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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칼럼

성북동에서 찾는 역사와 문화의 향기 스크랩

작성자
신병주
작성일
2011-12-28
조회
7701


성북동에서 찾는 역사와 문화의 향기

「성북동 산에 번지(番地)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 성북동비둘기 (김광섭) -

‘성북동’하면 우리는 국어 교과서에서 배운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를 떠올린다. 이 시는 1960년대 급격히 진행된 도시 개발 속에서 성북동 삶의 터전이 사라지고 있음을 아쉬워하는 마음을 담아냈다. 그러나 50여 년이 지난 지금, 성북동은 답사하기 좋은 동네로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낙산공원에서 성북동에 이르는 약 3㎞ 길은 서울 성곽 길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걷기 좋은 길로 유명하며, 심우장ㆍ수연산방ㆍ최순우 고택 등 역사유적지도 많이 남아 있어 볼거리가 많다. 골목마다 역사와 문화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성북동. 그 역사 유적지를 찾아 성북동으로 답사를 떠나보자.

◆ 성곽 길에서 만나는 유적, 혜화문(惠化門)

낙산공원에서 성북동 쪽으로 성곽 길을 따라 걷다보면, 저만치 큰 문이 보인다. 동소문(東小門)에 해당하는 혜화문이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지리전고(地理典故)」에서는 이 문이 처음 세워졌을 때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는데, 창경궁의 홍화문(弘化門)과 혼동된다 해서 1511년(중종 6)에 혜화문이라고 이름을 고쳤다고 전한다. 혜화문은 북대문인 숙청문의 통행이 금지되었기에, 양주와 포천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출입문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28년에 도시의 확장과 더불어 헐리게 되었고, 현재의 문은 1992년에 다시 복원된 것이다.

혜화문

◆ 성북동에서 찾은 문화 예술인의 흔적

한국 근현대 시기 성북동은 다수의 문화 예술인들을 배출한 곳이었다. 김광섭을 비롯하여 조지훈, 이태준, 한용운, 전형필, 최순우, 윤이상, 김용준 등이 성북동에 근거지를 둔 대표적인 문화예술인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고 서로 교유하였는데, 이들의 교유를 보여주는 자료들도 있다. 1955년 최순우의 부탁을 받고 전형필이 써 준 ‘亞樂書室(아락서실)’ 글씨, 조지훈이 1954년 ‘신천지’라는 잡지에 실은 한용운에 대한 글과 한용운 초상, 윤이상이 1949년 조지훈의 시 ‘고풍의상’에 곡을 붙인 가곡의 악보 등이 그것이다.

미술사가 김용준은 “성북동의 산보로는 달밤이 더욱 좋다. 그러나 반드시 겨울 달밤이어야 한다. 나는 가끔 찬 달밤 별들을 헤아리며 등불이 묵묵히 박힌 산 밑 길을 묵묵히 거닐기도 한다.”라고 하였다. 깊어가는 겨울, 성북동을 답사하고 달밤에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며 그들의 낭만과 열정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 만해(萬海) 한용운의 심우장(尋牛莊)

성북동의 좁고 가파른 골목의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독립운동가이자 승려이며 시인인 만해 한용운(1879~1944)이 머물렀던 ’심우장’이 나온다. 한용운은 일제강점기인 1933년부터 10년 정도 이곳에서 지냈다. 그는 북향으로 이 집을 지었는데, 남향을 선호하는 한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구조이다. 한용운은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되므로, 일제에 저항하는 뜻으로 북향으로 지었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총독부를 등진 채 한용운은 이곳에서 민족과 예술의 지조를 지켜내려 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이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심우장(尋牛莊)’이란 명칭은 선종(禪宗)의 수행 단계 중의 하나에서 유래한 말이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여 열 가지 수행 단계로 만들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였던 것이다. 심우장의 현판은 한용운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서예가 오세창(1864~1953)이 쓴 것이다.

1936년 『삼천리』라는 잡지에는 당대의 처사(處士) 한용운의 심우장을 방문한 기사가 실렸다. 여기에는 1930년대의 심우장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현재의 심우장과 비교해보며 당시의 풍경을 생각해 보는 것도 즐거운 작업이다.

「한양의 녯 성(城)을 등지고 돌아 안즌 이 심산유곡(深山幽谷)에 당대 처사 한용운씨를 찾게 됨을 생각해 볼 때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끗덕이여 보앗다. 산중턱에 이르러서야 ‘심우장’이라는 문패가 부튼 산듯한 순 조선식 산중 고각(孤閣) 하나를 발견하엿다. 이곳이 바로 한용운씨가 게신 곳이다. 나는 한참이나 ‘심우장’이라는 세 자를 물끄럼이 처다 보앗다. 불교에 ‘소[牛]’는 ‘마음[心]’이라, 제 마음을 찾는다는 뜻이려니 생각하니, 이 집이 선생에겐 ‘수도원’임을 넉넉히 짐작하겠더라.
넓다란 뜰 안에는 화단을 맨늘어 노와 지난 가을까지 화려하든 자취가 역역히 엿보일 뿐, 그박게는 아무것도 눈에 띄이는 것이 없다. 방 안으로 들어스니 나는 일종(一種) 무거운 공기가 업눌니움을 깨달앗다. 서화병풍 쭉 둘은 가운데 선생이 금시 참탄하시든 모양인지 고든 자세 그냥 그대로 자리에 앉으섯다. 벽에는 ‘관제(貫齊)’의 묵화(墨畵)가 여러 폭 걸니여 잇고 남쪽 창문 우이로는 ‘무애자재’라는 석정(石丁)의 명필액이 가로 걸녀 잇다. 한편 구석 커다란 책장 속에는 몬지 앉은 고서(古書)가 꿈을 꾸는 듯, 또 한편에는 불교의 서적과 문예서적이 열을 지어서 서잇다. 그 엽에는 ‘수선화’ 화분 두 개가 가즈런히 노여 잇다.」1)

