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뛰기링크

문화유산여행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관동의 산과 바다에서 역사를 만나다 스크랩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with 이철호 작가



관동의 산과 바다에서 역사를 만나다

 

-관동옛길과 오죽헌-

-선교장 그리고 경포대-

-양양 낙산사-

 

 

마치 브레이크 없는 차를 타듯, 그렇게 우리의 근대는 바쁘고 숨 막히게 진행되었다.

가장 먼저 새로운 길과 새로운 집이 세워지고, 예전의 양식과 전통은 빠르게 현대식으로 치장되었다.

그렇게 우리의 옛길은 잊혔고, 그 안타까운 현실은 묘하게 옛길을 그대로 보전시켜 주었다.

다시 우리가 과거와 전통의 아름다움을 찾기 시작할 때 옛길은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옛길에는 자연과 문화가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고, 길의 옆 건물과 자취들에서는 옛 인물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아름답고 풍성한 이야기를 찾아 관동의 옛길과 동해를 찾아가본다.

 


상안리에서 오죽헌으로


 상안리 명품숲

<상안리 명품숲>


이미 유명세를 떨치는 옛길도 많고, 은근한 아름다움으로 아는 이들만 찾는 옛길 또한 적지 않다.

찐빵으로 유명한 강원도 횡성 안흥면의 상안리 명품 숲은 아마 그 중간정도에 자리한 곳이 아닐까 싶다.

대한민국의 1호 명품 숲으로 선정되었지만, 아직은 붐비지 않고 아는 이들이 즐기는 산이자 산책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느 명승에 비해 더욱 신선하고, 화려한 나무와 자연은 찾는 이들이 잊지 못하게 만드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입구의 자작나무의 흰색 울타리 너머로 노란 단풍나무의 풍부함과

따가운 햇살을 촘촘하게 받아주는 소나무의 군락들은 그 어떤 곳보다 풍부한 감성을 느끼게 해준다.

그곳 입구에서 관리원으로 일하시는 넉넉하고 인상 좋으신 어르신과 한동안 잡담 아닌 잡담을 나누게 되었다.

당연히 길에 대한 자랑이 이어졌는데, 그 첫 머리로 올라온 게 이 길이 신사임당이 아들과 함께 오죽헌으로 가던 관동옛길이라는 것이었다.

아직 대관령은 멀고 그 너머 강릉의 오죽헌은 아득하기만 했지만, 옛 사람들은 이 길을 따라 한양과 강릉을 오갔던 것이다.

그 굽이굽이의 여정을 듣자 관동의 바닷가에서 자연과 세상을 굽어보는 이들의 자취가 문득 그리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관동으로 발길이 이어졌다.


軒竹烏 강릉 오죽헌 

<강릉 오죽헌>


예전 대관령은 쉽지 않은 길이었다.

좁은 도로, 한없는 높이 그리고 쉼 없이 이어지는 굴곡까지, 자동차로도 초보들은 두려움을 간직하며 넘어가던 길이었다.

그렇지만 그 길에서 설악산과 동해 바다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한계령에서 속 깊은 곳까지 시원해지는 쉼을 하기도 했고,

구비를 한번 돌 때마다 눈을 가득 채우는 절경에 차를 멈추기도 했던 추억이 있는 길이기도 하다.

이제 삼척의 작은 마을이나 대관령 주변의 옛 명소를 찾을 때만 이 길은 이용되고, 대부분 낮은 산을 넘어가는 고속도로로 강릉까지 한달음에 달려간다.

그나마 겹쳐진 산들 너머로 거대하게 날개를 돌리는 하얀 풍력발전기와 중앙분리대를 장식하는 귀여운 양들의 캐릭터들이 이곳이 대관령임을 알게 해준다.

그렇게 새로 뚫린 길을 따라 강릉으로 들어선 후 경포대가 안내하는 표지판과 도로를 한참 따라가면

오른편으로 오죽헌 한옥마을이라는 커다란 대문이 언 듯 보인다.

