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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조선의 아름다움을 만나다 스크랩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with 이철호 작가



조선의 아름다움을 만나다

보길도와 윤선도 유적지-

 

 

우리의 역사 곳곳에는 멋과 풍류가 새겨져 있다.

화려한 신라의 유적이 그렇고, 세련된 백제의 유물 역시 마찬가지이다.

조선의 그것은 좀 더 일상적이고, 풍부하며 또한 다채롭다.

특히 유교적인 절제 속에서도 은근하고도 선명하게 드러나면서 어우러지는 개인의 재능과 감각은

비슷해 보이는 유물과 유적 속에서도 독특한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시대의 가객이었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선조 20) 1671(현종 12))가 남긴 공간의 미학이 그와 같은 게 아닐까 싶다.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던 우리 민족의 풍류에서도 고산의 정원은 독특하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정자를 세워 보고, 즐기던 선비들의 모습과 달리 고산은 풍경을 기다리지만은 않았다.

자신만의 시선으로 무릉도원을 찾고, 또 돌과 물과 나무를 벗 삼아 그런 공간을 가꾼 것이다.

여전히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라 불리는 고산의 흔적을 찾아 보길도로 떠나본다.

 

 

땅끝에서 보길도까지


 땅끝항과 여객선

<땅끝항과 여객선>


완도군 보길면 보길도는 추자도를 거쳐 가장 빨리 제주에 가는 길목에 자리한 섬이다.

그 섬을 가기 위해서는 한반도 땅의 끝으로 가야 한다.

땅끝마을에는 주변 섬들을 오가는 여객선을 탈 수 있는 작은 항구가 있고, 그곳에서 보길도와 연결된 노화도로 가는 배가 30분마다 출발한다.

원래 보길도로 들어가는 배들이 있었지만 노화도와 보길도 사이에 보길대교가 만들어진 이후에는 해남에서 떠나는 배는 노화도로만 들어간다.

차를 가득 실은 배가 몸을 천천히 돌리더니 물위를 미끄러지듯 잔잔하게 달려간다.

노화도에서 보길도까지 거리가 제법 멀지만 택시나 교통수단이 많지 않기 때문에 섬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차를 함께 가지고 들어간다.

바람은 거세고, 파도도 낮지 않지만, 배가 넓고 무겁기 때문인지 위아래의 흔들림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덕분에 객실 의자에서 앉아 편안히 갈매기를 구경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어느덧 30여 분이 지나고 섬에 도착을 알리는 방송이 나온다. 제법 넓은 항구에 차를 내리고, 잘 닦인 도로를 타고 노화도를 지나간다.

낮은 언덕, 단정한 밭과 논이 이어지는 편안한 풍경의 끝에 제법 큰 항구와 식당가가 나온다.

그 위로 붉은 빛의 커다란 다리가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는데, 노화도와 보길도를 잇는 보길대교이다.


고산 윤선도 유적지 입구

<고산 윤선도 유적지 입구>


생각보다 길고 높은 다리에 놀라며, 그 아래 풍경을 구경하며 건너니 윤선도 유적지를 알리는 표지판이 안내하듯 나타난다.

그 안내를 따라 오른쪽 도로로 접어들어 잠시 달리니 왼편으로 만든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한 한옥이 나타난다.

한글의 아름다움을 알린 문인으로 윤선도의 자취를 간직하고, 작가들을 위한 창작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는 윤선도문학관이 그곳이다.

단정한 그 모습을 담은 뒤 조금 더 들어가면 낮고 단정한 한옥이 한 채 더 나타난다.

매표소와 사무실 그리고 작은 박물관으로 구성된 세연정과 원림으로 가는 입구였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이야기는 여행과 답삿길에서 만나게 되는 불변의 법칙과도 같다.

그나마 이곳 작은 박물관에는 세연정과 윤선도의 이야기가 촘촘하게 전시되어 있으니

별다른 사전 지식이 없이 가더라도 이곳이 어떤 곳인지는 충분히 알고 둘러볼 수 있을 듯하다.

박물관을 나서면 작은 개천과 꽃밭이 먼저 반기고, 그 옆 작은 언덕을 끼고 길을 돌아가면 방금 전 속세와 전혀 다른 아늑하지만 화려한 원림과 정자가 나타난다.