-[삼천리] 제 8권 제6호(1936년 6월 1일)-

한용운이 죽은 뒤 심우장에는 외동딸 한영숙이 살았다. 그런데 일본 대사관저가 이 곳 건너편에 자리 잡자 명륜동으로 이사를 하고 심우장은 만해의 사상연구소로 사용되었다. 현재 한용운이 쓰던 방에는 그의 글씨, 연구논문집, 옥중공판기록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마당 한쪽에는 그가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가 서 있다.

1)인용문은 당시의 원문을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현재의 맞춤법과는 차이가 있다.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 소설가 이태준의 수연산방(壽硯山房)

성북동에는 멋스러운 한옥 건물의 전통찻집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의 소설가인 이태준 선생의 외종손녀가 운영하는 곳인데, 이태준의 당호를 붙여 수연산방(壽硯山房)이라 이름 했다. 소설가 이태준(1904~?)은 1933년부터 1946년까지 이곳에서 머물면서 『달밤』, 『돌다리』, 『황진이』 등의 작품을 집필했다. 그리고 수연산방에서는 운보 김기창과 우향 박래현 부부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소설 창작에 매진했던 상허 이태준과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던 김기창과 박래현, 그들의 예술혼을 생각하며 전통차 한잔을 즐기는 여유를 만끽하기 바란다.

소설가 이태준의 수연산방

최순우 옛집

* 최순우 옛집

성북동 골목 주택들 사이에는 특히 눈에 띄는 한옥건물이 있다.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며, 미술사학자인 혜곡(兮谷) 최순우(1916~1984)가 거처하였던 곳이다. 그는 1976년부터 1984년까지 이곳에 머무르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등의 산실이 이곳이다.

한국미에 대한 빼어난 안목을 가졌던 최순우답게 그의 집에도 한국적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집은 1930년대에 전형적인 경기지방 한옥 양식을 보여준다. 2000년대 성북동 한옥의 양옥화 추세로 허물어질 위기에 처했지만, 이것을 시민운동단체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매입하여 2003~2004년에 다시 복원할 수 있었다. 민간 차원에서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활용한 점에서 의미가 큰 문화유산이 되었으며, ‘시민문화유산 제1호’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안채는 전시 공간으로 이용하고 동편 행랑채는 사무실, 서편 행랑채는 회의실과 휴게 공간 등으로 꾸며져 있다.

* 간송미술관

마지막으로 소개할 곳은 성북동을 더욱 운치있게 만드는 곳 간송미술관이다. 간송미술관은 1966년 전형필(全鎣弼)의 수집품을 바탕으로 하여, 한국민족미술연구소 부설 미술관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간송 전형필은 일제강점기에 사재를 털어 김홍도ㆍ신윤복ㆍ정선ㆍ김정희 등의 그림과 글씨 및 고려청자 등 국보급 문화재들을 사들여 우리 문화재를 지켜낸 인물이었다. 그는 이렇게 문화재들을 수집하여, 1936년 지금의 미술관 건물인 보화각(寶華閣)을 지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및 8ㆍ15 광복, 6ㆍ25전쟁 등을 겪으며 일반 공개를 위한 미술관은 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후에 전형필의 뜻을 이어 후손과 제자들이 개인 미술관을 세웠고, 그의 호를 따서 ‘간송’이라 이름 하였다.

미술관은 아담한 2층 건물로 규모는 작지만, 조선시대의 이름난 문인들의 작품을 비롯하여 국보로 지정된 『훈민정음』(국보 제70호)이 있는 등 국보와 보물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어 그 가치는 엄청나다. 이렇게 소장한 미술품을 1971년부터 해마다 5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정기적으로 특별 전시회를 개최하여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관심이 모아지면서, 이른 아침부터 전시 작품 보기 위해 미술관 밖에까지 길게 줄이 늘어서는 진풍경이 해마다 펼쳐지고 있다.

간송 미술관

이밖에도 성북동에는 조선의 왕비가 친히 누에를 치던 ‘선잠단(先蠶壇)’을 비롯하여 19세기 서울의 전형적인 별장을 보여주는 성락원(城樂園)과 법정 스님과 인연이 있는 길상사(길상사) 등 역사문화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성북동에서 역사와 문화의 진한 향기를 접해 보기를 권한다.

글, 사진=신병주/현건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석사, 박사). 서울대 규장각 학계연구사를
거쳐, 현재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평전]이 있으며 역사의 
대중화에 깊은 관심을 가져 KBS의 [역사추리], [TV조선왕조실록], [역사스페셜], [한국사 전]과
교육방송의 어린이 역사드라마 [점프]의 자문을 맡았다. 조선시대 사상과 문화를 주로 연구하고
있다. 남명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조선시대사학회 연구이사, 외규장각도서 자문포럼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등이 있다.
’신병주의 현장과 역사’소개
역사적 숨결이 배어있는 현장을 찾고 그 곳에서 스스로 역사를 되살려낼 기회를 갖는다면
역사는 생생하게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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