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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자연과 역사를 잇는 산성과 돌다리를 만나다, 상당산성과 농다리 그리고 삼년산성 스크랩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with 이철호 작가



자연과 역사를 잇는 산성과 돌다리를 만난다 

– 상당산성과 농다리 그리고 삼년산성-



사람이 머무는 곳은 이야기와 함께 삶이 자라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우리의 역사란 어쩌면 집을 올리고, 궁궐을 세우고 믿음의 터와 같은 공간을 만들고 또 허무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 여정은 또 공간을 잇는 길을 만들고, 그곳을 지키는 단단한 성도 만들기 마련인데그것은 자연에 기대고, 자연을 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되던 삼국시대는 북으로 전진하고, 남으로 내려오고, 동으로 밀고, 서로 나아가던 시대였다.

그 거친 여정은 중원을 향했고, 그곳에는 아직도 지키고, 나아가던 당시의 치열했던 지혜와 풍경이 자연과 함께 오롯이 남아 있다



물길 사이에 세운 단단한 지혜의 아름다움, 진천 농다리


건너편 산책길에서 바라본 농다리

<건너편 산책길에서 바라본 농다리>


중원으로 가는 길목에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는 사자성어로 유명한 충청북도 진천군을 만난다.

예부터 물이 좋고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진 고장이다 보니 머물고 가꾸던 이들의 지혜와 놀라움을 만나기 좋은 곳이기도 하다.

 

호법과 대소 JC를 거쳐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오다 보면 아름다운 하천이 아래로 지나는 모습을 만나게 된다.

음성에서 시작된 긴 줄기의 미호천(옛 이름은 세금천)인데, 강의 수량이 풍부해지고, 아름다운 굴곡을 만들기 바로 전 작고 단단한 돌다리를 만나게 된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긴 돌다리로 유명한 진천 농다리이다.

농다리라는 이름의 자는 물건을 넣어 지고 다니는 도구의 ()’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고

혹은 고려시대 임연 장군이 용마(龍馬)’를 써서 다리를 놓았다는 전설에서 자가 와전되어 이 됐다고도 한다.

다만 문헌에는 "고려 초 임장군이 세웠으며,

붉은 돌로써 음양을 배치하여 28수에 따라 28칸으로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제 시간은 그 이름의 유래조차 잊힐 정도로 흘렀지만, 마을과 사람을 잇던 천 년 전의 다리는 여전히 사람을 모으고,

한반도 모양을 닮은 초평저수지를 잇는 아름다운 산책로와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농다리 옆 인공폭포

<농다리 옆 인공폭포>


농다리를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중부고속도로 아래를 지나는 작은 터널을 지나게 된다.

터널 앞에는 독특한 음식점과 카페와 함께 농다리전시관이 있고, 터널을 나오면 넓은 잔디밭과 고요하게 흐르는 미호천을 만나게 된다.

건너편은 낮고 부드러운 산의 능선이 이어지고, 그 사이에 검은 바위의 인공폭포가 수려한 모습을 드러낸다.

폭포 앞에는 하천에 잠길 듯 말듯한 징검다리가 작고 시원한 포말을 만들어주고 있으며, 그 옆으로 나무데크로 조성된 산책로와 정자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멋들어진 나무 너머로 단단한 돌다리가 나타난다. 바로 진천의 농다리이다.


농다리 아랫부분

<농다리 아랫부분>


농다리는 그 모습의 독특함이나 단단함이 우리의 기대를 가볍게 뛰어넘는다.

우리의 기억 속 마을 앞 돌다리, 전통의 다리라는 건 아무래도 소박하고, 간편하기 마련이다.

그에 비해 농다리는 작은 돌을 강물 위로 단단히 쌓아 올려 작은 탑과 같이 솟아 있고, 그 탑들이 단단하고 평평한 돌로 지네처럼 길게 연결되어 있다.

그 색도 검고도 붉으니 독특한 모양도 모양이거니와 총 28칸의 마디가 주는 거칠지만 단단한 모습은 보는 이들을 절로 경탄하게 만든다.

그 마디 사이로 미호천의 물이 시원하면서 거세게 흘러가는데,

석회 등을 바르지 않았고 폭도 1m가 채 되지 않는 다리임에도 장마 등에 의해 떠내려가지 않고 그 오랜 시간을 버텨온 게 신기하기 짝이 없다.

자세히 보면 돌들이 강바닥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폭이 좁아지고, 서로 맞물려 단단하게 붙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지혜와 과학이 하천의 빠른 유속과 함께 그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이다.

거친 모습이 주는 아름다움이 놀랍고, 사소한 지혜가 이룬 과학이 또 경이롭다.

 

찬찬히 돌다리의 단단함을 느끼며 걸어본다.