길이 계속 새로 생기는지 표지판과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길이 조금 다르다.

변화의 물결이 급박하게 이곳을 채워가는 듯한데, 오죽헌 앞의 주차장에서 그 변화의 정도를 실감하게 된다.

 

오죽헌은 예전에 경포대로 가는 길에 신사임당의 자취를 만나보려 한번 들린 적이 있었다.

작은 도로 옆은 농한기의 밭들로 가득했고, 한옥은 그 위를 지나는 바람을 맞으며 한가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소박하고, 쓸쓸했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르던 그곳이 이제는 화려하고, 거대한 관광지의 입구가 되어 있었다.

요즘 커피의 도시로 이름이 높은 강릉이기에 주차장 주변은 다양한 커피 간판을 내건 카페도 가득하다.

높고, 넓고, 단단한 입구를 지나니 길보다 넓은 길과 광장이 율곡 이이의 동상 주변으로 펼쳐진다.

광장의 한가운데 서니 주변이 온통 유적지와 기념관으로 가득했다.

오른쪽 위로는 오죽헌과 복원된 사랑채와 안채가 계단 위에 높게 자리하고 있다.


율곡이이_강릉 오죽헌 이이 동상 

<강릉 오죽헌 이이 동상>


오죽헌은 대부분이 알고 있듯이 신사임당(15041551)과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집이다.

조선 전기의 결혼제도는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으로 남자가 결혼을 하면 부인의 집이나

그 근처에 살고 처가의 재산을 물려받는 풍습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원래 단종 시대에 병조참판과 대사헌을 역임했던 최응현의 고택이었던 이곳은

그의 사위이자 신사임당의 외조부였던 이사온(李思溫)에게 물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사온과 같이 살던 사위 신명화(申命和)의 다섯 딸 중 둘째인 신사임당은 덕수 이씨 집안의 이원수와 결혼을 하였고,

율곡(栗谷)이이(李珥, 15361584)가 태어난 몽룡실(夢龍室)이 있는 오죽헌은 고택의 별당 건물이었다.

검은 대나무가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서 오죽헌(烏竹軒)’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곳이기도 하다.

사임당 신씨는 뛰어난 여류 예술가였고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다.

신씨의 아들 율곡 이이는 조선 시대에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훌륭한 학자이자 정치인으로 이름이 높았다.

게다가 이 오죽헌은 우리나라 주택 중에서 가장 오래된 곳 중 하나이니 찾는 이가 많고, 기리고자 하는 마음이 클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앞과 왼쪽으로는 율곡기념관이 있고, 그 사이로 내려가면 다시 넓은 한옥으로 세워진 시립박물관이 신사임당 동상 앞에 자리하고 있다.


강릉 오죽헌 안채와 사랑채 

<강릉 오죽헌 안채와 사랑채>


오죽헌을 보기 위해 계단을 올라선다.

문을 들어서니 정면에 사임당 신씨와 율곡 이이를 기리는 문성사가 있고,

우측으로 이이의 어린 시절부터 있었다는 배롱나무가, 좌측으로는 오죽헌이 자리하고 있다.

그 옆으로 이름의 기원이 되는 오죽들이 작지만 빼곡하게 심어져 있다.

그 사이로 다시 작은 대문이 나오고, 그 안으로 복원된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는 호해정사(湖海精舍)’라 이름 하였는데, 기둥의 주련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썼다고 한다.

사랑채 뒤로는 안채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곳을 지나면 자리를 옮겨 세워진 어제각이 있다.

 

사실 오죽헌의 주변은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오죽헌과 동상 앞으로는 단체 관광객과 가족 여행객들이 계속 이어지고,

그들을 이끄는 문화해설사들의 마이크 소리가 그 뒤를 따라간다.

예전의 모습이 너무 대접이 초라한 게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라면,

이런 모습은 대접이 너무 과한 게 아닌가 하는 작은 불안감으로 이어진다.

