 놀라운 품을 가진 대인이었던 듯하다.


사람들은 모두 너희들을 비판하거나 업신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슬퍼하지 마라.

아비가 죽었느냐? 아비가 죽거든 그때 울어라. 자꾸 웃어라. 주변에서 웃을 수 있는 것을 찾으라. 없으면 남의 것을 빌려서라도 웃어라

유배지에서 침울해하는 두 아들에게 다산이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지식과 지혜로만 측량하기 어려운 다산의 고민과 업적은 고난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이런 마음가짐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풍요로운 여주에 새롭게 마련한 세종의 안식처

 

남한강과 북한강이 갈라진 두물머리를 지나, 남한강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풍요로운 여주의 땅이 나온다.

그 입구의 관문이자 안내자처럼 영녕릉이 있다.

영녕릉은 조선 제4대 세종과 그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능인 영릉(英陵)

17대 효종과 그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능인 영릉(寧陵)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세종대왕 광장

<세종대왕 광장>


능의 입구는 잘 정돈되어 있지만, 기념관은 코로나로 입장이 제한되어 있다.

그대로 입구를 들어서 잠시 걸으면 따가운 가을 햇살에 하얗게 빛나는 광장과 황금빛으로 세워진 세종대왕을 만날 수 있는 세종대왕 광장이 나온다.

세종대왕은 조선 제4대 왕이자 조선 초기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던 왕으로, 우리에게는 집현전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하였으며 과학을 장려했던, 학자이자 예술가이며, 변혁가였던 놀라운 군주로 알려졌다.

광장의 구석에는 당시의 놀라운 유물과 발명이 재현되어 있어 그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과 함께

너무 익숙해서 잊고 있던 대왕의 업적을 되새기게 만들어준다.


세종대왕 광장

<세종대왕 광장>


최근 인사동 발굴현장에서 세종대의 금속활자 1600여 개가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그야말로 세계사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하는 발견이자 입증이었다.

세종 대에는 과학기술이 비약적이며 다채롭게 발전하였다.

혼천의(渾天儀혼상(渾象규표(圭表) 등 천문관측기기를 새롭게 발전시켰고,

해시계·물시계·측우기 등 생활에 도움을 주는 창조적 발명을 계속 일궈냈다.

거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인쇄술의 발달이었다.

태종 때 만들어진 청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는 글자의 모양과 크기가 매끈하거나 고르지 못했다고 한다.

즉위 초부터 이에 관심을 기울였던 세종은 경자자(庚子字 : 1420)·갑인자·병진자(丙辰字 : 1436) 등을 주조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세종대왕의 놀라운 업적과 그 이어짐은 광장을 지나 나오는 복원된 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단정한 모습이 인상적인 재실은 이제 서점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인쇄, 출판을 통해 독서와 지식을 장려하고, 집현전을 설치해 훈민정음을 완성,

반포한 세종의 뜻과 업적을 제대로 계승한 재실의 복원이자 활용이 아닌가 싶다.


세종대왕릉

<세종대왕릉>


재실을 지나 다시 숲속 산책로를 한참 걸으면 홍살문과 함께 높고 높은 능이 나온다.

정면에는 제각이 그리고 옆으로는 비각이 세워져 있고, 부드럽게 올라간 동산 위에는 세종과 그의 왕비였던 소현왕후의 합장묘가 자리하고 있다.

세종대왕릉은 조선 왕릉 최초로 한 봉분에 두 개의 방을 갖춘 합장릉이라고 한다.

처음 능은 당시 광주(현 서울 내곡동)에 있었다.

하지만 세종의 사후 조선왕조는 문종이 즉위한 지 겨우 2년 만에 죽고,

아들인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 영월 땅에 유배되어 죽는 등 환난이 끊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세종의 묘를 잘못 썼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사후 19년이 지난 1469(예종 1) 이곳으로 천장하게 된 것이다.

 

원래 이 묘소는 선주인이 있었다고 한다.

예종은 개장할 묘소를 지금의 서울 땅에서 40킬로미터 이내에서 찾도록 했는데,

이때 지관이 자신이 바라던 명당을 비를 피하다 찾게 된다. 그런데 그곳은 이미 광주 이씨 삼세손인 충희공 이인손의 묘택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인손은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해 우의정에 이르렀고, 그의 조부는 고려 말의 절의와 명문으로 명성을 떨쳤던 둔촌 이집이다.

현재 서울 강동구 둔촌동 이름은 거기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이에 예종은 광주 이씨 가문에 많은 재물을 하사하고 이극배를 의정부 우참찬(2)으로 승진시켰다.

그리고 조선의 어느 곳에라도 이인손의 묘를 쓰라고 다독거린 후 묘를 옮긴 것이다.


효종대왕릉 제각

<효종대왕릉 제각>


거기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함께 따라다닌다.

