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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화려하고, 극진한 신라의 아름다움을 만나다 스크랩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with 이철호 작가



경주

-불국사와 삼층석탑, 다보탑-

-감은사지와 대왕암-

 

 

경주는 신라의 시작과 끝이 함께 공존하는 도시이다.

알영정이 있고, 김유신의 제매정이 여전하며통일신라시대의 불국사까지 시간의 이야기와 풍경이 도시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는 곳이다.

비록 경주라는 도시가 광활하지 않더라도, 그 파노라마와 같은 시대의 결과 문화를 한달음에 담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경주는 역사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간직한 공간을 여유롭게 만날 수 있는 작고 좁은 여정으로

차곡차곡 들러봐야 슬기롭고 만족스러운 여행과 답사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곳이다.

그렇게 하면 오릉과 대릉원에서 서라벌의 시원과 발전을 만나고, 교동과 읍성의 단단함에서 다채로운 시간의 기억을 만날 수 있다.

또 불국사에서 토함산 너머 바다로 이어지는 길에서는 당시를 살았던 신라인의 간절함과 그래서 더욱 화려했던 재능을 만날 수 있다.

이제 기원을 완성하는 문무대왕릉부터 노을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불국사의 익숙한 건축물을 통해 그 여정을 이어보려고 한다.

 

 

묵묵히 다채로운 문무대왕릉과 살며시 화려한 감은사지 석탑

 

대왕암

<대왕암>


예전 경주로의 여행은 터미널과 역으로 들어섰다가 그대로 역 앞 시장이나 터미널 너머의 대릉원,

교통과 같이 시내 중심을 거닐거나, 보문단지와 불국사를 잇는 동선을 반복하는 게 대부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제 KTX가 생기고 외곽에 신경주역이라는 새로운 입구를 만드니

이런 불편함은 오히려 경주의 다양한 풍경을 만날 수 있는 색다른 동선의 가능성을 만들어준다.

그 불편이 주는 가치가 놀랍고도 재미있다.

신경주 역에서 굳이 경주시내로 들어가지 않고 남산과 토함산 사이의 길을 그대로 달려본다.

조금은 낯선 왕들의 이름이 걸려 있는 유적지도 보이고, 하늘을 가득 메운 까마귀 떼와 이용해본 적이 거의 없는 불국사 역도 스쳐간다.

그렇게 길은 바다까지 이어지고, 그 끝에 이제는 이름도 문무대왕면으로 바뀐 마을과 감포읍의 동해를 만나게 된다.

예전에 불국사를 거쳐 동해바다와 대왕암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좁고도 복잡했다.

공장과 가게 그리고 논과 밭 사이를 이리저리 돌며 아직도 경주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달리다보면 멀리 단정한 언덕 위에 살짝 솟아오른 석탑을 만나게 된다.

바로 감은사지에 동과 서에 솟아 있는 삼층석탑이 길이 끝났음을 알려줬던 것이다.

여기를 지나면 바로 다리가 나오고, 이어 대왕암이 지척에 있는 해변에 다다르게 된다.

그 길이 자꾸 생각나는 건 오가는 차들이 많지 않아 보인 그 도로에 적지 않은 음식점들이 있었고,

유달리 자주 보이던 칼국수 집들이 다른 곳에서 쉽게 맛볼 수 없는 맛을 보여줬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은 불국사를 지나 고속도로를 올라타면 한 번에 바닷가에 도착하게 된다.

고가의 고속도로를 내려오면 감은사지가 마당처럼 한눈에 들어오고 바닷가의 수평선도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답답한 기다림이 없어진 건 좋지만, 따뜻한 추억과 구수한 즐거움이 사라지는 듯해서 한편 아쉽기도 하다.

 

대왕암

<대왕암>


사실 답답함, 거리감이라는 건 시대와 처한 상황에 다라 다른 것이기도 하다.

고속도로로 달리나, 구불거리는 옛 도로로 달리나 그 차이라는 게 고작 몇 십 분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는 경주라는 크지 않은 도시에 다음 관광지로 가는 길이 생각보다 멀다는 것이 답답했던 것이고,

풍경이 선으로 보일 정도로 달리는 자동차로도 순간이동이 어려운 위치가 불편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직 발과 말과 수레로만 이동이 가능했던 서라벌시대에는 이 길이 주는 속도감이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던 듯하다.