그 사이로 흐르는 하천을 즐기고, 아름다운 풍경이 담아보고,

이곳에 전해지는 임장군의 용바위(쌍바위) 전설과 오누이 힘내기 전설을 확인해본다.

그리고 주변의 잘 조성된 데크와 정자 사이를 거닐면서 자연을 잇는 풍경을 만든 앞선 이들의 지혜와 노력에 잠시 감사를 보내본다.

 


본연의 가치를 지키고 있는, 청주 상당산성上黨山城



상당산성 남문 아래 공원

<상당산성 남문 아래 공원>


진천을 지나면 직지의 고장이자 이제는 교육도시로 자신을 알리고 있는 청주를 만나게 된다.

청주의 도심을 비켜 청주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상당산의 잘 닦은 도로를 타고 오르면 이 고장을 천 년이 넘게 감싸고 있는 성을 만나게 된다.


상당산성 남문 성문과 입구

<상당산성 남문 성문과 입구>


입구에는 넓은 주차장과 넓고 푸른 잔디공원이 펼쳐져 있고, 하늘을 향해 가듯 서서히 솟아 오른 잔디의 끝에 높고 단정한 산성의 성문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사적 제212호로 삼국시대 백제가 쌓은 산성이라 알려져 있는 청주 상당산성(淸州 上黨山城)이다.

삼국시대의 산성이라기에 치열했던 시대의 거친 흔적을 기대하고 왔지만, 보이는 풍경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노니는 연인과 가족의 한가롭고 흐뭇한 모습이다.

 

물론 산성의 역사는 지금의 외모와 다르게 시대의 격동을 절묘하게 타넘어 왔다.

청주는 백제 때 상당현으로 불렸는데, 전설에 따르면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가 30만 명의 병력으로 쌓았다고도 하고,

김유신 장군의 전적지인 낭비성이라는 설도 있다.

물론 낭비성은 대동지지에서는 충주로, 신증동국여지승람등의 지리서들은

오늘날의 청주 지방을 삼국사기의 낭자곡(娘子谷) 혹은 낭비성이라 하는 등 여전히 그 위치는 모호하다.

그렇지만 낭비성 전투는 김유신 장군의 전설이 시작된 전투라 할 수 있고, 삼국의 변화와 항쟁이 거칠게 한반도를 휩쓸던 7세기 초반을 말해주는 전투이다.

누가, 언제 이 성을 만들고, 활용했는지는 모호하지만, 당시 이 주변이 무척 중요했고 또 그만큼 소요했음을 말해주는 전설이라 하겠다.


상당산성 성벽

 <상당산성 성벽>


산성의 가치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영호남과 서울로 통하는 통로를 방어하는 요충지로 주목받았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충청도의 군사 책임자인 병마절도사는 청주읍성에, 그 배후인 성당산성에는 병마우후를 두었다고 한다.

지금의 우리가 보는 산성 역시 임진왜란 중인 선조 29(1596)에 수축하고, 이후 숙종 42(1716)부터 영조 23(1747)까지 대대적으로 개축한 모습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성곽시설로는 남문을 비롯하여 동문과 서문, 3개의 치성(雉城 :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벽),

2개의 암문(暗門 : 누각이 없이 적에게 보이지 않게 숨겨 만든 성문), 2곳의 장대(將臺),

15개의 포루(砲樓)터 외에 성안 주둔 병력의 식수를 대기 위한 대소 2곳의 연못이 있다.


상당산성 남문

<상당산성 남문>


공원 옆 나무 그늘이 시원한 오르막을 따라 성의 정문인 남문에 들어선다.

성문 바로 옆은 치성이 단단하게 자리하고 있고, 그 옆으로 급격한 내리막이 이어진다.

산성은 상당산의 8부 능선을 따라 성내 골짜기를 감싸고 있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고, 정문인 남문 옆으로 멀리 다음 능선 위에 동장대가 보인다.

인상적인 것은 가파른 언덕 위에 단단하고 두껍게 조성된 치성이었다.

바깥의 한가로움과 다르게 이 산성이 방어지로 무척 중요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성벽의 안쪽으로는 성을 따라 도는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다. 그렇게 성의 주변을 돌면 청주시내가, 청주국제공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상당산성 저수지와 마을

<상당산성 저수지와 마을>


남문 아래로 가파른 산길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상당산성 저수지가 있다.

그 저수지 건너편에는 전통주와 빈대떡, 묵밥 등을 즐길 수 있는 한옥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아래로는 수구 유적지가 있고, 저수지를 따라 도는 데크와 산책로가 이어진다.

산책로를 잠시 걸으면 산성 안 골짜기의 너른 공간에 조성된 자연생태공원(자연마당)을 만나게 된다.

