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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칼럼

지금은 사라진 비파이야기 스크랩

작성자
한국문화재재단
작성일
2011-01-12
조회
9234


지금은 사라진 비파이야기 - 자료사진: 중국 당나라때 궁정에서의 비파연주모습

옛 시조를 읽다가 웃음 지으며 골라놓은 글중에 현악기 ‘비파’ 와 문답하는 내용이 있다.

비파야 너는 왜 오며 가며 앙종거리기만 하니?/ 가냘픈 내 목을 힘껏 끌어안고/ 움파 같은 큰 손으로 내 배를 잡아 뜯는데 앙종거리지 않고 어떻게 하겠니?/ 아마도 옥쟁반에 큰 구슬, 작은 구슬 떨어지듯 아름다운 소리는 너 뿐인가 하노라










중국의 당삼채 유물 중 낙타위에서 연주하는 악대  

  ‘비파야 너는 왜 오며 가며 앙종거리기만 하니?/ 가냘픈 내 목을 힘껏 끌어안고/ 움파 같은 큰 손으로 내 배를 잡아 뜯는데 앙종거리지 않고 어떻게 하겠니?/ 아마도 옥쟁반에 큰 구슬, 작은 구슬 떨어지듯 아름다운 소리는 너 뿐인가 하노라’ 라는 내용이다. 시를 지은이가 누군지, 비파를 가슴에 끌어안고 손가락으로 현을 튕겨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연주법을 잘 알고 있으며, 이 소리를 퍽 즐기는 이였음에 틀림없다. 어느 음악 애호가의 ‘비파’ 시조를 실마리 삼아, 지금은 사라지고 만 비파 이야기를 풀어보기로 한다.

 비파는 꼭지 부분이 좀 갸름하게 생긴 배[梨]를 반쪽으로 잘라 놓은 것 같은 공명통에 넉 줄 또는 다섯 줄의 현을 걸어 술대나 작은 나무판으로 현을 튕겨 연주하는 현악기이다. 위의 시조에서 ‘오며 가며 앙종거리느냐’는 표현했듯이 비파를 연주할 때는 손을 앞으로 밀어었다가 끌어당겨 연주하는데 이때 ‘미는 소리’는 ‘비(琵)’, ‘끌어당기는 소리’는 ‘파(琶)’와 같다고 해서 그 의성어(擬聲語)를 따라 악기 이름이 ‘비파’가 되었다고 한다.

이 악기의 탄생지는 인도와 중앙아시아 지역 일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 악기가 5세기 전후에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 한국, 일본으로 퍼졌는데, 사막을 오가던 중앙아시아 사람들은 이 악기를 말이나 낙타 위에서 연주했다. 아름다운 당삼채(唐三彩) 예술품 중에는 이런 연주모습을 보여주는 조각품들이 적지 않다. 또 일본의 정창원에는 화려한 문양과 장식으로 꾸민 10세기 이전의 유물 비파들이 전하는데, 그 고급스러운 정도로 보아 동아시아에서의 비파 애호 수준이 어느정도 였을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비파는 궁중음악에서부터 문인들의 풍류음악, 승려들의 포교음악을 연주하며 급속도로 퍼져나갔고,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동안 향비파와 당비파, 두 가지 형태의 비파가 한국악기로 정착되었고, 폭넓게 연주되기 시작하였다.