무덤을 파보니 이미 묘가 옮겨질 것을 예언한 문구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나,

당시 세도가의 견제를 위해 터를 그곳으로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야기의 진위를 떠나 여주가 세종대왕의 덕을 보고 있음은, 또한 능과 그 주변이 참으로 보기 좋은 곳임은 누가 보더라도 명확한 듯하다.

이쯤 되면 명당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하릴없는 생각이 스쳐갈 즈음 홍살문과 함께 능과 제각이 보이기 시작한다. 선은 부드럽고, 둘러싼 숲은 편안하고, 하늘은 푸르다.

제각에서 살포시 보이는 능의 머리를 보다가, 옆으로 크게 돌아 묘의 바로 아래까지 올라가본다.

석상과 석물이 생생하고, 독특하고 반갑다.


효종대왕릉

<효종대왕릉>


능의 오른쪽에는 비각이 있다.

그 뒤편으로 왕의 지나면 하늘로 솟은 나무들 사이로 왕의 산책로가 있는데, 효종대왕의 능으로 가는 길이다.

두 개의 왕릉은 700m 거리를 두고 있는데, 이를 잇는 오솔길은 짧지만 조붓한 흙길이라 정감이 있고, 숲이 아늑하고 한산해 걷기 좋다.

5월 중순부터 10월 초까지만 산책로로 개방한다고 한다.

비처럼 쏟아지는 도토리들의 리듬을 즐기며 잠시 걸으니 비슷한 듯 약간 다른 효종대왕의 능이 나온다.

세종대왕의 능과 바로 가까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찾는 이가 적지 않다고 한다.

청의 불모가 되었다 극적으로 왕이 된 후 조선의 군대를 강하게 만들고 북벌을 꿈꿨던 비운의 대왕이라 하겠다. 잊혀짐이 안타깝다


 

여강의 안내자, 신륵사


신륵사 일주문

<신륵사 일주문>


여주를 나오면 다시 강을 찾게 된다. 여주 구간 남한강은 여름에는 황강, 겨울에는 여강으로 불렸다.

그 여강 북측에 신륵사가 자리하고 있다. 보기 드물게 강가에 자리 잡은 사찰이다.

그래서인지 사찰을 아니라 근처의 유원지를 찾은 느낌이다. 도자 전시관, 체험관 그리고 각종 음식점과 도자기의 상가촌을 먼저 만나게 된다.

그리고 물레방아가 있는 공원을 지나야 사찰의 입구가 보인다. 여기서는 일주문이 제 역할을 하는 듯하다.

속세와 경계를 확실히 만들어주는 듯하다.

일주문을 지나면 전각이 하나둘씩 나타나는데, 점차 낡고, 소박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나름 재미있다.

넓은 대지에 비해 옛 전각들은 한군데에 올망졸망 모여 있다.

그 손때 묻은 아름다움과 편안함을 즐기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신륵사 대웅전과 석탑

<신륵사 대웅전과 석탑>


여주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고 한다.

다만 고려시대 말기에 당시 왕사였던 나옹선사 혜근이 잠시 머물던 중 입적한 사찰로 유명하다.

미륵의 힘으로 사나운 말의 기운을 제압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1472(성종 3)에는 세종대왕릉의 원찰(궁중의 불당)로 삼아 보은사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역사가 깊은 만큼 신륵사는 주변 경치의 아름다운 경치와 어울리는 보물급 유물(국가지정문화재 8, 도지정 문화재 7)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서북편에 위치한 조사당(보물 제180)은 신륵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3화상의 덕을 기리고 법력을 숭모하기 위해 영정을 모셔놓은 곳이다.


신륵사 삼층석탑

<신륵사 삼층석탑>


그리고 대웅전 앞에는 보물 제225호로 지정된 대리석재의 다층석탑이,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바위 위에는 중부지방에 흔치 않은 다층 전탑이 우뚝 솟아 있다.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6)으로 불리는, 높이 약 9.4m의 고려시대 전탑이다.

전탑 위에는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가, 그 아래에는 여강을 둘러보는 정자와 함께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바위와 강 그리고 건너편의 황포돛배와 이런 보물들은 너무 잘 어울려 보인다.

그런 자연스러움과 아름다움이 어쩌면 보물의 가치를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고려 시대 대학자인 목은 이색과 조선시대 방랑시인 김삿갓 등 이름난 시인들이 남긴 시가 이곳 신륵사에 많다고 한다.

보는 이들 역시 절로 예술적 감흥이 떠오르는 듯 햇볕이 따갑지도 않은지 바위 위를 넘나들며 사진을 찍는 이들로 강변이 분주하다.

그 가족과 연인의 모습이 여강을 더욱 따뜻하고 정겹게 만들어주는 듯하다




글 이철호 작가



전)월간 러너스코리아 기자

전)격월간 연콘텐츠 기자

전)수원청소년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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