상당 산성 내 휴경지를 생태학습공간 및 시민 휴식공간으로 조성한 것인데, 그 풍경이 무척 아름답고, 평화롭다.

산성이 만들어진 이유가 막고 지키는 것이고,

그 지키고자 하는 것이 성안 사람들의 평화와 건강이라면 지금 상당산성은 그 역할을 여전히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든든한 역사의 거성, 삼년산성三年山城


삼년산성과 성벽 주변 산책로

 <삼년산성과 성벽 주변 산책로>


청주는 보은으로 이어진다. 상당산성과 낭비성 전투의 전설 이전, 신라의 번영기와 전쟁의 화려한 기록을 간직한 삼년산성이 그곳에 있다.

 

삼년산성은 5세기 후반(470) 신라가 쌓은 석축식 산성으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기에 삼년산성으로 명명했다고 전해진다.

재미있는 건 삼년산성이 삼국사기에 유일하게 축성시기와 과정이 기록된 산성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이 산성의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을 말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5세기 초까지만 해도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발전도 늦었고, 가야의 침략에 광개토대왕의 고구려군 도움을 받을 정도로 약한 나라였다.

그러다 조금씩 힘을 기른 신라는 백제와 나제동맹을 체결(433)하고, 북진정책을 추진하는데 삼년산성은 당시 신라의 최전방의 요새로 축조된 것이다.

 

삼년산성 축조는 충북 일대가 완전한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음을 말해준다.

이제 신라는 북쪽으로 중원과 한강 유역, 서쪽으로는 백제의 웅진, 사비에 대한 견제와 진출이 용이해진 것이다.

때문에 삼년산성을 신라 삼국통일의 전초기지로 해석하는 의견이 많다고 한다.

게다가 삼년산성은 2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단 한 번도 함락되지 않았다. 물론 확인이 어렵기는 하지만,

전하는 바에 따르면 통일신라 시기 김헌창의 난 당시 반란군이 삼년산성에서 농성을 벌이다 토벌된 적을 제외하고는 함락된 기록이 없다고 한다.

후삼국의 전쟁 때에는 후백제 견훤군이 머물던 삼년산성을 왕건이 직접 공략했지만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이런 성의 단단함은 직접 올라보면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


삼년산성 서문 아래 아미지 연못터

<삼년산성 서문 아래 아미지 연못터>


바깥에는 보는 오정산은 그리 높지도 넓지도 않고, 그 능선을 따라 보일 듯 말 듯 자리한 산성은 오히려 고즈넉하고 한가로워 보인다.

한적한 시골마을의 논과 밭이 사이에 자리한 안내판을 보고 산성을 향해 올라가본다.

성의 정문인 서문으로 가는 길은 현재 잘 포장되어 있지만, 나무와 이끼가 가득하고, 가파르다.

그리고 길 위로는 고개를 하늘로 향해야 볼 수 있을 정도로 가파른 언덕이, 아래로는 깊은 계곡이 펼쳐져 있다.

짧은 거리이지만 언덕과 나무로 길과 하늘이 둘러싸여 마치 깊은 산중에 들어온 듯한 느낌에 젖어들게 되고, 그 사이로 하얀 성곽이 모습을 드러낸다.


 삼년산성 서문지 성벽

<삼년산성 서문지 성벽>


길 양옆으로 높고 넓은 성벽이 솟아 있고, 그 앞으로 거친 암석군이, 그 아래로 거대한 연못의 흔적이 먼저 들어온다.

연못은 아미지(蛾眉池)라는 이름이고, 주변 암벽에는 옥필(玉筆유사암(有似巖아미지 등의 글씨가 오목새김되어 있는데 김생(金生)의 필체라고 한다.

무엇보다 약 8m~10m에 달하는 성벽의 두께에 우선 놀라고,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성벽의 높고 단단함 그리고 의외의 아름다움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하나 깎아 만들어 쌓았다는데, 그래서인지 마치 현대에 쌓은 성처럼 깔끔하고, 각이 선명하다.

성벽은 납작한 돌을 이용해서 한 층은 가로 쌓기를 하고, 한 층은 세로 쌓기를 하여 매우 튼튼하게 약 1,800m나 이어지고 있다.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른데 1320m에 달하며 거의 수직으로 쌓여 있다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로 구축된 셈이다.


삼년산성의 두께

<삼년산성의 두께>


삼국사기에 따르면 삼년산성의 축성에 3천 명을 동원했다 전한다.

당시 신라의 국가단위 프로젝트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2000KBS 역사스페셜 팀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삼년산성을 쌓는데 돌 1천만 개, 8톤 트럭으로 25천대 분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국운을 걸었고, 결국 삼국은 통일되었다.