당나라 시인 백낙천의 [비파행(琵琶行)]의 소리의 이미지

 한편, 비파가 문인들 사이에서 사랑받게 된 배경에는 음악적인 면 외에 당 나라의 유명한 시인 백낙천(白樂天)이 [비파행]1)도 한 몫 한 듯하다. 백낙천은 816년(元和) 11년(816) 45세에 좌천되어 지방에서 생활하던 중에 가을날 나그네를 전송하려던 차에 세련된 비파를 소리를 듣고 연주자를 찾아나섰다. 비파 연주가의 주인공은 한때 장안의 비파명인에게 배운 기생이었는데, 나이 들어 찾는 이가 없어지자 장사꾼의 아낙이 되어 시골에 와 살던 이였다. 백낙천은 여인에게 비파연주를 청하여 들으며, 감회에 빠졌다. 화려했던 전성기를 뒤로 하고 시골의 이름 없는 아낙이 된 퇴기(退妓)와 초췌한 꼴로 강호를 유랑하는 자신의 처지에 공감하였고, 이 느낌을 시로 지어 그녀에게 바쳤는데 이 시가 곧 <비파행>이다. ‘좋은 세월을 다 보내고 이제 알아주는 이 없이 쓸쓸히 배회하게 된 사람의 심정을 담은’ 백낙천의 <비파행>은 동병상련을 느끼는 문인들을 통해 애송되었고, 이와 함께 비파소리는 외롭고 쓸쓸한 이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슬프고 처절한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비파를 연주하는 조각상

조선후기의 문인 자하 신위의 [비파가]

 조선 후기 시서화의 삼절(三絶)로 이름난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5)도 를 지었다.

  “나 또한 중년 이래로 슬픔의 상처 받아 온 터에/ 또 이제 감회에 휩싸이니 마음이 몹시도 사나옵구나. … 강군(姜君)이 나를 위해 발(撥)을 들고 비파 네 현을 헤치니/ 비애를 담은 곡조들 처절하고도 툭 티어 울리네”2)

 라는 시에서 백낙천의 <비파행> 느낌이 떠오르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신위가 이런 글을 쓰게 된 배경에는 중국 명(明)나라 궁정의 궁녀였다가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맺은 인연으로 조선에 온 굴씨(屈氏, 1623-1697)에 관한 것이다.

  굴씨는 중국 소주에서 태어나 궁녀가 되었다. 명이 패망하자 궁에서 나와 민간으로 피난하였지만 청의 구왕(九王)3) 에게 잡혀 황실에 귀속되었다가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가있던 소현세자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이후 소현세자 일행이 귀국할 때 다른 환관, 궁녀와 함께 조선에 왔는데 소현세자가 귀국 후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나고, 청나라에서 환국명령을 받고도 귀국하지 않았다. 본래 명나라 궁녀였으므로 다시 청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굴씨는 평생을 조선에서 살다가 70세가 넘도록 살았는데, 늘 고향을 그리워하였으며, ‘나를 부디 서쪽으로 가는 길목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현재 굴씨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소현세자 종중 묘역에 있다. 4)

  굴씨는 조선에 살면서 여인들의 쪽머리(결발, 結髮)하는 법과 동물 길들이는 법 등을 가르쳤으며 특히 비파 연주에 능하여 장악원의 악사들에게 이를 전수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수십년이 흐른 후 자하 신위는 장악원의 전악 강씨의 비파연주를 듣게 되고, 그의 연주가 굴씨로부터 이어져 온 것임을 알게 되고, 우연히 굴씨가 명나라에서 가져 온 비파를 손질하였다는 약산(若山) 강이오(姜彛五, 1888- ?)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숭정궁인 굴씨 비파가(崇禎宮人屈氏琵琶歌)]5)를 지었다. 그 서문에 상세한 내력이 소개되어 있다.

  “내가 장악원(掌樂院)의 나이 먹은 이에게 알아보니 굴씨는 세자를 따라 들어와서 향교방(鄕校房)의 저택에 살았다. 가끔 장악원의 사람을 불러다가 발을 치고서 비 파 타는 법을 가르쳤는데, 지금 강전악(姜典樂)이란 이는 사숙(私塾)의 제자라고 한 다. 굴씨가 타던 비파는 자단목(紫檀木)으로 만든 것인데 무늬가 찬란하게 서리어 머리칼이 비칠 정도였다. 후세에 사람들은 그 가치를 알지 못해 물 뜨는 그릇으로 사용했으며 마침내 숯 광 속에 버려지기에 이르렀다. 근래 강약산(姜若山, 성명은 姜彛五, 강세황의 손자)이 그것을 우연히 어느 종친 집에서 발견해 다시 수리를 했 다. 그리고서 음을 살펴서 조율(調律)을 해 보니 대단히 아름다운 소리가 울려 나 오는 것이었다. 나는 강약산의 이 일에 감탄했던 바 굴씨의 숨은 사적을 채집해 갖 추어 기록을 하고 이에 노래를 지어 붙인다.”