당시 신라의 왕성은 언제든지 배를 대고 한 번에 들이칠 수 있는, 너무도 가깝고 불안한 위치였던 것이다.

특히, 쉼 없이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에게 이 길은 넓디넓고 신칸센처럼 빠르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대로였기에 신라인에게 항상 두려움과 불안의 원인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문무대왕의 간절함과 만나면서 지금 우리가 보는 문무대왕릉이 만들어진 것이다.

 

문무왕(文武王)이라 불리는 김춘추는 신라와 백제 그리고 고구려가 쟁패를 벌였던 역사의 현장을 누비던 정치인이자.

불러들인 당을 다시 밀어냄으로써 삼국의 통일을 달성한 군주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업적을 위해 김춘추가 감내해야 했던 시간은 너무나 길었고, 힘겨웠다.

특히 백제의 의자왕이 신라 성의 1/3을 무너뜨리고 김춘추의 딸과 사위마저 참하였지만,

애써 찾아간 고구려는 외면을 했고 복수는커녕 나라의 존망마저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

결국 당에게까지 찾아갔던 외교관 김춘추는 그 간절함으로 위기를 넘기고,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한반도에 최초의 단일국가를 세우게 된 것이다.

그렇게 대업을 이룬 문무왕이지만, 바다 너머의 왜는 잠시도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우환이자 일상적인 위기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문무왕은 바다로 갔다. 681년 죽음과 함께 유언으로 둘레가 200m쯤 되는 천연 암초 아래로 들어간 것이다.

왕이 잠들어 있다는 대왕암은 사방으로 바닷물이 드나들 수 있는 물길을 터놓아 언제나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특히, 동쪽으로 나 있는 수로는 파도를 따라 들어오는 바닷물이 외부에 부딪쳐 수로를 따라 들어오고 나감으로써

큰 파도가 쳐도 안쪽의 공간에는 바다 수면이 항상 잔잔하게 유지되게 되어 있다고 한다.

이 물길은 인공을 가한 흔적이 있고, 안쪽 가운데에 길이 3.7m, 높이 1.45m, 너비 2.6m의 큰 돌이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어 이 돌 밑에 문무왕의 유골이 있음을 우리는 믿고, 또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바위 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자신의 간절함을 유언으로 남긴 것이 아닐까? 경계하고, 준비하고, 또 보호하라는.


 대왕암 연인

<대왕암 연인>


그 바다는 지금 너무도 평화롭다.

갈 때마다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지만, 항상 변함없는 것은 평화롭다는 것이다.

처음 갔을 때는 전국의 무당들이 굿을 하고 간 흔적들이 해변 곳곳에 남겨져 있었다.

속칭 기도빨이 좋은 명소로 소문나면서 한동안 기도처로 몸살을 앓던 곳이 바로 문무대왕릉 앞 해변이었다.

불을 피웠던 흔적, 쓸쓸하게 남겨진 제사상은 새하얀 모래사장과 푸른 바다 그리고 검은 바위섬과 어우러지면서 독특하고 신비한 느낌을 전해주었다.

다시 찾은 바닷가는 주민과 어민의 것이었다.

바다에서 건져 올린 오징어가 열을 맞춰 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해변을 따라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최근 해변은 관광객들과 아이들의 차지가 된 듯하다. 군데군데 오징어도 걸려 있지만,

아이들은 과자를 들고 갈매기와 함께 해변을 뛰어다니고 있었고, 부모와 연인은 그 모습을 보며 산책과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문무대왕이 용이 되고자 했던 이유가 바로 신라인, 그리고 한반도에 살고 있는 이들의 안녕과 평화였다면 그 염원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감은사지

<감은사지>


그 염원에 먼저 화답한 이들은 문무왕의 후손이었다.

용이 된 문무왕이 수로를 타고와 쉴 수 있도록 바로 앞에 사찰을 조성한 것이다.

물론 전설이 그렇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감은사지感恩寺址는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역사를 시작했으나

중도에 죽자 그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해 682(신문왕 2) 완성한 곳이다.

절의 이름은 본래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진국사였으나 신문왕이 부왕의 호국충정에 감사해 감은사(感恩寺)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처음 만들어진 모습은 동서로 두 탑을 세우고 이 두 석탑 사이의 중심을 지나는 남북선상에 중문과 금당, 강당을 세운 형태였다.

중문은 석탑의 남쪽에, 금당과 강당은 석탑의 북쪽에 위치한다.