바로 그곳이 바로 가장 아름답다는 명성을 여전히 자랑하는 세연정이다



보길도에 세연정이 세워진 이유

 

세연정

<세연정>


공간의 화려함에 앞서 공간이 만들어진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논과 밭 사이의 작은 개천이 흐르던 작은 어촌마을에 조선을 대표하는 정원이 들어서게 된 여정이 오는 길의 거리와 복잡함만큼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고산이 보길도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구전설화'로 전해진다.

고산은 해남을 출발하여 제주로 향하던 중 배가 풍랑을 만나 보길도 대풍항에 정박을 하게 된다.

그날 윤선도의 꿈에 한 신선이 나타나 "굳이 제주로 갈게 없다.

보길도가 제주에 지지 않을 락지(樂地)이니 이곳에서 지내라고 현몽했다고 한다.

이튿날 뱃머리를 돌려 장사도(현재 노화도와 다리를 연결하는 보길도 앞의 섬) 옆 등문에 배를 대고 10리 쯤 골짜기를 올라가니

산이 에워싼 모습이 부용화가 피어오르는 듯 하고, 분지 안에 계곡물이 흐르며 100여 두락 이상의 전답이 널려 있어

마치 신선이 살만한 명당이었기에 윤선도는 이곳을 부용동이라 부르며 정착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질문은 다시 가지를 친다.

왜 윤선도는 그 먼 제주로 가려 했을까?

뜻도 높고, 예술적 재능이 풍부했던 고산은 누구보다도 시대와 불화한 이라고 알려져 있다.

총 세 번에 걸쳐 만 17년 동안 유배생활을 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유배와 고난에도 고산은 나라를 잊지 않았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물러섬이나 주저함이 없었던 기개 역시 그대로였던 듯하다.

마침 유배를 마치고 고산이 해남에 머무르고 있을 때 병자호란(1636)이 일어났다.

청나라 기마병은 압록강을 넘은 지 14일에 서울 근교에 도달할 만큼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고산 역시 소식을 듣자마자 지체 없이 사람들을 모아 강화도로 달려갔는데, 얼마나 서둘렀는지 먼저 출발한 이들보다 일찍 도착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서두른 보람도 없이 강화도는 이미 함락된 뒤였기에, 고산은 다시 하릴없이 해남으로 배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해남을 도착하자마자 들려온 소식은 남한산성에 있던 인조가 포위된 지 45일 만에

한강변 삼전도에 나아가 청 태종 앞에서 무릎을 끊고 강화조약을 맺어버렸다는 것이었다.

배에서 미처 내리지도 못한 윤선도는 이 치욕스러운 육지에 더 이상 발붙이고 살고 싶지 않다면서 바로 제주로 배를 띄워버렸던 것이다.

 


세연정의 풍류와 감동

 

세연정 연못

<세연정 연못>


상심에 찼던 고산은 보길도의 주산인 격자봉에 올라 섬을 둘러보면서 마음의 변화가 생긴 듯하다.

그 풍경을 보고 남긴 시구가 당시의 순간을 알려준다.

십 리의 봉호(봉래산, 즉 부용동)는 하늘이 내리신 영토이니 비로소 내 길이 완전히 막히지 않은 줄 알겠구나.”

 

그렇게 보길도의 풍광에 완전히 매료된 윤선도는 하늘이 내려준 이 땅을 자신이 꿈꾸는 이상향으로 만들기 위해 열과 성을 아끼지 않는다.

그의 정성과 미적 조형미가 가장 두드러지게 발휘된 것이 세연정이다.

격자봉 아래에서 흘러내리는 시내를 윤선도는 낭음계라 불렀다.

그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흐르다가 세연지 가까이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주변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지류들과 합하여 못을 이룬다.

물이 워낙 맑아서 못에 비치는 주변 경관이 보는 이들의 마음을 깨끗이 씻어주는 듯 하다고 하여 세연지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림자가 선명하게 비추는 맑은 물을 만들기 위해 물막이 석축도 만들고, 다섯 곳에 들어가는 입구와 세 곳에 나가는 구멍을 만들었다.