  신위는 비파 연주하는 굴씨의 모습을 상상하여 “ 장렬왕후 궁녀 가운데 제일로 꼽혀/ 만수전 봄빛에 활짝 피었네/ 터져나오는 소리는 은혜와 원한으로 여운이 길어/ 바람 모래 부는 가운데 비파 소리가 전각을 감도네/ 신령스런 솜씨로 옛 명인들을 굴복시키고/ 눈물 고인 눈으로 같이 온 고국 사람 바라보네~~ 비파를 가슴에 안고 무릎 위에 놓은 채 몸에서 떼놓지 않았으니/ 미인은 흙으로 돌아갔어도 악기에 배인 향기는 남아있네” 라고 읊었다.

  강세황의 아들 강이오가 굴씨의 비파를 찾아 다시 연주할 수 있게 손질하고, 신위가 옛 악사를 찾아 굴씨의 이야기를 회고한 것을 보면, 인조때부터 약 100여년간 중국에서 온 굴씨의 이야기가 장안의 풍류객들 사이에서는 꽤나 관심을 끌지 않았나싶다.

왼쪽 - 사궤장연회도첨(이경석)확대그림<br/>오른쪽 - 숙종기로연 -경현당석연도-처용무<br/>

 비파는 조선후기의 궁중기록화와 풍속화에 간간히 모습을 드러냈다. 궁중 기록화 속에서 비파는 여러 관현악기와 함께 편성되었고, 문인화, 풍속화 속에서는 독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문인들의 일상에 수용된 비파연주의 대표적인 모습은 김홍도의 <포의풍류>와 이경윤의 으로 모두 탈속, 은둔의 이미지와 통하는 그림들이다.

 한편, 신위보다 한세대 쯤 전에 살았던 화가 강희언(姜熙彦, 1710~1784)은 중국의 4대 미인으로 꼽히는 왕소군이 등에 비파를 짊어지고, 한(漢)나라를 떠나는 슬픈 이별의 순간인 을 그렸다. 왕소군(王昭君)은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비파솜씨로 슬픈 심정을 노래하면 하늘을 나는 기러기들이 날개 짓을 잃어버리고 떨어져 죽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좀 엉뚱한 추측일지 모르겠지만 강희언은 당시 회자되던 굴씨 이야기에서 그림의 동기를 얻어 고국을 떠나는 비파타는 궁녀를 소재로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강희언은 이 그림에 “황색모래 흰 풀도 슬픈 비파곡조를 듣는 듯 하구나 (黃砂白草如聞琵琶哀然之曲)”라는 제문을 달았다.

왼쪽 위 - 이경윤(전) 주상탄금_비파<br/>왼쪽 아래 - 포의풍류도 확대<br/>오른쪽 위 - 강희언_소군출새

 그러나 이렇게 오랜 세월을 우리와 함께 호흡해 온 비파 음악은 19세기 이후 그 전승이 위축되는 기미를 보이다가 20세기에 들어 아예 전승이 단절되고 말았다. 해방 이전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의 연주회 프로그램에도 이따금 비파가 들어 있었는데, “이때 비파 연주자들은 무대 위에서 내내 조율만 하다가 내려왔다”는 얘기가 생겼을 정도로 비파 연주는 의미를 잃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은 오랜 옛날, 거의 비슷한 시기에 비파를 알게 된 후 지금까지 아주 활발하게 비파 음악을 향유하고 있는 중국이나 일본과 아주 다른 것이다. 이렇게 비파 음악이 단절된 배경과 이유를