회랑은 남··서 회랑이 확인되었고, 금당 좌우에는 동·서 회랑과 연결되는 주회랑이 있다.


감은사지

<감은사지>


그저 터와 석탑만이 남은 곳에 발굴을 통해 절의 구조를 하나씩 완성해간 것인데, 그 와중에 전설의 배경 또한 만나게 된다.

금당의 기단 아래에 동향한 구멍을 두었으며, 중문의 남쪽으로 정교하게 석축을 쌓고, 바깥으로는 용담이라 부르는 못을 두었다.

감은사가 대종천변에 세워졌고 또 동해의 용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 못은 대종천과 연결되어 있고,

또 금당의 마루 밑 공간과도 연결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결국 이곳으로 해룡이 된 문무왕이 들어와 서리도록 했다는 믿음과 기원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오직 동과 서의 석탑 2기와 터만이 남아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유려한 석탑의 모습과 주변 시골 풍경과 너무 잘 어울리는 감은사지의 모습

당시 이곳에 담긴 기원과 아름다움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불국토의 기원과 전설의 조각 찾기

 

 불국사

<불국사>


불국토란 평화의 땅이다.

그 평화의 기원은 토함산 자락에 아름다운 사찰을, 산의 머리맡에 놀라운 석불을,

그리고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에 전설의 무덤을 일구어 놓은 것이기도 하다.

삼국 통일 이후 신라인들은 신라가 곧 불국토라는 강한 자부심과 함께 불국토를 신라 땅에 구현하고자 하는 염원이 품게 된 듯하다.

신라인의 이런 강한 신앙심은 발달한 과학 기술과 뛰어난 건축술, 예술적 감수성을 만나

통일신라 경덕왕 10(751) 불국사라는 놀라운 사찰로 피어난다.

 

경주 토함산(745m)과 인도 영취산은 산의 높이, 돌이 많은 모습

그리고 왕궁으로부터 15여리 떨어진 것과 서쪽에서 동쪽으로 산을 오르는 방향이 비슷하다고 한다.

또 부처님께서 8년간 <법화경>을 설한 기사굴산의 암대(해발 224m)와 불국사 석가탑·다보탑(해발 235m)의 고도 또한 비슷하다는데,

그 이야기에서 억지스러움보다는 당시 이 절을 세운 이들의 꼼꼼하고도 간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것은 신라인의 섬세함과 기원에 공감하기 때문이리라.

그 세운 뜻을 후대인이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지금도 불국사는 드높은 위엄과 풍부하고도 경건한 풍경으로 찾아오는 이들을 반기고 있다.


 불국사 계단

<불국사 계단>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 가장 먼저 반기는 곳은 넓고, 절묘한 입구와 가파른 33계단으로 이루어진 청운·백운교이다.

불교에서는 중생세계가 욕계 11종류(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6), 색계 18종류, 무색계 4종류의 33중생세계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부처가 되려면 지옥에서부터 무색계까지의 33중생세계를 뛰어 넘어야 된다는 것인데,

청운·백운교의 33계단을 넘어가는 것은 중생이 수행을 통해 스스로 부처가 된다는 자력신앙(自力信仰)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부처를 위한 수행까지는 몰라도 청운·백운교가 불국사를 찾는 많은 이들에게 따뜻한 추억 한 편을 남겨주는 일은 게을리 하지 않는다.

언제 어느 때 방문하더라도 그 앞에는 즐거운 얼굴로 사진 한 컷을 남기는 이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국사 석가탑

<불국사 석가탑>


청운·백운교를 건너면 마치 벽처럼 길게 이어진 전각 사이로 자하문(紫霞門)이 나온다.

그 안으로 들어서면 불국사의 자랑이자 신라의 상징이며 우리의 자부심이 되고 있는 석가탑과 다보탑이 있다.

불국사 건축의 백미로 불국사 사상과 예술의 정수요, 불교의 이념을 구현시키고자 노력한 신라 민족혼의 결정으로 찬미 되고 있는 건축물이다.

먼저 신라 석탑의 완성형으로 여겨지고 있는 석가탑이 눈에 들어온다.

조화로운 비례와 세련된 멋을 보여주고 있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석가모니 부처님을 상징하는 탑으로,

탑이 곧 석가모니 부처님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탑은 아래 부분인 기단부와 중간의 탑신부, 꼭대기의 상륜부분으로 나누는데, 매우 안정적이며 균형의 미가 돋보이게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다.