어쩌면 문화유산은 그대로가 좋다는 예민함 때문이 아닌가 하지만,

공간을 그대로 보면 사색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부족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오죽헌과 안채의 정취가 화사하고, 세련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아닐까 싶다.

비록 복원 과정에서의 실수로 안채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했지만,

시원한 바람과 따뜻한 햇살을 받아들이는 한옥의 단정함은 여전히 느낄 수 있는 듯하다.

 


선교장과 경포대 그리고 연말의 기억

 

경포대와 경포호

<경포대와 경포호>


11일 일출을 보기 위해 경포대를 찾은 적이 있었다.

예전 연말연시의 유명 바닷가와 도시는 바가지가 극심한 편이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나마 온갖 앱과 상품으로 예전보다 현명한 관광은 어느 정도 가능해진 점도 있다.)

그런데 강릉시에 언제나 정가제를 고수하는 크고, 단정한 호텔이 있어 편안하게 1231일 강릉의 분주함을 보고 새벽에 경포대를 넘어갈 수 있었다.

아직 해는 떠오르기 전 새벽, 경포해수욕장과 이어지는 경포호에는 일찍 불을 밝힌 상가들의 불빛들이 화사하게 반사되고 있었다.

그 모습을 구경하다 해변으로 나갔더니 일군의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새해 해맞이와 건강을 과시하려는 동호회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붉게 물들기 시작한 모래사장을 달리다가 벌건 해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자 격정을 참지 못하고 바다로 뛰어 들어가기도 했다.

사람들의 환호와 흥겨운 박수소리와 함께 새해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렇듯 그때에도 그 이후에도 해수욕장은 항상 분주하고, 화려하고, 소란스러웠다.

원래 번잡한 것을 싫어하는 터라 다시 찾지 않을 듯하지만, 다시금 이곳을 찾는 이유는 아마 입구에 자리한 선교장이 심어준 단정한 기억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선교장 입구 

<선교장 입구>


이제 강릉을 대표하는 관광지인 선교장은 강원도 지역에서 가장 잘 남아 있는 사대부 가옥이다.

선교장은 조선 영조 때(1703)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내번이 족제비 떼를 쫓다가 우연히 발견한 명당에 집을 지은 후,

그 후손이 지금도 살고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상류층의 가옥과 문화를 잘 보여주는 곳으로 유명하며,

경포호가 지금보다 넓었을 때, “배타고 건넌다고 하여 이 동네를 배다리 마을(船橋里)이라, 가옥을 선교장이란 불렀다고 한다.

처음 선교장을 찾았을 때 인상 깊게 다가왔던 것은 단정한 선교장의 건물과 함께 그 안에서 작업에 한참이던 방짜 장인들의 모습이었다.

작은 한옥의 나무 벽 안에서 벌건 화로의 불이 피어오르고,

그 앞에서 재를 털어내며 각종 방짜를 만들던 아버지와 아들 장인은

자신의 일에 대한 진지함과 전통 그리고 방짜에 관한 신기한 지식들은 은근히 넘겨주었다.

그 잠시의 시간이 선교장에서의 추억을 남다르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선교장 열화당

<선교장 열화당>


그 뒤에 한두 차례 더 찾았지만 어느 순간 방짜공방은 사라졌다.

그리고 오죽헌에서 만난 관동의 놀랍고 현대적인 변화에 약간의 두려움마저 가진 채 선교장을 찾았다.

그렇지만 낮은 나무담장 너머로 여전한 고즈넉한 분위기와 세련된 아름다움으로 반기는 활래정을 보며 마음을 다독일 수 있었다.

먼저 생활용품을 모아 놓은 선교장박물관(문물관)을 둘러보았다.

예전에 미처 못 보던 곳이기에 그저 한번 둘러본다고 들어갔고, 전시장은 몇 걸음이면 다 돌 정도로 작은 곳이었다.