들어오고 나가는 구멍을 조절하여 입구에서는 물의 속도감을, 연못 한가운데에는 물이 고요하게 머무는 모습을 연출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거기에다 회수담 안에는 큰 돌을 놓아 태극모양으로 흐른 다름 빠지도록 만들었으며, 자연 못과 인공못 사이에는 세연정을 지었다.

고산은 더 나아가 대를 쌓고, 정자를 짓고, 나무를 심어 훌륭한 인공원림을 만들었다.

지금도 그곳은 온갖 종류의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다.

그저 아름다운 풍경 위에 정자를 놓아 즐기기만 했던 조선의 풍류는 자연과 어우러지는 세련된 미의식을 갖춘 정원으로 새롭게 발전한 것이다.

 

세연정

<세연정>


지금 보는 세연정을 비롯해 고산의 유적은 대부분 새로 복원한 것들이다.

그렇지만 판석보와 세연지 그리고 회수담 안의 큰 바위들은 당시 아름다웠던 그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때나 지금이나 세연정을 찾는 사람들을 가장 먼저 반기는 이는 놀랍게 크고 부드러운 바위들과 크고 또 작게 연결된 연못인 셈이다.

그렇게 춤을 추듯 넓고 화려하게 가지를 펼친 나무들 사이로 바위와 연못을 품듯이 정자 한 채는 한 폭의 산수화처럼 풍경 안으로 사람을 끌어당긴다.

사진은 트리밍의 예술이라고도 하는데, 시선이 닿아야 할 곳을 정갈하게 구성해놓은,

그렇지만 자연 그대로인 듯한 그 배치와 풍광에 절로 감탄을 하게 된다.

정자로 건너가 열린 문 너머로 사방을 살펴본다.

지나왔던 큰 연못과 바위 그리고 나무가 먼저 들어오고, 뒤로 고개를 돌리니 작은 연못이 또 다른 풍경처럼 펼쳐진다.

다시 정자 너머로 뒷면을 보면 작은 징검다리 너머로 돌로 쌓아올린 작은 대가 마주보고 서있다.

그 주변과 대 위는 잘 자란 나무들이 흥취를 보여주고 있다.

그곳이 가비들로 하여금 춤을 추게 했다는 동대와 서대이고, 여기서 고산은 <어부사시사>를 처음으로 노래하였다.

 

신묘년(1651) 가을 9월에 부용동에 사는 낚시꾼이 세연정 가에 있는 배 위에 이를 써놓고 아이들에게 읽도록 보이노라.”

 

사계절이 하루가 된다.


 세연정과 동대

<세연정과 동대>


 

앞바다에 안개 걷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은 물러가고 밀물이 밀려온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마을의 강 온갖 꽃이 먼 빛이 더욱 좋다

 

여름

 

궂은 비 멎어 가고 시냇물이 맑아 온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낚싯대를 둘러메니 깊은 흥을 못 막겠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안개에 덮인 강과 첩첩한 봉우리는 누가 있어 그렸는고

 

가을

 

소세 밖의 깨끗한 일 어부 생애 아니더냐?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어옹을 비웃지 마라. 그림마다 그렸더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사계절 흥취가 한가지나 가을 강이 으뜸이라

 

겨울

 

구름이 걷힌 뒤에 햇볕이 두껍구나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천지가 얼었으나 바다만은 여전하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끝없는 물결이 깃 펼친 듯하도다

 

어와 저물어 간다. 편안히 쉬는 것도 마땅하도다

배 붙여라 배 붙여라

가는 눈 뿌린 길, 붉은 꽃 흩어진 데 흥겹게 걸어가서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차가운 밤 달이 서산을 넘도록 송창에 기대어 앉아

밤경치를 보자꾸나

 

판석교와 세연정

<판석교와 세연정>


동대와 서대 사이를 지나면 이제 판석교가 있다.

마치 두 개의 세상을 나눠놓듯 단단하고, 세련되게 이어진 다리이자 보는 인공의 정원과 자연의 연못을 거느리고 있는 듯하다.

