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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칼럼

자주독립과 항일, 민주의 상징 독립문 공원 스크랩

작성자
김정신
작성일
2011-11-28
조회
8986


자주독립과 항일, 민주의 상징 독립문 공원

지금의 의주로 지역을 포함해 한양의 서북쪽 경계인 서교(西郊, 무악재를 포함)일대는 조선시대에 중국으로 오가는 길목이었다. 이곳에 중국의 사신을 맞아들이던 모화관(慕華館)이 있었고, 그 앞에는 사대(事大)의 상징적인 문-영은문(迎恩門)-이 있었다. 중국 사신들은 의주를 거쳐 오랜 여행을 끝내고 고양 벽제관에서 잠시 머물며 의복을 단정히 한 다음 무악재를 넘어 한양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이 영은문을 지나 숙소인 모화관에 머물렀다.

중종 때 만들어진 이 문은 1칸 규모의 일주문 형태로 두 개의 긴 주춧돌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우진각지붕을 얹었는데, 지붕은 청기와로 덮고 각종 동물 모양을 조각한 잡상을 배치하였다. 갑오개혁으로 집권한 김홍집내각은 1895년 2월 이 문을 철거함으로써 중국에 대한 사대를 거부하고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아관파천 기간(1896. 2. 11 - 1897. 2. 20) 동안 고종은 근대국가건설을 위한 구상과 준비 작업을 펼쳤고, 서재필을 중심으로 독립협회가 결성되었다. 독립문과 독립공원의 건립이 설립목적이었던 독립협회는 1896년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고쳐 부르고 독립협회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이어 국왕의 동의를 얻고 뜻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어, 1896년 11월 21일 정초식을 거행한 후 만 1년 1개월 후인 1898년 1월 중순에 독립문을 완성하였다. 당시 독립문의 건설은 중국 뿐만 아니라 일본, 러시아, 그리고 모든 유럽 열강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였으며, 위치는 영은문이 있던 자리로부터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이었다.

영은문(1902년  서울주재 이탈리아 외교관 카를로 로제티의 사진), <꼬레아 에 꼬레아니>, 하늘재, 2009)

독립문과 독립문 서편 언덕에 독립관의 모습이 보인다.(1902년  서울주재 이탈리아 외교관 카를로 로제티의 사진), <꼬레아 에 꼬레아니>, 하늘재, 2009)

독립문(현재의 모습)

서울시에서는 1992년 서대문형무소 자리에 독립공원을 조성한 후 일제강점기 때 헐린 독립관의 복원공사에 착수하여 본래 독립문 남쪽에 있던 독립관을 1996년 12월 현재의 독립문 서북쪽에 복원하였다. 독립문 역시 본래는 현재위치에서 동남쪽으로 70m 떨어진 도로 한복판에 있었는데, 1979년 금화터널과 사직터널을 연결하는 고가도로가 건설되면서 영은문 주초(사적 제33호)와 함께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독립문(사적 제32호)은 러시아인 사바찐이 설계했고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하였으며 한국인 기사 심의식이 중국인 인부들을 동원하여 시공하였다. 화강석을 쌓아 만든 이 문은 높이 14.28m, 너비 11.48m로 중앙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왼쪽 내부에는 옥상으로 통하는 돌계단이 있다. 옥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으며, 홍예문의 가운데 이맛돌에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오얏꽃 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 위의 앞뒤에는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는 글씨와 그 양옆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독립문에서 200m 쯤 올라가면 현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재단장된 서울 구치소(사적 제324호)가 나온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해 1907년 인왕산 기슭에 건립한 근대적인 감옥이다. 1908년 경성감옥으로 문을 연 이후 애국인사와 항일투사들이 체포, 투옥되어 가장 많은 곤욕을 치른 곳이다. 김구선생·강우규·유관순 열사 등이 이곳에 수감되었었으며, 4·19혁명과 5·16군사쿠데타와 같은 정치적 변동기에는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기도 하였다. 1912년 서대문감옥으로, 1923년에는 서대문 형무소로, 1967년에는 서울 구치소로 여러 번 개칭되었다가 1987년 서울 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함에 따라 사적지로 지정되었으며, 옥사와 사형장 망루 등을 원형대로 복원하고 1998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영은문 주초, 독립문, 서울구치소 등 3개의 국가사적이 이웃해 있는 독립문공원은 구한말의 자주독립,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광복 이후 정치적 격변과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의 고난과 아픔을 간직한 현장으로 그 역사적 의미가 매우 깊다.

왼쪽 -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오른쪽 - 서대문 형무소 옥사동 내부

글, 사진=김정신
- 현 단국대 건축학과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 저서 <한국카톨릭성당건축사>, <유럽현대교회건축>, <건축가 알빈신부>
’김정신의 근대유산 이야기’ 소개
외세의 침략과 일제의 식민통치로 얼룩진 한국 근대기의 유산은 ’자주성을 상실한 시대’라는 부정적인 인식으로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채 쉽게 사라졌다. 그러나 근대는 전통과 현대를 잇는 가교이자 한국사에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역사적 시기로서 당대의 문화, 역사를 반영하는 우리 고유의 귀중한 유산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근대유산을 보호하는 등록문화재 제도가 도입된 지 10년이 되었다. 그동안 적지 않은 건축물, 토목, 산업시설과
문학예술작품, 생활문화자산, 역사유적 등이 등록되고 보호되고 있다.
근대유산의 현장을 찾아 유산의 내력과 현황을 소개하고, 유산의 다양한 가치와 등록과정의 이야기 등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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