하지만 한동안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선교장 활래정

<선교장 활래정>


선교장의 오래된 시간을 함께했던 각종 생활용품과 문화유산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우리의 생활이 이렇게 아름다웠다!’ 라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각종 집기와 역사의 시간과 함께했던 선교장의 풍경을 알리는 글씨와 소품이 거기에 있었다.

그곳을 나오자 선교장의 상징과 같은 정자, 활래정과 연못이 나온다.

1816년 만든 정자로 맑은 물이 끊임없이 나온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정자 너머로 선교장이 보이고, 그 사이를 지나면 연못과 그 너머의 풍경이 잘 짜인 그림처럼 문과 난간 너머로 들어온다.

잘 다듬어진 주변을 둘러본 후 선교장으로 들어선다.

작은 대문이 이어지는 왼편으로 들어서면 안채주옥과 동별당이 반기고,

길게 이어진 행랑채를 따라가면 서별당과 열화당, 중사랑, 연지당이 이어진다.

이중 서별당과 연지당은 명품고택으로 한옥체험이 가능하고열화당에서는 각종 문화행사가 열리고 있다.

사람이 살고 오고가고 있어서인지 잘 정돈된 한옥의 이미지와 함께 온기와 활력이 함께 느껴지는 게 더욱 반갑다.

그 반가운 마음을 담고 경포호를 찾는다.

그곳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역시 선인의 지혜와 풍류가 담긴 경포대라고 할 수 있다.


 경포대의 다양한 명판과 글귀

<경포대의 다양한 명판과 글귀>


선교장에서 경포해수욕장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작은 언덕 위에 경포대가 있다.

1326(충숙왕 13) 강원도 존무사(存撫使) 박숙정(朴淑貞)이 신라 사선(四仙)이 놀았다던 방해정 뒷산 인월사(印月寺) 터에 창건한 정자인데,

1508(중종 3) 강릉부사 한급(韓汲)이 지금의 자리에 옮겨지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1626(인조 4) 강릉부사 이명준(李命俊)에 의하여 크게 중수되었고,

인조 때 우의정이었던 장유(張維)가 지은 중수기(重修記)에는 태조와 세조도 친히 이 경포대에 올라 사면의 경치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쓰여져 있다고 한다.

산책로와 함께 이어지는 길을 조금 오르면 제법 넓은 정자가 경포호를 굽어보고 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갈대와 함께 경포호의 푸른 호반이 한눈에 들어오고그 너머 높은 호텔과 상가 건물 틈새로 동해의 조각이 보인다.

내부에는 율곡(栗谷) 선생이 10세 때 지었다는 경포대부 鏡浦臺賦를 판각한 것과

숙종(肅宗)어제시 御製詩를 비롯하여 여러 명사들의 기문과 시판(詩板)이 걸려 있다.

비록 글을 하나하나 읽기는 어렵지만, 이곳을 거쳐 간 옛 사람들의 풍류와 흥취는 한껏 느껴볼 수 있을 듯하다.

 

 

낙산사의 기원과 풍경

 

낙산사 의상대

<낙산사 의상대>


바다를 좀 더 제대로 보기 위해 다시 위로 한참을 올라가본다.

그곳에는 양양의 푸른 바다와 어우러지는 낙산사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 불교의 3대 관음도량으로 손꼽히는 낙산사는 671년 의상대사에 의해 지어진 절이다.

이곳에서 의상대사가 기도를 드리다가 관세음보살을 직접 만났다고 하여

관음도량(관세음보살을 모신 절중에서도 소원을 비는 기도처)이라 불리는 곳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을 거쳐 왔지만, 입구의 바위와 오래된 콘도도 여전하고,

그 사이의 길과 그곳에서 보는 해변의 바위와 거세고 푸른 바다도 여전한 듯하다.

오랜만에 찾는 낙산사지만, 이전과는 확실히 다를 듯 하다는 기대와 불안이 있었다.

불과 몇 년 전에 큰 화재로 오래된 전각과 귀중한 유물, 유적이 많이 훼손됐다는 이야기를 뉴스와 풍문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낙산사의 깔끔하고, 수려한 풍경은 여전했다.