이제 전쟁은 끝나고, 이곳은 도로가 지나는 한가로운 시골이 되어 있다.

그 한적한 야산 속에 천년 이상을 굳건하게 웅크리고 있는 산성은 인간의 욕망과 의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듯하다.



속리산 미륵신앙의 도량, 법주사 法住寺

 

삼년산성의 견고함을 본 후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산사(山寺),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1천 년 넘게 우리 불교문화를 계승하고 지킨 종합승원 7곳 가운데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2018)에 선정된 법주사를 찾아본다.

항상 전쟁은 기원과 함께 움직이는 법이기도 하다.



법주사 경내

<법주사 경내>


법주사 가는 길은 여느 유명 사찰이 그렇듯 잘 단장되어 있다.

다만, 법주사는 그 입구에 정일품송이 멋들어지게 자리하고 있다는 게 좀 더 매력적이기는 하다.

다만, 그 기운과 풍채가 예전과 조금 다른 듯 해보여 조금 아쉽기는 하다.

그리고 법주사 경내로 가는 길은 나무가 무성한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입구 바로 전까지 게이트볼을 즐기는 이들로 가득하다.

소소하고 건강한 모습이 의외로 보기 좋다.

 

공원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계곡과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산책로와 함께 법주사로 들어가는 길이 시작된다.

법주사는 553년에 의신 조사가 창건했으며, 절 이름은 불경을 나귀에 싣고 돌아와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776년에 진표가 이 절을 중창했고 그의 제자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오랜 전쟁, 산성에 이어 이곳 사찰이 만들어진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건 7세기의 산성을 보고 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법주사 대웅전과 쌍사자석등

<법주사 대웅전과 쌍사자석등>


왕실의 비호 아래 손꼽히는 대찰이 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24(인조 2)에 중창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도 산물을 들어서면 오래된 신앙의 흔적과 다양한 문화재가 한눈에 들어온다.

1624년에 중건된 대웅전이 1605년에 재건된 국내 유일의 5층 목탑인 팔상전 너머로 보인다.

1624년에 중창된 능인전(能仁殿)과 원통보전(圓通寶殿),

그리고 국가지정문화재인 쌍사자석등(국보 제5석련지(국보 제64사천왕석등(보물 제15) 등이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법주사 불상

<법주사 불상>


그렇지만 가장 인상적이고, 가장 빨리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찰의 담장과 전각을 넘어 솟아 있는 거대한 불상이다.

높이 33m의 금칠이 된 이 청동미륵불상은 1989년 초파일에 점안(點眼)되었고,

그때 내려온 한줄기 햇살의 놀라움은 불심이 깊은 어르신의 집안마다 사진으로 남겨져 있다.

많은 불자들의 경탄을 불러온 이 불상이 모든 이들이 반기지는 않을 듯하지만,

그래도 그 옆 팔상전과 함께 기묘한 부조화의 풍경이 주는 묘한 안정감이 있는 듯하다.


법주사 팔상전

<법주사 팔상전>


불상과 거의 같은 줄에서, 사찰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팔상전은 국보 제55호로,

임진왜란 때 완전히 소실된 것을 1605년에 재건하고 1626년에 중수한 건물이다.

또한 이 건물은 각 층마다 구조가 다르고, 재목의 사용이나 건축법식면에서도 무질서해 그 평가가 무척 박한 문화재이기도 하다.

요즘은 다양하고 이질적인 요소들을 조화롭게 통일시킨 건축미를 보여주는 것으로 재평가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국내에 현존하는 유일한 5층 목탑으로, 작은 문, 위태로운 계단 등 독특한 모양이 주는 매력 또한 적지 않다.


법주사 마애여래의상

<법주사 마애여래의상>


사찰의 다양한 문화재가 명성에 비해 그리 넓지 않은 경내에 빼곡하다.

그것들을 하나씩 살펴보고 나오는 길 오른편에 커다란 바위를 만나게 된다.

거기에는 보물 제216호인 마애여래의상이 새겨져 있다. 높이 500cm. 광배는 생략되었으며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설법인(說法印)을 결하고 있고 연화좌 위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내려딛고 있는 의상(倚像)이다.

아름답다기 보다 독특하고, 경건하기보다 따스한 모습에서 이곳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미륵이 도래하는 새 세상의 꿈은 전쟁과 혼란의 시대 모든 이들의 바람이었을 것이다.

산위에 성을 쌓고, 산 아래에는 미륵을 새기는 인간의 간절함은 천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여전히 이 땅의 중원에 오롯이 남아 있는 것이다




글 이철호 작가



전)월간 러너스코리아 기자

전)격월간 연콘텐츠 기자

전)수원청소년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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