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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인천, 다채로운 삶의 변화를 담은 공간의 아름다움 스크랩

문화유산채널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with 이철호 작가



-인천, 다채로운 삶의 변화를 담은 공간의 아름다움-

자연을 품은 공간과 문화유산의 지혜를 찾는 여행



선녀바위 해수욕장

<선녀바위 해수욕장>


인천은 섬이 있고 세상으로 향한 바닷길과 한양으로 가는 빠른 길이 있던 곳이다.

자연히 바깥에서 들어오고, 안에서 나가는 삶과 풍경이 만들어지기 좋은 곳인데,

특히 근대 이후 인천으로 몰아친 다양한 문화의 파도는 도시 곳곳에 독특한 공간을 시대의 흔적처럼 남겨놓았다.

그 공간들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당시 그들이 꿈꾸던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기억의 창고이자 전시장이 되고 있다.

그 공간들과의 다채로운 대화를 꿈꾸며 바다의 선을 따라 인천을 여행해본다.



용유도,

사람 사는 곳, 남북동 조병수 가옥


 조병수 가옥 전경

<조병수 가옥 전경>


코로나19 이후 비행기를 타는 일은 드물고 힘든 일이 되었지만그래도 인천대교를 넘어가는 길은 여전히 색다른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아마 섬이라는 고립된 공간만이 전해줄 수 있는 느낌이 아닐까 싶다.

그 안에는 떠남의 기대가 있고, 단절되는 것에 대한 설렘과 두려움과 같은 것들이 들어있을 것이다.


사실 다리가 곳곳에 놓여지고, 증기선이 활발하게 오가기 전까지 섬이라는 곳은

근방의 토박이이나 특별하고 절박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찾아가거나 정착하기에 쉽지 않은 곳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일도 그렇고,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 환경도 어찌 변할지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러다보니 약 120여 년 전 인천을 거쳐 외세의 문화가 밀려 들고,

일제가 이 땅에 본격적으로 간섭을 시작하던 때에 서울을 벗어나 이곳 용유도로 건너와 집을 짓고 머물기 시작한 사람이 있었다.


대문 안에서 본 바깥 풍경

<대문 안에서 본 바깥 풍경>


사람은 모두 서울로 보내려고 안달을 하던 때에 섬을 들어온 것이 놀랍고,

그 먼 섬의 산자락이 잘 닦인 도로로 도시와 연결되고유명한 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세월이 또 놀랍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렇게 지은 집이 여전히 튼튼하게 제 자리를 지키며 사람이 머물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그곳이 바로 남북동 조병수 가옥이다.


120년은 집이 아니라 도시가 바뀌고 나라가 사라질만한 세월이다.

왕실의 대단한 공사로 만든 것도 아닌 평범한 중류층의 집이 그 세월을 버텨온 것은 그곳이 섬이었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을 터이고,

그곳에 꾸준히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아마 두 번째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선녀바위와 해수욕장

<선녀바위와 해수욕장>


일단 그 집을 둘러싼 환경은 세월만큼 달라졌다.

섬은 다리로 연결되고공항이 생겼고섬의 곳곳은 해수욕장과 음식점 그리고 펜션으로 채워지고 잘 닦은 도로로 이어졌다.

그렇지만 다행인지 아쉬운 일인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조병수 가옥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다.

큰 도로를 벗어나 마을의 작은 길로 들어서고도 한참을 구불거리는 시골길을 따라가야 조병수 가옥을 만난다.


안내하던 길은 집을 들리지 않고 다시 작은 고개를 넘어가는데, 재미있는 것은 마치 산속 같은 곳이 고개 하나로 전혀 다른 곳으로 변해버린다는 점이다.

고갯마루에는 새로 만들기 시작한 펜션도 보이고, 언덕 아래 오래된 염전 사이를 지나 조금만 달리면 영종도가 자랑하는 을왕리 해수욕장과 선녀바위가 나타난다.