입구 첫 머리의 의상기념관과 카페로도 활용되는 다래헌을 지나 오른편으로 가면 바다와 홍련암이 한눈에 들어오는 의상대가 있다.

홍련암으로 가는 길은 바다와 바로 이웃해서 시원한 파도소리가 함께하고 있었고,

그 사이의 위태로운 길을 넘어가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홍련암이 신비로운 분위기로 반갑게 맞아준다.


 의상기념관 옆 비석과 상징

<의상기념관 옆 비석과 상징>


길을 되집어 사찰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관음지와 그 앞에 당당하게 솟아 있는 보타락이 보인다.

한참 연못과 조각상을 구경하고 보타락을 지나가니 지장전과 보타전의 화려한 건물이 들어온다.

그와 함께 전각 앞 마당을 꾸미고 있는 장식물도 인상적이다.

사실 바다와 함께 있다고 할 정도로 물과 가까운 낙산사지만 유독 화마의 피해를 많이 입었던 사찰이기도 하다.

외세의 침략, 한국전쟁과 대형 산불 등 한 번씩 크게 피해를 입었던 기록이 생생한 곳이다.

하지만 천년 화마를 이겨내면서도 늘 다시 복원, 재건되고 있는 낙산사이다보니,

그 안에는 불의 기운을 누를 수 있는 여러 상징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입구 의상기념관 옆 비석 위에는 용의 첫째 아들로 알려진 거북이 봄에 용머리를 한 비희가 있다.

사찰의 처마에는 이수, 공하라고도 불리는 용의 여섯째아들 공복이 있는데,

천성이 물을 좋아해 물길인 무지개 다리기둥이나 배수구 등에 세워졌다고 한다.

또한 전각 앞 석등에는 산예라고도 부르며 용의 여덟째아들이 있다.

사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불을 좋아하는 성격이 있어 불과 관련된 석등이나 화로 등에 장식된다고 한다.

이런 불을 누르는 상징을 찾아보는 것도 낙산사를 즐기는 하나의 방법이자, 간절한 기원으로 이루어낸 사찰의 역사를 만나는 지혜이기도 하다.


 해수관음상과 무용단

<해수관음상과 무용단>


이제 길은 언덕으로 이어지고, 동해바다를 한눈에 담는 공중사리탑을 지나면 가장 높은 곳에 낙산사의 상징인 해수관음상이 나타난다.

높고 높은 불상에 대한 거부감은 넓은 바다가 주는 시원함 때문인지 전혀 생기지 않는다.

다만 그 높이만큼 절실한 기원과 해답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만이 가득하다.

해수관음상을 지나면 놀랍도록 단정하고 아름다운 산책로가 이어진다.

낙산사는 이곳을 꿈이 이루어지는 길이라는 이름 붙였는데,

낙산사의 전각들을 보면서 걷는 이 산책길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준다.

이어 원통보전과 7층 석탑 그리고 반일루 등이 숨 가쁘게 이어진다.

굵고 자연스러운 기둥과 잔각의 나무 문 사이로 보이는 소나무와 사찰의 풍경은 낙산사를 왜 많이 이들이 계속 찾게 되는지를 알려주는 듯하다.


 원통보전

<원통보전>


옛 선인들이 걸었던 자취를 따라 동해에 다다르고, 그 걸음은 동해와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정자와 사찰로까지 이어졌다.

관동은 여전히 아름답고, 자연을 존중하는 인간들의 기원은 또 다른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이 풍경을 좀 더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과하지 않게,

또 무심하지 않게 우리의 시간과 추억을 담을 수 있는 문화적인 지혜가 필요한 때가 아닐까 문득 생각을 해본다.




글 이철호 작가



전)월간 러너스코리아 기자

전)격월간 연콘텐츠 기자

전)수원청소년신문 기자

 


 

댓글등록 비밀댓글

(0 / 300)

전체댓글수: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