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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서울 청계천 유적 중 광통교지(사적 제461호) 2014-10-21 스크랩

서울 청계천 유적 중 광통교지(廣通橋址, 사적 제461호)의 광통교는 조선시대 광통방에 위치하고 있어 광통교 혹은 광교라고 불렀고, 소광통교와 구분하여 대광통교로도 불렀으며, 일명 큰광교・큰광통교로도 불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북광통교(北廣通橋)로, ‘승정원일기’에는 광충교(廣沖橋)로도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도성 내에서 가장 큰 다리로 길이 약 12m, 폭 15m로 길이보다 폭이 넓은 다리였다. 경복궁-육조거리-종루-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남북대로를 연결하는 도성 안 중심통로였으며, 주변에 시전이 위치하고 있어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였다.
광통교는 조선 초 도성건설 때 놓인 것으로 보이며 처음에는 토교(土橋)였다가 태종 10년(1410)에 큰 비로 다리가 유실되어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貞陵) 옛 터의 병풍석 등 석물을 사용하여 석교(石橋)로 놓이게 되었으며, 이때 신장석을 다리 교대석으로 사용하였는데 그 중 일부가 거꾸로 놓여 있다. 이 신장석은 세련된 당초문양과 구름문양이 새겨져 고려 말 조선 초기 전통문양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아름다운 문양석이 거꾸로 놓여있는 것은 조선 초기 왕권장악에 있어 신덕왕후와 정적관계에 있던 태종 이방원의 의도적인 복수심의 산물이 아니겠느냐는 추측을 낳고 있다고 한다.
경진준천(庚辰濬川)을 1760년에 한 지 2년 후인 영조 38년(1762) 다리의 기초 부분 개축과 난간을 보수하였다. 이후 1899년 종로에서 남대문 구간의 전차가 가설되면서 광통교 동쪽에 전차선로가 놓이게 되어 일부 훼손되었고, 1910년 8월에는 광통교 동쪽에 놓여 있던 전차선로를 복선화하면서 광통교 위로 전차가 다니게 되어 철근콘크리트교로 확장됨에 따라 다리 본체는 도로 밑에 묻히게 되었다. 1923년 청계천 암거공사 때 정릉의 신장석으로 이루어진 광통교 북측 교대 한가운데에 콘크리트 하수관을 박아 하수를 배출하였다. 1958년에는 청계천 복개공사가 시작되면서 광통교의 난간만 창경궁・창덕궁 등으로 이전되었고 다리 본체는 그대로 다시 묻히게 되었다. 이후 2005년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다. 교각은 고가도로 아래 묻혔었는데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발굴되어 다시 복원하였다. 신덕왕후의 능침을 지켜야할 신장석이 육백여년 가까이 묻혀 있다가 청계천 복원공사로 인해 햇볕을 보게 된 것이다. 물길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저항력을 최소화 하도록 교각을 마름모꼴로 세웠다. 광통교에 사용한 신장석과 우석(隅石)은 조선시대 최고의 석공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서 예술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서울 청계천 유적 - 광통교지, 수표교지와 오간수문지(서울 淸溪川 遺蹟 -廣通橋地, 水標橋址와 五間水門址, 사적 제461호)는 청계천은 개천(開川, 인공적으로 물길을 만든 하천)으로서, 도성을 둘러싼 목멱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등에서 발원하여 도성 중심부를 서에서 동으로 흘러 중랑천에서 합류하며, 그 길이는 11Km에 달한다. 청계천에는 모전교(毛廛橋), 광통교(廣通橋), 장통교(長通橋), 수표교(手標橋), 하랑교(河浪橋), 효경교(孝經橋), 마전교(馬廛橋), 오간수문(五間水門 - 도성 개축 시에 물길을 고려하여 청계천에 놓은 성벽의 하부구조물로 동대문에서 광희문으로 연결되는 부분에 축조되어 있었다고 한다. 다섯 칸의 홍예문이 있었으며, 상부에 성벽이 축조되어 있었던 사진이 전하고 있다.), 영도교(永渡橋) 등 많은 다리와 수문이 설치되었으며 그 변화상은 도성의 변화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들 다리 관련 유구들은 조선시대 토목기술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설치 및 변천과정의 연구를 통해 도시기능의 확대 및 도성관리체계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종로구 관철동 270-1번지 외, 중구 남대문로 9 외 * 저널로그: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15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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