이 짧은 거리에 숨겨진 시간의 거리와 풍경의 차이가 아마도 여전히 가옥을 지켜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가옥 대문

<가옥 대문>


이제 집을 들어가 보자. 겉모습의 첫인상은 단정하다.

그렇지만 열린 대문, 그 안의 낡음과 어수선함은 이전 한옥을 방문할 때와 사뭇 다르다.

잠시 안을 둘러보는 사이 대청마루의 문과 부엌문이 열리며 그제야 주인과 안주인 어르신이 갑작스런 방문객이 누구냐며 수더분하게 물어보신다.

문화재라는 이야기를 듣고 한번 보러 왔다는 말에 미소 지으며 살고 있는 집이라 지저분하다고 말씀하시며 하시던 일을 계속 하신다.

그 무심한 듯 친절은 기둥과 마루 위에 내려앉은 낡음이 손때임을, 정신없음이 부지런한 생활의 모습임을 깨닫게 해주는 듯하다.


가옥 앞 비석과 사랑방

<가옥 앞 비석과 사랑방>


그리고 그 사이로 단단한 기둥과 날렵한 처마, 그리고 포장하지 않은 단정함이 슬며시 보이기 시작한다.

아마 집이 남아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그곳에 사람이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대부분의 오래된 한옥은 개량되거나, 공공기관에 의해 새롭게 단장해 사람들을 위한 전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렇지만 집중의 최고의 집은 잘 꾸며진 모델하우스와 같은 곳이 아니라 손때 묻고 엉성하지만 사는 이들의 필요에 따라 계속 만지고,

옮기는 집임을 여기에서 느끼게 된다.


대문옆 담과 창문

<대문옆 담과 창고>


원래 이 집은 집주인인 조병수씨의 고조할아버지가 서울 마포에서 옮겨와 오성산의 아래에 터를 잡고 1890년에 건립한 집이었다고 한다.

집의 모양새는 당시 중부지방 중류층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대문채는 출입문인 대문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사랑방을, 서쪽에는 방 1칸과 창고를 두었으며 방 앞에 툇마루를 두었다.


건너방과 사랑채

<건너방과 사랑채>


대문을 들어서면 적당한 넓이의 마당과 함께 한쪽이 뚫린 자 모양의 안채가 보인다.

안채는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과 건넛방을 두었고, 안방 옆에는 부엌이 연결되어 있다.

이 평범하고 익숙한 가옥은 항상 사람과 함께 했었다.

조 씨의 당숙뻘 되는 조명원은 서울에서 19193.1 독립선언식에 참여한 뒤,

용유도로 돌아와 이 집의 사랑채에서 조종서, 문무현, 최봉학 등과 함께 비밀 항일투쟁단체인 혈성단을 조직했다.

이들이 용유도 주민 150여 명이 참여한 3.28 만세시위운동의 주축이었다.

작은 가옥에 역사의 급박한 시간을 쫓아가던 사람들의 기억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대문 옆 사랑방

<대문 옆 사랑방>


그 기억과 오래된 집의 소박한 풍경을 찾아 지금도 꾸준히 사람들이 찾아 한옥체험을 즐긴다고 한다.

누구 말처럼 주인장이 머무는 옛집은 주인만의 고옥이 아니라고 하지 않던가.

단지 바닷바람만을 맞으려 섬과 해안가를 찾을 게 아니라 잠시 길을 돌려 오래된 가옥의 고즈넉함과 조용한 단단함을 만나보는 것도 좋으리라.

 


인천 중구,

중구청 청사 주변에 남은 개항장의 풍경

 

경축 2021 대한민국 뉴리더 대상, 역사와 전통의 제물포고등학교는 인천 중구에 반드시 존치해야 한다, 2021 코로나 위기관리 대상 시민안전성 제고 분야 최우수 기관 선정, 개항문화 미래도시 사람사는 복지중구_인천 중구청 청사

<인천 중구청 청사>


인천항은 구한말 이후 외세가 이 땅으로 들어오던 통로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의 중구청 주변은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지어놓은 집과 건물로 당시의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개항장 거리가 되어 있다.