무심한 듯 선명한 탑을 찬찬히 살펴보면 아래에 연꽃모양을 한 연화석 여덟 개를 볼 수 있다.

이 연화석을 팔방금강좌라고도 하는데, 이는 부처님이 팔방의 많은 나라에 불교를 전파하고 제자들에게 이곳에 앉아 지켜보라고 한 이야기에서 연유된 것이다.

석가탑은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다 하여 무영탑(無影塔, 그림자가 없는 탑)’이라고도 부르는데 아사녀와 아사달의 전설을 품고 있다.

다만 아사달과 아사녀의 애틋한 그리움은 설화일 뿐이고, 교리적인 해석으로는 태양 자체엔 그림자가 없는 것처럼

부처님은 태양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림자가 없다는 의미라고 한다.

국보 제21호인 석가탑은 그 높은 가치만큼 도굴꾼들의 표적이 되어 두 차례나 도굴을 당했는데,

그 과정에서 탑 일부가 기울어지게 되었고 이를 복원하던 중 귀중한 유물들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진귀한 사리장엄구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그것이다.


불국사 다보탑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과 마주보고 있는 다보탑은 수많은 보배로 장엄된 탑이란 이름에 걸맞게 석가탑과는 완전히 다른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뽐낸다.

특히 다보탑이 공중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기단 사방 4곳을 계단으로 표현했다.

 

불국사 극락전과 황금돼지

<불국사 극락전과 황금돼지>


전설의 두 탑을 지나면 대웅전이 있고, 그 옆 회랑을 지나면 극락전으로 이어진다.

불국사는 마치 옛 가옥처럼 대웅전과 극락전 등을 전각들이 커다랗게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 하나의 문을 들어서고, 주붕 아래 기둥과 회랑을 지나면 마치 다른 세상의 신전과 미로를 걷는 듯한 독특하고, 안온한 느낌을 얻게 된다.

그래서 하나의 관문을 넘어서면 새로운 전각과 전설 그리고 이야기를 찾아보는 재미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극락전 현판 뒤에는 숨어 있는 복돼지 한 마리를 찾아보는 게 대표적이라 하겠다.

그리고 극락전을 나오면 극락세계를 관하는 사람과 극락세계의 16가지 모습,

아미타불의 모습 등을 상징하는 18계단으로 이루어진 연화·칠보교로 내려오게 된다.

저편으로 나무들 사이로 청운·백운교가 보이는 곳이다.

 

영지못

<영지못>


불국사를 만나는 것은 전각들 사이에서의 놀라운 보물을 만나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불국사 아래로 한참을 내려가면 석가탑과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을 간직한 영지 못이 있다.

그 슬픈 이야기에 세워진 불상도 있는데, 탑을 세운 신라인의 간절한 정성과 그것이 빚어낸 아름다움이 새롭게 다가옴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불국사의 뒤편 토함산을 오르면 석굴암을 만날 수 있다.

석굴암은 전체적인 설계와 공간 배치에서 수학적인 비례 배분과 과학적인 자연통풍, 온도 및 습기 조절의 놀라움과 함께

불교적 이상이 반영된 조각의 완성도와 예술성에서 가히 최고의 작품이라 꼽힌다.

게다가 현대의 과학과 기술로도 완전하게 복원하지 못한 암실은 안타까움과 자부심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곳이다.

물론 이제 유리벽으로 가로막혀 그 실제적 모습과 감동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석굴암으로 가는 길은 꼭 한 번씩 걸어볼만하다.

대부분 차로 올라가는 그 길이지만, 불국사 뒤편 계단을 지나,

토함산을 풍성한 나무와 동물을 마주보며 걷는 그 길은 절과 관광만으로 채울 수 없는 충만함을 만끽할 수 있게 해준다.

 

 석굴암

<석굴암>


신라가 남긴 문화유산을 보며 화려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숫자가 많은 금관뿐만 아니라

각종 토기와 거대한 고분 그리고 다양한 건축물들은 신라인의 감성을 그렇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다만, 그 화려함을 재능만으로 말하기에는 조금 부족함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어쩌면 그 작품들을 끊임없이 만들던 그들의 기대와 이상 그리고 간절한 기원을 이해해야만

천년의 세월을 버텨낸 아름다움의 힘을 제대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게 된다




글 이철호 작가



전)월간 러너스코리아 기자

전)격월간 연콘텐츠 기자

전)수원청소년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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