판석교를 지나니 연못을 돌아나가는 길 위로 윤선도가 활을 쏘던 곳이라는 설명과 함께 옥소대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작은 안내판이 홀로 서있다.

그리 길지 않은 거리이기에 편한 마음으로 오르기 시작한다.

그런데 몇 걸음 가지 않아 만만치 않은 경사가 쉽지 않은 여정임을 알려준다.

허리가 절로 굽어지며 숨을 쉼 없이 들이키기 시작할 때 나무들이 열리고

마치 정원 바위들의 큰형처럼 커다랗고, 햇볕에 하얗게 반짝이는 커다란 바위들을 만난다.


옥소대와 터널

<옥소대와 터널>


그 바위 자락의 아래로 아슬아슬하게 만들어진 터널과 같은 통로를 통해 옥소대의 위로 올라가본다.

주변이 한눈에 들어오는 시원함과 아늑함이 그곳에 있다.

이런 바위가 이리 가까이 있는 게 놀랍고, 이 바위 위의 풍경을 발견한 눈썰미에 감탄을 한다.

이 옥소대에서 풍악을 울리면 소리가 세연정을 둘러싼 토성에 부딪혀 소리가 세연정으로 깔리고,

이 바위에서 춤을 추면 그 그림자가 못에 비쳐 그윽한 영상을 만들어냈었다고 한다.

상상만으로도 아름다운 풍경이 그대로 그려지는 듯하다.

세상 다시없는 풍류가 이곳 섬의 작은 정원에 가득했다.

 


낙서재와 동천석실 그리고 해남 녹우당

 

낙서재

<낙서재>


세연정을 지나 다시 길을 달린다.

마을이 나오고, 작은 다리와 함께 삼거리가 나온다.

동천석실과 낙서재로 가는 길이다.

왼쪽으로 길을 틀어 위로 올라가면 개천가에 주차장이 바로 나온다.

이곳이 바로 낙선재와 동천석실을 오가던 옛 길목이었다고 한다.

먼저 콘크리트로 잘 정돈된 길을 따라 잠시 들어가니, 길의 아래로 잘 꾸며진 정원과 집들이 보인다.

윤선도의 아들이 세우고, 머물렀다는 곡우당이 그곳이다.

윤선도의 낙서재는 곡우당이 내려다보이는 바로 위에 자리하고 있다.

한 채의 단정한 한옥인데, 뒤로 언덕 위에 집을 지키듯 작은 바위들이 있다.

고산은 자신이 머물던 자연에서 만나는 바위와 나무 등에 이름을 붙이고 그들과 대화하며 아름다움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항상 그의 자취 너머에는 독특한 돌과 나무가 그린 듯이 자리하고 있다.

잠시 그 바위에 앉아 주변을 둘러본다.


낙서재와 곡수당 그리고 동천석실

<낙서재와 곡수당 그리고 동천석실>


바로 아래로 곡우당이 손에 잡히듯 보이고, 멀리 산 중턱에 마주하듯 동천석실이 한눈에 들어온다.

놀라운 배치요, 아름다운 부용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부용동에 있을 적에 윤선도는 항상 낙서재에 기거했다고 한다.

아침은 닭의 울음소리와 같이 일어나 반드시 경옥주 한 잔을 마시고는 자제들에게 강()을 했다.

그리고 조반을 먹은 후에는 사륜거에 올라타 악기를 수행시킨 다음 회수당 혹은 동천석실을 올랐고,

때때로 홀로 죽장을 짚고 낭음에 나와 노래했으나 날씨가 좋으면 반드시 세연정에까지 갔다고 한다.

세연정에서는 작은 배를 연못 위에 띄우고 물에 비친 그림자를 보면서 어부사시사를 노래 불렀다.

세상의 근심을 멀리 떠나보낸 신선의 삶이 바로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동천석실 아래 침실 

<동 >


섬세한 배치가 인상적인 곡우당을 떠나 주차장을 지나면 제법 넓어진 개천을 넘어 산으로 들어가는 작은 길이 보인다.

동천석실로 올라가는 길이다.

산 중턱이라는 위치가 부담스럽지만, 낙서재에서 눈이 마주친 이상 그 놀라운 석실의 기묘함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산길로 접어든 잠시 후,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막 나올 때쯤 갑자기 하늘이 열린다.