 

한일합방 후 조선총독부는 인천의 행정구역을 인천부라고 부르면서, 1933년 일본영사관 자리에 2층짜리 철골콘크리트의 인천부 청사를 올렸다.

이 건물은 스팀난방 등 당시로서는 최첨단 시설을 자랑하는 빌딩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평지붕과 장식 없는 건축이라는 혁명적인 디자인을 시도했는데,

주변의 일본은행 인천지점 등과 같은 동시대 건물들의 지붕과 지금도 확연히 비교가 된다.


등록문화재 제248호 구 인천부청사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REGISTERED CUITURAL HERITAGE OF KOREA) 문화재청_청사입구 근대문화유산 표지판

<청사입구 근대문화유산 표지판>


물론 지금의 중구청 청사는 1960년대 증축을 통해 한 층이 더 올라간 모습이지만 기존 외형을 잘 보전하였다고 한다.

이런 자연스러운 증축 때문인지 이곳을 찾는 이들이나 근무하는 이들도 이 건물이 문화유산인지 모르고 지나칠 때가 많다고 한다.

다행히 점심을 위해 건물을 나선 친절한 중년의 공무원 덕분에 중구청의 옛 모습과 문화유산 표지판을 발견한 후 점차 뒤로 물러서며

그 건물을 둘러보고 상상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개항문화 미래도시 사람사는 복지중구_중구청 청사 입구

<중구청 청사 입구>


가끔 치욕과 고통으로 점철된 일제강점기가 남긴 건물이 과연 기념할만한 것인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실패했더라도 그것 역시 역사이고, 그걸 기억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잘못과 제대로 된 방향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본다면 중구청 청사는 아름다움과 함께 권위를 강요하던 당시의 풍경을 그려볼 수 있는 일기장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일기는 시대를 기억하게 해주고, 좀 더 좋은 미래를 만들어주는 안내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문화유산을 보전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겠다.


인천계양장 근대건축전시관_근대건축전시관 입구

<근대건축전시관 입구>


중구청의 예전 모습을 좀 더 생생하게 보고 싶다면 청사 아래 첫 번째 골목에 있는 근대건축전시관을 찾아보자.

이 건물 역시 1890년 나가사키에 본점을 둔 제18은행이 세운 인천지점이었다.

옛 건물의 골조를 그대로 이용한 전시장 내에는 당시 인천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개항기의 건물 모형들이 유리상자 안에 빼곡히 채우고 있다.


근대건축전시관 내 중구청 모형

<근대건축전시관 내 중구청 모형>


건물의 단단함은 당시 은행의 도도함인 듯해서 아름답고도 답답하지만,

유리 안에 정교하게 재현된 모형들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아름답고도 섬세하다.

그런 유리상자와 모형으로 둘러싸인 전시장의 중앙에는 거대한 인천부의 지도가 스크린의 주요 건축물과 함께 불을 밝히고 있었다.

파노라마처럼 보여지는 사진과 불 밝혀진 지도 위의 구역은 잠깐이나마 당시의 풍경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예술 창작 공간 p. 인천아트플랫폼 INCHEON ART PLATFORM_인천 아트플랫폼

<인천 아트플랫폼>


모형에 있는 당시 건물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그래도 외관과 형태는 거리에서 다양하게 맛볼 수 있다.

중구청 아래 근대건축전시관 주변은 당시의 은행건물이나 회사건물을 비롯해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색과 모양을 가진 건축물이 풍성하게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천역으로 가는 길목에는 20099일본우선주식회사' 사옥을 비롯해

1930~1940년대 개항장에 들어선 물류창고와 인쇄소, 점포 건물 등을 외형을 살린 채 예술촌으로 재단장한 인천아트플랫폼이 자리하고 있다.