  “비파의 성능이 거문고와 흡사했기 때문에 1930년대까지도 거문고의 연주법에 준 해 연주되었으나 결국 거문고의 위세에 밀려서 사라졌다. …역안(力按)에 의해서만 우리 음악이 요구하는 자유로운 음 변화가 가능하기 때문에 기타처럼 경안(輕按) 밖에 못하는 비파가 우리나라에서 쇠퇴한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7)고 보는 견해도 있고, 연주자들이 좀더 비파 연주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적어도 ‘단절’되지는 않았을 것이라 아쉬워하는 의견도 있다. 천 년 이상 전승되어 오던 악기가 우리가 숨쉬는 시대에 슬그머니 그 음악적 생명력을 다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방치’의 결과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 회복을 위해 국립국악원과 작곡가 이성천(李成千) 교수 등이 두 가지 비파 중에서 향비파 복원 가능성 및 그 복원 연주를 시도한 적도 있고, 국립국악원의 정악 연주회에서 이따금 합주에 비파를 곁들이는 때도 있다. 그리고 최근들어서는 중국에서 배워온 비파연주법으로 한국의 비파연주 맥을 이어보려는 노력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아직 그 회복 가능성 여부는 이들의 노력에 달려있는 듯 하다.

직선

1) 백낙천의  ’비파행’은 816년 11년 백거이가 45세때 지은 시다. 백낙천이 45세때에 구강군에<br/>사모로 좌천되었으며 이듬해 가을에 분포구에서 나그네를 전송하려던 밤에 누군가 비파를 타는 소리를 들었다.<br/>비파 소리가 쟁쟁하고 장안의 세련된 가락이었다. 그 사람을 찾아 물으니 본래 장안의 기생으로 비파의 명인 <br/>목과 조에게 배웠다고 하며 늙고 시들어 장사꾼의 아낙이 되어 이 곳에 와 있다고 했다. 다시 술자리를 차리고 <br/>그녀로 하여금 비파를 여러 곡 타게 했다. 연주가 끝나자 그녀는 젊었을 때의 환락에 젖었던 추억과 늙어 <br/>영락하여 초췌한 꼴로 강호를 유랑하는 애처로운 자시느이 신세를 털어 놓았다. 나도 귀양살이 2년만에 담담한<br/>심정이었으나 그녀의 말에 동하는 바 있어 새삼 적거하는 서러움을 느꼈으며 이에 길게 시를 지어 그녀에게 바치고자<br/>했다. 모두 612자(사실은 88귀 616자)의 시로 비파행이라고 이름했다.<br/>2)신위의 책<br/>3)누루하치의 열넷째 아들<br/>4)굴씨의 묘는 양시 덕양구 대자동 간촌 마을에 있고, 소현세자 종중에서 2001년 4월 일에 묘비를 해 세웠다. 묘비 전면에는 ’소현세자 심관 시녀 굴씨지묘’,<br/>후면에는 ’소현세자께서 청나라 심관에 계실 때 청 태종이 세자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 세자께서 환국시에 입궁하셨다가 세상을<br/>떠났으며 본인 유지에 따라 고향 가는 길목인 이곳에 모시었다’라고 쓰여있다.<br/>5)신위의 책<br/>6) 소현세자의 귀국은 1645년이었다.<br/>7) 황병기, ’거문고와 기타’<깊은밤 그 가야금소리>, 풀빛,1994,169-172쪽

송혜진

글 : 사진 = 송혜진/현 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교수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과정에서 한국음악사를 공부하여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며 숙명가야금연주단 대표를 맡고 있다. 1987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음악평론 부문에 당선하였으며, 영국 더럼대학교 음악대학 객원연구원, 국립국악원 학예연구사 및 학예연구관, 국악 FM 방송 편성제작팀장을 맡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한국 아악 연구], [한국 악기], [우리 국악 100년], [국악, 이렇게 들어보세요], [청소년을 위한 한국음악사] 등이 있 으며, 숙명가야금연주단의 베스트 컬렉션 등을 기획, 제작하였다. 우리의 음악이 오늘과 미래의 삶에 의미 있는 유산으로 숨쉴 수 있도록 하는 데 관심을 두고 다양한 활동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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