멀리서 볼 때는 그리 높은 중턱인데, 산길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천석실의 입구에 도착한 것이다.

그 위치의 절묘함에 감탄을 한다.

이런 곳을 이리 잘 찾아 이렇게 꾸며놓다니, 또다시 공간에 관한 그의 눈썰미에 감탄이 새어 나온다.

아슬아슬한 산비탈에서 홀로 서있는 침실 먼저 만나고,

울퉁불퉁한 바위를 타고 위로 올라 아슬아슬한 아늑함을 보여주는 동천식실이라고 부르는 작은 단칸의 정자를 만나게 된다.

그곳은 낙서재와 곡우당 그리고 세상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작지만 자연과 주변을 품는 너른 시야와 시원함이 그곳에 있다.

이런 세심한 배치와 아름다운 풍경은 조화는 시골 어촌마을이었던 부용동을

점차 신선들이 노니는 듯한 낙원이자 자연과 인간이 만나 즐길 수 있는 풍류도로 변화시켰다.

고산은 어쩌면 정치에서의 어려움과 삶에서 만난 슬픔을 보길도라는 자연과의 정서적 교감을 통해 위로받고,

또 그 감성을 시조와 문학으로 마음껏 풀어놓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조선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가객이었던 고산 윤선도 선생만의 아름다운 시조와 운율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셈이다.


 녹우당 옆 산책로

<녹우당 옆 산책로>


동천석실의 시원함을 한껏 담은 후 보길도를 떠난다. 하지만 그 여운이 만만치 않다.

한 사람의 이야기로 마치기에는 그 풍경의 놀라움과 깊이가 너무도 넓고도 깊다.

그 여운의 기원을 찾아 두륜산 자락에 위치한 윤선도와 그 일가들이 머물던 녹우당을 찾아가본다.

고산은 42세 때 봉림대군(후에 효종)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었는데, 효종은 즉위 후 고산을 위해 수원에 집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효종이 죽자 1669년 수원 집을 뜯어 배편으로 인천 제물포에서 이곳까지 옮겨와 다시 지은 건물이 현재의 사랑채다.

이 사랑채의 이름이 '녹우당'이나 지금은 해남윤씨 종가 전체를 통틀어 '녹우당'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녹우당은 전라남도에 남아있는 민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집으로 남아 있다.

다만 지금은 문중의 사정으로 녹우당을 볼 수 없으며, 입장료도 받지 않고 있다.

그저 녹우당과 그 주변을 산책하듯 둘러볼 뿐이다.


입구에는 고산유물전시관이 있고, 거대한 은행나무가 입구를 지키고 있는 녹우당이 나온다.

녹우당 담장 밖으로는 고산사당과 어초은사당 등이 있고, 그 주변은 캄캄해질 정도로 우거진 나무와 수풀이 가득하다.

특히 담장을 넘어 거대하게 자란 은행나무와 그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은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정취를 전해준다.

돌아 나오는 길에 잠시 고산유물전시관에 들러본다.

윤두서를 비롯한 윤씨 문중의 다채로운 이야기와 예술작품들이 1층과 지하를 꽉 채우고 있다.

그 섬세한 그림과 화려한 글씨는 보는 이를 감탄시킨다.

현재 이곳에는 윤두서자화상(국보 제240), 산중신곡집(보물 제482), 어부사시사집등의

지정문화재와 3천여 건의 많은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그 보물의 가치와 다양함을 모두 담을 수는 없지만 섬세한 붓끝으로 살려낸 아름다운 그림과 꼼꼼하게 기록되고,

전승된 윤씨 가문의 이야기는 찬찬하게 만날 수 있다.

가문, 그리고 가족은 항상 같이 살아가는 이들이지만, 나누고, 잇고, 보존하고, 발전하는 방법은 익숙하지 않다.

이곳 전시실은 그 방법과 아름다움에 대한 나름의 성찰을 위한 자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와 가슴 속으로 스며들어온다.




글 이철호 작가



전)월간 러너스코리아 기자

전)격월간 연콘텐츠 기자

전)수원청소년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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