인천 아트플랫폼

<인천 아트플랫폼>


이전 건물을 그대로 유지한 채 그 안에 창작과 나눔을 채운 발상이 반갑다.

빨간 벽돌 건물 사이로 초록 잔디의 길을 따라 걸어보면 광장을 사이에 두고 작가들의 작업실과 공방, 교육관, 전시관, 공연장 등 13개 동을 만나게 된다.

그 사이로 작가들의 작품과 예전 풍경과 다양한 카페 등이 초록 담쟁이의 앞뒤로 나타났다 사라지고는 한다.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그곳은 역사의 기억, 발상의 전환으로 우리 문화와 여가를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곳이 되어 있었다.



 강화,

성공회가 조선을 만나는 방식, 강화성당과 온수리성당

 

세상이 거친 변화를 시작할 때, 그곳을 떠나버리는 이들도 있고, 강제로 터를 잡고 살다가 다시 제 나라로 돌아간 이들도 있다.

그리고 어떻게든 함께 어울려 살아보겠다고 우리의 것과 함께 자신들의 터를 만든 이들도 있다.

특히 종교인들이 이런 어우러짐에 적극적이었는데, 그 모습을 보기 위해 강화로 가본다.

한옥의 품에 종교를 담은 성당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온수리 성당

<온수리 성당>


먼저 참성단이 있는 마니산과 전등사를 오가는 도로 옆에는 성공회 온수리 성당이 있다.

온수리 마을의 좁은 골목길과 연결된 다리를 지나면 낡고 그래서 더욱 눈에 띄는 독특한 한옥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강화 온수리성공회성당(이하 온수리성당)이다.


옛 성당 옆 새로 지은 성당

<옛 성당 옆 새로 지은 성당>


19세기 말 우리나라에 들어온 성공회는 1898년 강화 온수리에 있는 집 한 채를 구입하였다.

그 집을 진료소로 운영하며 봉사하고 어우러진 성공회에 마음이 움직인 주민과 신자들은 땅을 내고,

직접 산에 올라가 소나무를 베어다가 영국에서 온 주교 조마가(Mark N. Trollope)와 함께 스물일곱 칸 성당을 지었다.

그때가 1906, 일제가 우리나라를 차지하기 갖은 술수와 패악을 저지르기 시작할 때였다.


성안드레성당_성 안드레 성당 입구

<성 안드레 성당 입구>


주민이 직접 만든 성당의 모습은 소박하기 그지없지만 다른 한편으로 어디서 본 듯 익숙하고도 정겹다.

그 낡은 성당 옆 잔디밭에는 스프링클러가 신나고 돌고 있고, 그 너머로 2004년 지어진 현대의 성당 건물이 보인다.

전혀 다른 두 세상이 한눈에 보이는 듯하다.

낡고 단정한 성당의 입구 위에는 성 안드레아 성당이라는 역시 거칠고, 오래된 간판이 하나 걸려 있다.

성당 주보성인이 성 안드레아여서 그렇게 불린다고 한다.


신발을 벗고 건물에 들어서자 흰 창호지가 발라진 또 하나의 문이 있고, 그 문과 문 사이는 전실이 되었다.

안쪽 문 위로는 성당을 거쳐 간 사제들의 사진들이 사각액자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흑백사진과 흰 창호지의 나무문 그리고 양옆의 유리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전실의 분위기를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듯하다.


성당 내부

<성당 내부>


안쪽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옛 난로 앞으로 긴 복도가 줄 지은 나무걸상들과 함께 이어지고 있고그 끝에 제단이 경건하게 자리하고 있다.

중간에 길게 늘어선 기둥이 시선을 제단으로 이끌어주는데모두 12개의 그 기둥은 예수의 12사도를 상징한다고 한다.

기둥이 내려온 천정은 통으로 열려 있으며한옥의 대청처럼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 있어 보기 보다 크고 시원하게 느껴진다.

높고, 시원하며, 수수하면서 단정하니 한옥의 장점을 종교의 따뜻함과 경건함으로 받아들인 성공적인 건축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성공회_성당 입구이자 종탑

<성당 입구이자 종탑>


밖으로 나오면 높이 솟은 문간채이자 종탑을 만나게 된다.

원래 종탑은 성당 안에 세우지만온수리성당은 문간채를 만들면서 가운데 칸을 높여 종탑을 대신했다.

그곳을 나서면 아래로 역시 한옥으로 멋진 처마를 자랑하는 사제관이 만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이 20031027일 인천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52호가 되었는데,

사제관은 그보다 앞서 200224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된 것이다. 사제관이 앞서고 성당이 뒤따른 셈이다.


성공회 강화성당

<성공회 강화성당>


이제 온수리를 벗어나 강화읍내로 가보자.

고려궁지가 있던 그곳의 언덕 위에는 또 한 채의 한옥이 자리하고 있다. 성공회 강화성당이다.

주변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고, 둘레길이 지나는 곳이라 각종 표지판이 친절하게 안내를 한다.

공원에서는 성당의 옆 자태가 한눈에 들어온다.

성당 옆에는 철종(哲宗, 1831~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살았던 용흥궁(龍興宮)이 있는데, 성당과 함께 그럴듯한 산책길을 만들어준다.

그 산책길의 왼쪽으로 가파른 돌계단이 있고 그 위에 강화성당의 입구인 외삼문이 보인다.

언덕 위에 만들어진 계단이라 대문 위의 날렵한 처마는 그대로 하늘을 배경으로 높고도 높아 보인다.


협문과 성당 옆면

<협문과 성당 옆면>


이곳 강화성당은 1900년에 성공회 영국 교회의 지원 하에 외국인 사제가 주도하여 지어졌다고 한다.

때문에 궁궐 목수까지 동원되었고, 백두산 원시림에서 적송을 뗏목으로 엮어 운반해와 지었다고 한다.

그런 만큼 높고 멋있지만 온수리와 같은 소박함과 정겨움은 부족해 보이는 듯하다.

 

이제 성당을 들어서보자. 한국 전통 건축양식의 외삼문 대문 중앙에 태극문양을 배경으로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문을 지나면 내삼문이 나타나오는데, 종루(鐘樓)를 겸하고 있는 게 독특해 보인다.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니 종루가 또 하나의 문을 만들고,

그 사이를 지나면 2층 처마 밑에는 '天主聖殿(천주성전)'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예배당이자 성당을 만난다.


강화성당 예배당 입구

<강화성당 예배당 입구>


이곳은 고려 때는 궁궐 터였고 1894년 한국 최초의 해군사관학교인 통제영 학당 군사교관 콜웰(W. H. Callwell) 대위의 관사가 있었던 땅이다.

특히 건물 측면과 뒷면의 아치형 출입문 4개가 인상적으로 다가오는데, 모두 영국에서 가지고 들어온 것이라 한다.

성당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 기둥에는 나란히 주련(柱聯, 긴 널빤지에 써서 기둥에 걸어 둔 글귀)을 달아놓았는데,

이 역시 우리 주변의 사찰 등에서 봤던 익숙한 풍경이다.


성당을 한 바퀴 돌아본다.

강화성당은 단청과 한자와 기와처마까지 여타 한옥이나 향교와 같게 느껴지지만 기와 아래 2층 유리창이 색다름을 전해준다.

이 유리창은 성당의 겉모습을 사찰과 구분해 주며, 성당 내부를 마치 유럽의 성당처럼 만들어준다.

조심스럽게 한국 문화와 타협하면서도 자신들의 장점과 신앙을 지키려고 했던 당시 그들의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결국 문화란 높은 곳에서 누르는 게 아니라 낮은 곳에서 교감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전해주는 공간이자 문화유산이 바로 이곳 강화의 성당들인 듯싶다




글 이철호 작가



전)월간 러너스코리아 기자

전)격월간 연콘텐츠 기자

전)수원청소년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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